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
바다를 건너야 하는 것도 문제지만 조선 정벌을 준비하는 동안 주변의 세력들이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중국이고 일본이고 아국을 침략할 의지는 있지만 능력이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네.”
“예, 그렇습니다.”
호영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내년이 되면 상황이 어찌 변할지 알 수 없게 되겠지만, 어쨌든 올해까지는 외국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았다.
즉, 대한국은 1년이라는 시간을 번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올해가 가기 전에 힘을 최대한 비축해 놓아야겠어. 군사력과 군량미를 대폭 늘리는 식으로 말이야.”
남들이 내전을 치르며 병력과 식량을 소모할 때, 대한국만큼은 국력을 비축하는 것을 넘어 오히려 키워 낼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단숨에 영토를 크게 넓힐 수 있게끔 말이다.
“다만 그 전에 민심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민심이라······.”
근래 들어 ‘민심’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 호영이었다.
그만큼 대한국의 민심은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어떻게든 민심을 수습하기는 해야 할 텐데.’
하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아까 전에 말했던 것처럼 왕이 바뀌어야지만 민심도 바뀌지 않을까?
물론 그렇다 해서 왕의 자리를 넘겨줄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방법이 있을까? 민심을 수습할 방법이?”
“구휼미를 베푸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국을 순행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3S 정책을 사용해 보시지요?”
호영이 묻자 여러 대답이 나왔는데 호영은 그중에서 충구의 의견을 물어보았다.
“3S 정책이라면 군부독재 시절의 우민정책을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현대사를 생각하면 마음에 들 리가 없는 정책이지만 지금의 상황을 생각하면 3S 정책이 최선일 것 같습니다. 물론 말만 3S 정책이고 실제로는 문화 예술 운동이라고 하는 게 맞겠지만 말입니다.”
“문화나 예술 같은 게 민심을 수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나?”
“무조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소신을 한번 믿어 보십시오.”
그 확언에 호영은 기대감 어린 표정을 지으며 충구의 말을 경청하였다.
“현재 아국은 3회 차보다 사회 전반적으로 발전해 있지만, 문화나 예술 같은 경우는 조금도 발전이 없습니다. 누가 마초들의 나라 아니랄까 봐, 군사 부문에만 집중되어 있죠.”
“그래서?”
“백성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문화를 키워야 합니다. 문화와 예술이 있어야지만 백성들의 얼굴에 활기가 돌 것입니다.”
“······흠.”
호영은 다소 이해가 안 가는 표정을 지었다.
과연 문화를 키우는 것만으로 민심을 얻는 게 가능할까? 충구가 계속해서 문화의 장점에 대해 설파하였지만 호영으로선 여전히 의아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진지한 얼굴로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 충구에게 초를 치고 싶지는 않았기에 속내를 감춘 채 물었다.
“그렇다면 문화를 발전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저희에게는 엔터테인먼트가 있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상관일까?
호영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 충구가 마치 광신도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한국의 백성들에게 걸 그룹을 보여 주는 겁니다!”
“······.”
“생각해 보십시오. 걸 그룹의 화려한 댄스와 노래를 보고도 전하를 욕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아니, 없을 겁니다. 걸 그룹을 보고도 어찌 전하를 욕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찬양하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순간 호영은 말문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어처구니가 없었기 때문이다.
‘엔터의 이사가 되더니 맛이 갔나?’
대한국의 대군사라는 자가 이런 발상을 했다는 게 정말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더 어이없는 것은 따로 있었다.
“좋은 방법인데요? 걸 그룹뿐만이 아니라 보이 그룹도 데려오면 좋을 것 같아요.”
“연기자들을 데려와 연극을 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뭔가 독재 시대에나 쓸 법한 우민정책이지만······ 어떻게 보면 이 나라도 독재국가나 다름없으니 효용은 클 것이라 생각됩니다.”
간부들이 저마다 그런 소리를 하며 충구의 의견에 찬성한 것이다.
