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192화 (192/345)

# 192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 한참을 멍하게 서 있던 강 이사는 지은의 부름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괜찮으세요?”

“족히 4년 동안은 걸 그룹 쫓아다니지 않아도 되겠다.”

“예?”

“하하하, 아무것도 아니야. 지은아, 내일 열심히 해 봐. 전하께서도 많이 기대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내가 말했던 거 기억하고 있지?”

“그,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거 말인가요?”

강 이사는 그녀에게 가끔씩 센추리에 관해 이야기할 때가 있었다.

물론 동북아를 둘러싼 여러 나라들의 역학 관계나 세력 관계 같은 것을 이야기해 준 것은 아니었다.

그런 것보다 사람들이 왜 본 게임에 열광하는지를 자세하게 알려 주었다.

현실감이 대단하다, 또 다른 조국을 보는 것 같다, 대리 만족을 느낄 수 있다, 전쟁을 체험할 수 있다, 역사의 산증인이 될 수도, 내가 역사를 바꿀 수도 있다 등등.

강 이사가 이야기한 것 중에 지은이 가장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것은 바로 ‘내가 역사를 바꿀 수도 있다.’였다.

물론 그녀가 역사 전체를 바꾸겠다는 것에 매력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지은은 가수였고 예술가였다. 역사 전체보다는 예술사를 바꾸는 것에 매력을 느꼈다.

‘이 나라의 음악은 이제 막 태동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음악이 태동하는 시대의 한복판에 있어. 내가 이 나라의 예술사를 바꾸는 것도 가능해!’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것.

7년 차 중고 연습생이었던 그녀에게 이보다 매력적인 일은 또 없었다.

“너는 내일부터 시대의 아이콘이 될 거야. 현대의 아이돌보다 인기가 많아진다는 거지. 이 나라의 역사에도 기록될 정도로 말이야.”

시대의 아이콘이 될 수 있다니!

엘비스 프레슬리, 마이클 잭슨, 휘트니 휴스턴, 비틀즈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과연 자신 따위가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지만 가슴이 두근두근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니 당당함을 가져. 너는 머지않아 만인이 선망하는 대상이 될 테니까.”

“네!”

현실 시간으로 4시간 정도가 지나자 마침내 그녀의 첫 공연 시간이 되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지은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의 눈에 수백 명의 사람이 보였다.

대부분이 현대와는 전혀 다른, 조선 시대의 그것과 같은 복장들을 하고 있었다.

이곳이 현실이 아닌 가상 세계임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 세계가 가상 세계라고 해서 지금 닥친 현실까지 가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분명히 무대 앞에 섰고 그녀의 앞에는 수백 명의 관객이 존재하였다. 관객들 앞에서 그녀가 할 일은 단지 최선을 다하는 것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몰라, 날기 전의 나비라는 걸. 너의 날개를 펴 봐. 누구보다 위로. 하늘 높이 날아올라.”

마침내 그녀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대한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그녀의 노래가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 * *

처음 그녀가 무대에 올라섰을 때, 공터에 모인 사람들은 따분해하거나 소란을 떨거나 하면서 집중을 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노래란 농사를 지을 때, 아니면 기루에서 기녀들이 부를 때에 간혹 듣는 것이다.

한마디로 노래란 부차적인 가치 이상의 것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공연을 보러 온 이유도 그저 공짜로 밥 한 끼 얻어먹겠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예쁘다! 엄청 예뻐!”

“선녀 아니야?”

하지만 지은이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인 순간, 앞줄의 사내들을 시작으로 관객들의 집중도가 크게 올라갔다.

아름다운 푸른색 드레스를 입은 긴 생머리의 미녀!

수도의 시민들은 그녀를 보고 ‘선녀’라며 탄성을 내질렀다.

“예쁘긴 예쁘군. 현실보다 훨씬 예쁜 것 같은데?”

“운이 좋게도 미녀 아바타를 얻었더군요. 크으, 안 그래도 노래 실력이 대단한데 저리 예쁘기까지 하니, 스타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효과인 것 같은데······.”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은이가 얼마나 노래를 잘 부르는데요. 아마 현리의 시민들 전부가 열광하게 될 것입니다.”

