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
‘대통령이 아무리 센추리에 무관심해도 과연 귀화까지 내버려 둘지 한번 보자고.’
-한경오 편집장 차한열
호영은 액정에 떠오르는 이름을 보고서 그대로 전화를 걸었다. 결정이 섰으면 고민을 길게 할 필요가 없는 법이었다.
* * *
로테 회장 신동욱은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오는 아들을 보고 고함을 질렀다.
“너, 뭐 하는 놈이야!”
“······아버님. 갑자기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십니까?”
“이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신동욱은 인상을 찡그리는 자신의 아들, 신유한을 향해 신문 다발을 던졌다.
신문에는 이런 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센추리의 경제 규모는 머지않아 천조에 육박할 것으로······
대한 길드, 귀화 선언? ‘기득권의 압력 때문에’
로열사를 압박하였던 기득권 세력은 누구인가!
대한 길드가 귀화하면 최소 수십조 이상의 손해를 입게 될 것!
반격. 그것은 대한 길드의 반격이었다.
여태까지 일방적으로 두드려 맞던 대한 길드가 반격에 나선 것이다.
“이게 뭐 어쨌다는 겁니까?”
여전히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신유한의 태도에 신동욱은 불같이 화를 냈다.
“어떻게든 우리 편으로 만들라고 했더니만, 관계를 이따위로 만들어? 네놈이 우리 그룹을 망가뜨리려고 작정한 것이야?”
그는 작년부터 센추리의 가치를 눈여겨보기 시작하였다.
1:4의 시간 비율, 완벽한 가상현실, 환상적인 판타지 세계관.
현대인이 꿈에도 그리던 가상 세계가 바로 센추리에 있었다. 5년, 아니 3년만 지나도 세계는 센추리 없이 돌아가지 않게 되리라.
실제로 센추리를 뒤늦게 받아들였던 한국에서조차도 센추리의 인기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기기값이 웬만한 자동차보다 훨씬 비쌌음에도 사람들은 주저하지 않았다.
비록 가상이라고는 하나 센추리 안에서는 현실에서 하지 못했던 많은 것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법까지 거론할 필요도 없었다.
비싸서 먹지 못했던 것들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고, 세계 정반대에 있는 외국인들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심지어 마약이나 술, 담배 등을 아무런 걱정 없이 마시고 피울 수 있었다. 시간 비율도 4배나 되었기에 공부를 하거나 여가 생활을 즐기기에도 나쁘지 않았다.
사람들로선 센추리에 빠져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국 지명을 가진 도시 대부분이 대한 길드의 것이다. 앞으로 센추리에 진출하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대한 길드와 긴밀한 관계를 가져야 한다.’
센추리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보며 신동욱은 그런 생각을 하였다.
대한 길드와 친해지자고, 앞으로 센추리에서 어떤 사업을 하건 대한 길드의 협조는 무조건 필요하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의 외아들이 일을 망가뜨리고 말았다. 하필 대한 길드와 적대 관계를 형성해 버린 것이다.
“내가 분명 유영이와 혼인시켜서라도 그자를 아군으로 만들라고 하지 않았더냐!”
“그놈이 단호하게 거부하였습니다! 제깟 놈이 감히 유영이를 거부했다는 말입니다!”
신동욱의 계속되는 호통에 신유한도 지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자신은 떳떳하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자 신동욱이 더욱 분노하는 표정을 지었다.
“혼인을 거절했다고 공격을 해? 이 멍청한 것이! 아직도 네 잘못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냐?”
“저는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그자가 제 제안을 거부한 것을 저보고 어쩌라는 말씀이십니까? 아니면 제가 그자에게 허리라도 숙여야 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필요하다면 당연히 그래야지!”
“그자는 천출입니다! 흙수저란 말입니다!”
“지금 그게 무슨 상관이야!”
“아버님께서 제게 말씀하셨잖습니까? 신분제가 무너졌다고 해서 출신의 구분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그 말에 신동욱은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기는 했다. 그 역시 재벌로서 선민사상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신분의 구별도 적당히, 유연하게 해야 하는 법이었다.