‘효과가 있다면 전생의 군주들이 진즉에 사용했지 않았을까?’
호영은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어차피 손해 볼 것은 없었기에 충구의 의견을 들어주었다.
* * *
김지은은 데뷔 마지노선이라 불리는 6년 차를 넘긴 7년 차 연습생이었다.
7년 차의 중고 연습생인 그녀가 로열 엔터테인먼트에 들어온 것은 1년 전이었다.
꿈을 포기하려던 그녀는 업계 표준보다 월등하게 좋은 조건으로 연습생을 모집하는 로열 엔터테인먼트를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연습생 계약을 맺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이 로열 엔터테인먼트는 무척이나 특이한 회사였다.
일단 연습생의 숫자부터가 그랬다.
그리 크다고 볼 수 없는 회사에 연습생의 숫자만 마흔이 넘었다. 이 정도면 업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것이다.
연습생 시설도 특이하다면 특이했다. 그녀가 이전까지 연습생 생활을 했던 회사의 숙소는 서너 명이서 생활하는 조그만 원룸이었는데, 로열 엔터테인먼트의 숙소는 원룸이긴 해도 제법 넓었고 한 명 또는 두 명이서 사용했다.
회사에서 나오는 급식도 이전 회사에 비교하면 상당한 수준이었고, 트레이너들도 역시 수준이 높은 편이었다.
솔직히 연습생인 그녀의 입장에서도 로열 엔터테인먼트는 연습생들에게 지나칠 정도로 퍼 주는 회사로 보였다.
“너, 나랑 같이 게임 하나 해 볼래?”
하지만 가장 특이한 것은 회사의 이사진이었다.
대학을 갓 졸업한 것처럼 보이는 20대 중후반의 이사부터 조폭 영화에 등장할 것같이 생긴 40대 초반의 이사까지.
하나같이 그녀가 상상하던 이사들과는 너무도 달랐다.
특히나 이상하게 여겨지는 이사는 그중에서 20대 후반의 이사였다. 지금 당장만 해도 뜬금없이 게임을 같이해 보지 않겠냐고 묻지 않은가?
“게임요?”
“응. 센추리라고 알아?”
“저는 잘 모르겠어요. 원래 게임 같은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중고 연습생인 그녀에게 게임을 할 시간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춤과 노래를 연습하는 것에만 집중해도 빠듯한 것이 시간이라는 놈이었다.
“모른다고?”
“그냥 얼핏 들어 보기만······.”
“허, 진짜?”
강 이사는 센추리를 잘 모른다는 그녀의 말이 충격적이었는지 놀란 눈을 하였다.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지은도 센추리의 인기에 대해 들어 본 적은 있었지만 여전히 게임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렇다 보니 게임을 모른다는 것에 놀라는 강 이사가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사장님께 말씀드려야겠다, 연습생들에게 기기 하나씩 나눠 달라고. 진즉에 그곳에서 연습을 시켰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늦게 알았네.”
“네? 연습을 왜 거기서?”
“정말 아무것도 모르나 보구나. 센추리와 현실의 시간 비율은 1:4야. 한마디로 시간을 4배 쓸 수 있다는 거지. 연습생들이 센추리에서 춤이나 노래를 연습하는 게 시간적으로 훨씬 이득이야.”
“······!”
그 말에 지은이 눈을 크게 떴다.
시간 비율이 1:4라니?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걸까?
아니, 그런 것보다 거기서 춤을 연습하거나 노래를 연습하는 게 정말 가능할까?
“아무튼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너 나랑 같이 센추리 해 볼래?”
“왜 저랑 게임을 하자는 건가요? 저는 그 게임이 정확히 뭐 하는 건지도 모르는데요.”
“너의 도움이 필요해서 말이야. 내가 보기에 너는 연습생 중에 최고의 실력을 가지고 있거든.”
“······제가요?”