그 자신만만한 태도에 호영은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저 어깨만 으쓱거렸다.

그때 지은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몰라, 날기 전의 나비라는 걸. 너의 날개를 펴 봐. 누구보다 위로. 하늘 높이 날아올라.”

첫 소절의 첫 음을 듣는 순간, 호영은 깨달았다.

충구의 자신감이 괜한 것이 아니었음을.

‘자주 듣던 노래인데, 이거 엄청나군. 가수의 노래를 직접 들으면 원래 이런가?’

컴퓨터나 휴대폰으로 음악을 들었을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가수의 목소리에서 특별한 무언가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우와······.”

호영만 특별한 무언가를 느낀 것이 아니었는지 옆에서 노래를 감상하던 충구가 당장이라도 침을 흘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평소의 유능하게만 보였던 모습은 어디로 가 버렸는지 바보 형 같았다.

그때 충구가 불현듯 말을 꺼냈다.

“저는 성덕인 것 같습니다.”

“성덕이 뭐지?”

“성공한 덕후를 줄인 말입니다.”

“······.”

“센추리에서 이런 노래를 들을 수 있다니! 그것도 저런 미녀의 노래를 말입니다. 이 정도면 성덕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충구의 대답에 호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성덕인지 뭔지는 그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들어 줄 가치가 있는 노래이긴 하네. 일주일에 한 번, 아니 사흘에 한 번씩은 꼭 듣고 싶을 정도야.’

다른 것은 몰라도 지은의 노래가 대단하다는 사실은 확실하게 느꼈다.

그리고 이 정도면 민심을 잡는 것도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정에 나서다

위나라는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중원의 국가 중 하나였다. 허베이 지역에서 나름 큰 세력을 형성하였던 국가였는데 그만 세력 전쟁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세력 전쟁에서 밀리게 된 위나라는 만주로 이주하였다. 만주, 정확히는 요동 지역의 다롄 성을 차지하고 ‘동위’를 건국하였다.

참고로 그 전까지 다롄 성을 지배했던 요동국의 경우는 대한국과의 전쟁에서 패전한 이후로 줄곧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왕의 권력은 약화되었고, 군사력은 줄어들었으며, 지방에 대한 장악력은 형편없는 수준으로 전락하였다.

요동국의 상황이 이러했으니 동위의 갑작스러운 침공을 막지 못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튼 다롄 성에서 나라를 새로 개국한 동위는 시간이 지나며 점차 요령성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기회가 생길 때마다 북진을 하여 세력을 넓혔고 요동국 출신의 백성들을 위무하여 지배력을 높였다.

그렇게 수십 년이 지나자 동위는 요령성을 삼분할하는 나라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중원의 일부였을 때보다는 못하지만 어찌 되었건 두 번째 전성기가 찾아온 것이다.

“저기에 왕이 있다! 잡아라!”

“아직 죽이지는 마라! 포획하는 것이 먼저다!”

한참 전성기를 구가하던 동위의 수도에서 갑작스럽게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의 수괴는 충격적이게도 왕의 신임을 받던 무장들이었다.

어떠한 예고도 없이 벌어진 반란에 동위의 왕은 허둥대다가 반란군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내 이놈들! 어찌 네놈들이 역모를 꾀한단 말이더냐!”

하지만 동위의 왕은 왕으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고 외쳤다.

그러자 한때 그의 충신이었던 무장이 이죽거리는 얼굴로 말했다.

“그럼 우리가 언제까지 NPC를 왕으로 섬길 줄 알았어?”

“NPC? 설마 네놈들이 이계인이란 말이더냐!”

동위의 왕, 고환은 상대의 말을 듣고서 기겁하였다.

NPC라는 단어가 이계인들이 원주민들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단어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모르고 있었나? 눈치가 느리네. 왕이라는 사람이 말이야.”

“크크, 그만큼 자격이 없다는 소리 아니겠어?”