대통령이 흙수저 출신이라고 무시할 수는 없지 않은가?
대한 길드를 세운 이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어떤 출신이든 간에 대한 길드를 가진 것만으로도 재벌들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거물이 된 것이다.
함부로 대하기는커녕 어쩌면 대통령보다 두려워해야 할 존재일 수도 있었다. 대통령은 임기가 끝나면 권력도 끝이지만 그자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젊은 놈이 나보다 시대의 흐름을 몰라? 센추리는 이미 대세야! 흐름을 놓치면 우리 그룹은 도태되고 말 거라고! 대한 길드와 충돌이 생겼다는 이유로 주가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도 모르겠어?”
“어차피 부동산이야 일본의 것을 사용하면 되지 않습니까?”
“정말 몰라서 하는 소리야? 다른 그룹들은 바보여서 그자들과 화해를 했어? 우리 그룹에서 한국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이 몇 가진데, 한국을 포기하겠다고 지껄여!”
어느 그룹이든 마찬가지겠지만 한국 시장을 포기하면 재벌 그룹으로서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센추리에서의 한국 시장은 대한 길드가 독점하고 있었다.
즉, 대한 길드의 허락이 없으면 한국 유저들을 대상으로 장사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4회 차가 되면서 한국 유저의 수는 수백만으로 증가하였기에 로테 그룹으로선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일본? 게네들이 지금 도시를 몇 개나 갖고 있는데? 일본 유저들이 가지고 있는 영토를 다 합쳐 봐야 대한 길드의 30퍼센트도 안 돼! 그것도 수십, 수백 명이 나누어서 가지고 있다고!”
“······음.”
“이제야 알겠냐,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차라리 송호영이라는 자를 죽이는 게 어떻겠습니까?”
“뭐?”
“저희에게 악감정을 품은 것은 송호영이라는 자뿐이지 않습니까? 그자를 죽이기만 한다면 대한 길드를 빼앗는 것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이, 멍청한 것이!”
퍽!
신유한의 황당한 말을 듣자 신동욱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날렸다.
“뭐? 그자를 죽이겠다고? 죽여서 뭐가 달라지는데? 멍청한 놈! 이미 대한 길드는 그들만의 왕국이야! 왕이 죽으면 그들끼리 다음 왕을 세울 거라고! 애초에 죽이는 게 가능할 것 같아? 100만 명이 그자를 지켜보고 있다! 심지어 경호 업체까지 소유하고 있어! 깡패 따위가 처리할 수 있는 인사가 아니야!”
“하지만······.”
“시끄러워! 헛소리 하지 말고 지금 당장 그자에게 가서 사과해! 무릎을 꿇어서라도 사과를 받아 내! 어떻게든 우리 그룹에게도 임대를 허락해 달라고 부탁하란 말이야! 알았어?”
잠시 머뭇거리던 신유한은 신동욱이 재차 소리를 지르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하였다.
“······알겠습니다. 아버님의 말대로 하겠습니다.”
“쯧! 알겠으면 지금 당장 꺼져!”
신유한이 입술을 깨물고 물러나자 신동욱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통령의 재벌 개혁에 대항하느라 따로 신경을 못 쓰는 사이 터무니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만약 대한 길드와의 관계가 진전되지 않으면 로테 그룹의 주가는 계속 급락할 터.
이미 로테 그룹의 주가가 많이 떨어진 상태였기에 더 이상의 급락은 용납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그자의 환심을 사야 해. 유영이로 안 될 것 같으면 그 아이를 보내서라도······.’
* * *
귀화 협박은 꽤나 효과적이었다.
“천화 그룹, 대현 그룹, SJ 그룹, 북양 그룹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지금까지의 무례를 사과하고 앞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싶다며 말입니다.”
“정부보다 반응이 빠르군.”