“나만의 생각은 아니야. 애초에 얼굴만 개성 있게 예뻤다면 언제라도 데뷔했을 것이라고 트레이너들이 이야기하던데? 물론 나는 충분히 예쁘다고 생각하지만 말이야.”
지은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강 이사가 한 말은 그녀도 자주 들어 보았던 말이었다.
예쁘지만 개성이 없다는 그 말말이다.
몰개성적인 외모 때문에 지금까지 몇 번의 기회를 놓쳐 왔는지 모른다.
그녀는 입술을 깨문 채 강 이사에게 말했다.
“정확히 무엇을 하라는 거죠?”
“별거 없어. 그냥 네가 평소에 하던 것을 하면 돼. 다만, 이번에는 연습이 아닌 실전이라는 점이 다르지.”
“실전요? 그렇다면 제가 무대에 선다는 말인가요?”
“무대? 맞아. 무대라고 할 수 있지. 수천수만 명이 지켜보는 무대. 현실이 아닌 가상 세계에서 진행되는 무대지만 말이야.”
“······.”
“어때, 나랑 같이해 볼래? 너는 그냥 몸만 오면 되는데.”
지은은 잠시 고민하였다.
만약 현실에서 무대에 오른다면야 고민할 필요가 없겠지만 강 이사가 말하는 것은 센추리라는 이름의 가상 세계였다.
그리고 가상 세계에서의 무대는 그녀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게임에서라도 무대에 설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지 않을까?’
그녀가 오랫동안 꿈꿔 왔던 것이 바로 무대에 서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녀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수백, 수천 명의 관중 앞에서 무대를 설 수 있는 기회가.
지은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기회를 기다려야 할 나이는 이미 훌쩍 지나간 상황.
어떤 기회든 일단 기회가 찾아왔다면 무조건 잡아야 했다.
“해 볼게요. 아니, 꼭 하고 싶습니다!”
지은의 대답에 강 이사는 싱긋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강 이사는 낮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만 각오해야 될 것이 한 가지 있어.”
강 이사가 진지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니 지은은 침을 꿀꺽 삼켰다. 머릿속에서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중에 ‘스폰’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뭐, 뭔가요?”
“한 번 죽어야 한다는 것.”
“······네?”
하지만 강 이사에게서 나온 대답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다. 한 번 죽어야 한다니?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일까?
지은이 영문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짓자 강 이사는 그저 웃기만 하였다.
1시간 뒤.
그녀는 죽음을 체험하였다.
* * *
안개 속에서 맞이한 죽음은 더할 나위 없이 최악이었지만 지은은 의외로 센추리에 잘 적응하였다.
며칠이 채 지나지 않아 아바타에 완전히 적응하여 춤과 노래를 본인의 몸으로 부르던 것처럼 부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아닌 NPC를 상대로 하는 무대였다니.’
물론 중간에 강 이사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실망하기도 하였지만 중간에 포기하는 일은 없었다.
어쨌든 무대는 무대였다. 비록 데이터상으로만 존재하는 NPC에 불과하다고 해도 그녀의 관객이자 팬이 될 존재들이었다.
지은은 더욱 몰입하여 연습을 거듭하였다.
그렇게 센추리 안에서 연습을 거듭하던 어느 날, 마침내 공연 날짜가 정해졌다.
“내일이야. 잘할 수 있지?”
“······예, 잘할게요.”
“자신감을 가져. 너의 그 얼굴로 노래 실력까지 보여 준다면 누구도 너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을 거야.”
마치 매니저라도 되는 것처럼 자신을 격려해 주는 강 이사를 보며 지은은 피식 웃었다.
보면 볼수록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이 가상현실 세계 안에서는 하늘의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아주 막강한 권력을 가졌다는데, 고작해야 노래밖에 부를 줄 모르는 자신을 위해 이렇게 신경을 써 주다니.
고맙고 또 고맙게 느껴졌다.
“이사님.”
“응?”
“고마워요. 이 은혜, 잊지 않을게요.”
그녀의 갑작스러운 말에 강 이사는 혼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이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