예상대로 상대는 이계인들이 맞았다.

100년에 한 번씩 찾아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바로 그 이계인들 말이다.

“고를 어찌할 생각이냐?”

고환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애써 담대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연한 것을 묻네. 죽여야지.”

“······고, 고를 죽인다는 말이더냐?”

“살려 두면 후환거리가 되는데 어쩌겠어? 그리고 너희 고씨 왕족도 모조리 죽일 거야. 마찬가지로 후환거리가 될 수도 있거든. 물론, 참한 계집년들은 살려 줄 수도 있겠지만. 흐흐.”

“······!”

그 말에 고환은 절망 어린 표정을 지었다.

이토록 허무하게 종묘사직을 잃게 되다니. 죽어서도 분명 편하게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왕의 마지막이라고 해 봤자 별거 없네. 차라리 이 시간에 반반한 계집이나 따먹는 게 낫겠어.”

반란의 수괴는 마지막까지 이죽거리는 얼굴을 하고서 자신의 부하들에게 말했다.

“모조리 죽여.”

“존명!”

그렇게 반란군의 창칼이 고환과 그의 심복들을 향할 때였다.

챙챙!

갑자기 반란군이 들고 있던 무기가 튕겨 나가더니 검은 복면을 한 일단의 무리가 홀연히 나타났다.

“뭐야,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냐, 네놈들은!”

“정체를 밝혀라!”

한눈에 봐도 수상하기 그지없는 검은 복면의 사내들.

반란군은 이 예상치 못한 사태에 허둥대기 시작하였다.

“뭐 하는 거야! 어차피 적이니 죽여!”

하지만 혼란에 빠진 것도 잠시뿐, 반란의 수괴가 공격 명령을 내리자 일제히 검은 복면의 사내들에게 달려들었다.

“으악!”

“고, 고수다!”

검은 복면의 사내들은 고작해야 스무 명 정도.

반면에 반란군의 숫자는 수백 명이 넘었다.

숫자의 차이가 워낙에 큰 만큼, 전투는 일방적으로 흘러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검은 복면의 사내들은 그 충격적인 등장만큼이나 충격적인 무공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서걱, 서걱!

동위의 왕을 보호하면서도 착실하게 반란군의 숫자를 줄여 가는 검은 복면의 사내들.

그야말로 압도적인 전투력이 아닐 수 없었다.

“대, 대장! 기야, 기가 나왔다고! 우리가 상대할 수 있는 고수가 아니야!”

안 그래도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는데 검은 복면의 사내 중 한 명이 돌연, ‘검기’를 생성하였다.

중국에서 오직 초절정 이상, 즉 B+ 이상의 고수만 사용할 수 있다는 그 검기를 생성한 것이다.

초절정 이상의 고수에 대한 존경심과 막연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는 중국 유저들로선 검은 복면의 사내들을 상대하는 것이 두렵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물러나자! 대장, 여기서 죽을 순 없다고!”

“아직 숫자는 우리가 훨씬 더 많아! 그러니 잔말 말고 싸워! 무슨 일이 있어도 왕을 죽이란 말이야!”

수괴가 그렇게 외치며 유저들에게 싸울 것을 강요하였지만, 검은 복면의 사내들을 이겨 낼 수는 없었다.

검기를 사용하는 초절정 고수 외에 나머지 스무 명의 복면 사내들도 엄청난 무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 나는 도망치겠어!”

“나도!”

중국 유저들은 NPC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잠시 뭉친 것일 뿐, 끈끈한 의리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렇다 보니 한 명이 도망치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포위 진형이 붕괴되었다. 너도나도 도망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자라 같은 것들이! 이 일이 끝나기만 하면 네놈들은 다······ 커억.”

서걱!

검기를 일으키는 사내에 의해 반란의 수괴가 죽임을 당하자 반란군은 그대로 괴멸되었다.

“너, 너희들은 누구냐?”

반란군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고환이 복면의 사내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복면의 사내들 중에 한 명이 왠지 모르게 어눌해 보이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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