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188화 (188/345)

# 188

“······.”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사과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계시지요?”

허영만이 불쑥 그리 말하자 신유한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저희 회장님께서는 용서를 구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드릴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지주회사의 지분을 달라고 해도 말입니까?”

“······아시겠지만 저희 회장님 역시 지주회사의 지분이 그리 높지 않습니다. 1, 2퍼센트조차 잃으면 안 될 정도로 말입니다. 그래도 만약 저희 지주회사의 지분을 원하신다면 1퍼센트 이하 정도는······.”

“아닙니다. 그렇게까지 얻을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그는 대기업들의 지분 구조가 적대적 M&A에 얼마나 취약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순환 출자 구조 형태로 되어 있기에 회장의 지분이 10퍼센트는커녕 5퍼센트도 안 되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지주회사의 주식을 달라는 것은 그야말로 벼랑 끝으로 내모는 것과 다름없었다.

“대신, 다른 그룹들보다는 임대료를 높게 받을 것입니다.”

“그 정도는 감내할 수 있습니다.”

“계약 기간도 짧을 것이고요.”

갑의 입장에서 계약 기간은 짧을수록 좋았다. 계약 연장을 가지고 협박한다면 을은 더욱 절박해질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혹시 또 다른 조건이 있겠습니까?”

“음, 대한 길드의 사업에도 협조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사업이라면?”

신유한이 살짝 경계 어린 표정을 짓자 허영만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법 관련 사업을 말하는 겁니다.”

“아.”

대한 길드라고 입대업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무공과 마법에 있어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만큼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이미 유럽이나 미국에서만 존재하던 아티팩트를 소수의 마법사들이 생산해 내고 있었고, 영산에서 채취되는 약초들로 온갖 마법 약품을 만들고 있었다.

앞으로 마법이 발전할수록, 또 무공이 발전할수록 대한 길드의 사업은 커지게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대한 길드의 사업에도 협조하겠습니다.”

“사장님, 혹시 추가할 조건이 있으십니까?”

“아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

호영은 그렇게 말하며 신유한에게 악수를 건넸다. 화해의 손길이었다.

그러자 신유한이 밝게 웃으며 호영의 손을 맞잡았다.

‘겉으로 봤을 때는 일단 승복한 것 같기는 한데······.’

무릎까지 꿇었으니 패배를 인정한 것처럼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호영은 의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회귀 전에 신유한이 센추리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필요 이상으로 경계할 필요도 없다. 이자가 나중을 기약한다 해도 나중의 나는 더욱 강해져 있을 것이니까.’

호영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신유한에게 말했다.

“식사 같이하시겠습니까? 입맛에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식당을 알고 있습니다.”

“예! 좋습니다.”

“그럼, 바로 가시죠.”

그렇게 로테 그룹의 후계자, 신유한을 마지막으로 로열사와 대립하였던 재벌가는 모두 호영과 종전 협정을 맺었다.

이제 더 이상 그를 괴롭힐 만한 세력이 없다는 것이다.

‘당분간은 현실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군.’

마침내 그는 센추리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일상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 * *

“이로써 외침에 대한 우려는 사라졌다고 봐도 좋겠군요. 물론 언제까지 조약이 지켜질지는 의문이겠지만 말입니다.”

충구는 조약문을 내려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일본, 정확히는 대마도주와의 조약이 종이에 적혀 있었다.

대마도주는 4년간 침략을 금한다.

대마도주는 오직 부산진에서만 교역할 수 있다.

대마도주는 다른 일본 세력의 침공을 감시해야 한다.

대마도주는 병력을 1만 이상 징집할 시 왕의 허락을 맡아야 한다······.

일방적으로까지는 아니지만 대한국에게 꽤나 유리한 조약이었다.

이 조약이 지켜지기만 한다면 적어도 일본 세력의 갑작스러운 침공을 받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당면한 문제는 모두 해결되었다고 봐도 좋을까?”

“예, 딱히 문제랄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우려했던 북방군의 혼란도 거의 다 수습된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대마도와의 조약도 성공적으로 끝났으니 대외적인 문제도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삼도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나던 폭동도 모두 진압했고 말입니다. 다만 사소한 문제가 있다면······ 민심입니다.

“민심이라······.”

호영은 쓴웃음을 지으며 길가에서 부복하고 있는 자신의 백성들을 바라보았다.

반쯤 헐벗은 백성들이 겁에 질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왕을 보는 게 아닌, 마치 적의 군대나 약탈자를 보는 시선이었다.

‘씁쓸하군.’

1회 차 때도, 2회 차 때도, 3회 차 때도.

그는 언제나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

설령 기득권과는 적대적인 관계를 가졌을지 몰라도 민심은 항상 그를 따랐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연왕’으로서의 그는 백성들의 적이었다.

고작 100년 사이에 왕이라는 존재는 존경의 대상이 아닌 공포의 대상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번 회 차도 꽤나 바쁘겠어.”

“더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다면 조금 바쁜 것 정도야 괜찮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호영은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백성들의 모습을 보면 암울하기 그지없어 보였지만 충구를 비롯하여 로열패밀리가 있었기에 두려움은 없었다.

‘이번 회 차에도 다시 백성들에게 지지를 받는 왕이 되어 보리라.’

호영은 속으로 그 같은 다짐을 하였다.

* * *

후궁, 장희연은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하께서 현리에 도착하셨다. 이제 조금 있으면 궁으로 들어오시겠지.”

“······.”

“중벌을 피하고 싶다면 어서 내게 용서를 구하여라. 네가 지금까지 저지른 무례에 대해 사죄하란 말이다!”

“저는 어떤 잘못도 한 것이 없습니다.”

“뭐라?”