“신호 그룹에서도 연락이 왔습니다. 이전보다 더욱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싶다 하였습니다.”
호영은 피식 웃었다.
차한열의 한경오 신문사를 통해 귀화 협박을 한 지가 고작 이틀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반응이 왔다.
솔직히 무시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센추리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라고는 해도 이른바 ‘높으신 분’ 입장에서는 여전히 게임에 불과할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글로벌 기업들이 흔히 하는 ‘사업 철수’ 카드처럼 보다 공격적인 전략을 사용할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고작 이틀 만에 이 정도의 반응이라면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여론은?”
“현재 우리를 향한 동정 여론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댓글 알바단도 행동을 멈추었는지 범죄자 집단이라느니 독재자 길드라느니, 이러한 비난들은 사라졌고 이제는 귀화에 대한 찬반 여론만 들끓고 있습니다.”
호영 같은 경우는 센추리에 집중하느라 여론의 변화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여론의 반응도 재벌들의 변화 이상으로 만족스러웠다.
이제는 대한 길드를 지지하는 여론이 대세를 이루어졌는데, 어찌나 지지자가 많은지 귀화에 관해서조차 찬반이 나뉘었을 정도였다.
“여론이 그렇다면 정치인들도 조용해질 수밖에 없겠군.”
“그렇습니다. 불과 이틀 전까지만 해도 야당에서 저희를 공격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려는 모습이 감지되었지만 어제부터는 갑자기 잠잠해졌습니다. 당분간은 저희에 대해서 지켜볼 생각인 것 같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대통령과 로테 그룹뿐이겠네.”
“예, 그들만 남았습니다.”
대통령 그리고 로테 그룹.
둘과 우호 관계를 맺기만 한다면 더 이상 호영을 현실에서 귀찮게 할 세력은 없어질 것이다.
띵.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누구지?”
-로테 제과의 신유한 상무님이십니다.
순간 허영만과 호영의 눈이 마주쳤다.
뜻밖의 손님이 아닐 수 없었다.
“들어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허영만이 말했다.
“둘 중 하나겠습니다.”
“싸우자는 것과 화해하자는 것?”
“예,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화해를 청하기 위해 찾아온 것 같습니다.”
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로테 그룹보다 재계 서열이 높은 곳에서도 이미 호영과 협력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다른 재벌들도 호영에게 ‘항복’하였으니 로테 그룹이라고 언제까지 호영과 척질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만약 그렇다면 어떤 것을 받아 내야 할까?”
“시간이 많다면야 로테 그룹의 주식까지 받아 낼 수 있겠지만······ 사장님에게 지금 급한 것은 센추리이지 않습니까?”
“뭐, 그렇지.”
“그렇다면 어느 정도 아량을 베풀 필요가 있습니다. 극단적인 대립은 피해야 할 상황이니 말입니다.”
그 말에 호영은 생각이 많아진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자존심이냐, 타협이냐.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 두 가지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하지만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타협이었다.
“팀장의 말대로 지금 당장은 센추리에 집중하는 게 좋겠어. 물론 어느 정도 받아 낼 것은 받아 내야 하겠지만 말이야.”
“알겠습니다. 사장님의 뜻대로 아량을 베풀되 받을 것은 받아 내도록 협상하겠습니다.”
그때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신유한이 그의 집무실까지 올라온 것이리라.
“들어오십시오.”
예상했던 대로 문이 열리며 신유한이 들어왔다.
호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가리켰다. 그러자 신유한이 성큼성큼 호영에게 다가오더니 허리를 숙였다.
“송 사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 예.”
이전과는 사뭇 다른, 무척이나 예의 바른 태도였다.
“일단 사과드리겠습니다.”
“사과요? 어떤 사과를 말하는 겁니까?”
호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쿵!
돌연 신유한이 무릎을 꿇었다. 재벌 3세로서 자존심 하나는 누구보다 강했던 그가 무릎을 꿇은 것이다.
호영은 물론이요, 허영만까지 놀란 눈을 하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무례했고 멍청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