그녀는 표독한 눈으로 감히 자신에게 ‘무례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사내를 노려보았다.

왕의 총애를 받고 있는 그녀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후궁이고 천한 출신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 나라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왕의 마음이었다.

그녀, 장희연은 왕에게서 가장 큰 총애를 받는 여인이었다.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는 왕이 그녀를 가장 어여삐 여긴다는 것이다.

당연히 그녀의 권력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조정의 장관들조차 그녀에게 저자세를 취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게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그녀가 지금, 사내 한 명을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도 얼마 전까지는 일개 야인이었던 사내를 말이다.

“네놈이 정녕 죽고 싶은 게냐?”

“······.”

“이익! 감히 내 말을 무시해? 그래, 좋다. 조금만 기다려라, 전하께서 오시거든 내 너의 잘못을 똑똑히 알려 줄 테니!”

피식.

그녀의 말에 사내는 조소를 지었다. 마치 그녀의 말을 비웃는 것처럼 말이다.

“저, 정녕 네놈이!”

머리끝까지 터져 오르는 분통에 그녀는 숨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였다.

궁에 들어온 이후 이 같은 모욕을 받은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 보면 아예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녀를 모욕했던 사람 중에 살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정의 실력자든 내관이든, 아니면 같은 후궁이든 간에, 그녀를 무시하고 모욕했던 자들은 모두 싸늘한 주검이 되었다는 것이다.

“절대 가만두지 않으리라. 너는 극형에 처할 것이고 너의 삼족은 멸해질 것이다!”

“어떻게 한다고?”

그때였다.

갑자기 그녀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나라의 국왕, 대연이었다.

“전하!”

장희연이 돌연 화사해진 얼굴로 ‘전하’를 외치더니 왕에게 와락 안겨 들었다.

“전하, 보고 싶었사옵니다!”

그러자 왕이 인상을 찡그리며 그녀를 밀쳤다.

“죄인이 낯짝도 두껍구나.”

“예? 전하, 그게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네가 왜 여기에 감금되어 있는지 아직도 모르는 것이냐?”

“저, 전하?”

“희대의 악녀인 줄 알았더니 그냥 멍청한 여자구나.”

차갑기 그지없는 왕의 목소리에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평소 같았으면 꼭 껴안아 주고 사랑을 표현해 주었을 왕이, 싸늘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언제나 그녀를 아껴 주고 사랑해 주었던 왕의 모습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갑자기,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불안한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눈물을 꾹 참고서 왕에게 외쳤다.

“전하, 소첩이 무슨 벌이든 받겠나이다! 그러니 부디 용서를······!”

“쯧.”

왕이 혀를 차는 모습에 그녀는 결국 눈물을 흘렸다.

‘아아, 나는 전하의 총애를 완전히 잃어버렸구나!’

비록 왕의 권력을 이용했지만 왕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그녀는 비참한 모습으로 무릎을 꿇었다.

그녀가 경멸하던, 왕의 총애를 잃은 후궁의 모습이었다.

#민심 안정책

반란 진압은 고작 한 달 만에 끝났는데 정작 수도로 복귀한 것은 두 달이 지난 이후였다.

“하삼도의 민심이 그래도 조금은 안정되어 다행이군.”

그가 뒤늦게 수도로 복귀한 이유는 반란이 크게 일어났던 세 지역을 안정시키기 위함이었다.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이 세 지역은 반란이 일어나기 전에도 민심이 최악으로 치닫던 곳이었다. 땅이 비옥하니 오히려 호족과 관리들의 착취가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호영으로선 수도의 상황이 아무리 급하다고 하나 인구와 식량 생산량이 가장 높은 세 지역을 가만히 방치할 수가 없었다.

그는 결국 선택을 내렸다. 빠르고 신속하게 하삼도를 정리한 이후에 귀환하기로 말이다.

친위 기사단만 대동한 채 하삼도를 순행한 호영은 가장 먼저 세 지역의 부정부패를 일소하기 위해 움직였다.

폭군의 치하에서 지방관이 된 이들 대부분은 뇌물을 이용해 관직에 오른 이들이었다. 그리고 뇌물로 관직에 오른 이들은 대개 백성들을 착취하고 수탈했다.

어떻게든 본전을 뽑겠다는 의도였다.

호영은 그런 무능력하고 돈만 밝히는 관리들을 용납할 생각이 없었다. 비리가 발견된 관리라면 그 즉시 처형했고, 만약 증좌를 찾아내지 못했다면 원재의 정보 세력을 이용하여 끈질기게 추적하였다.

물론 반란에 협조했거나 직접 가담하였던 이의 가족을 벌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호영은 경상도에서만 수백 명의 관리와 수천 명의 역모 가담자를 처벌하였다.

참고로 행정 공백의 경우 유저들을 기용함으로써 해결하였다.

부정부패 척결 및 역모 가담자 처벌이 끝나자 호영은 관리들의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었다.

민심을 얻으려는 의도였다.

대충 2주 정도를 경상도에 머물던 호영은 곧바로 전라도로 이동했고 그곳에서도 같은 일을 반복하였다.

충청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삼도의 탐관오리들을 모조리 처형시키고 호족들의 식량을 백성들에게 베푸니 하삼도의 민심은 급속도로 안정되었다.

아직까지는 왕을 열성적으로 지지하는 자들은 없었지만 그조차도 시간문제일 것 같았다.

아무튼 경기도에 와서도 비슷한 과정을 거치니 시간은 두 달이 훌쩍 지나 있었다. 그가 수도를 떠난 지 벌써 두 달 반이 지난 것이다.

“문제는 수도의 민심이 심상치 않다는 거겠죠?”

충구의 말에 호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려 두 달 반 만에 돌아온 수도의 모습은 썩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