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
그래 봤자 평균에 못 미치는 것은 여전하겠지만 말이다.
“끼리끼리 만난다더니.”
“형님?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시끄럽고, 거기. 내 마지막 제안을 거절했으니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알고 있겠지?”
이제는 송 사장도 아닌 ‘거기’라 부르는 신유한.
그야말로 안하무인, 그 자체였다.
호영은 그런 신유한을 향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모르겠는데?”
“하! 어이가 없군. 감히 나를 상대로 건방지게 행동하다니. 두고 봐라. 머지않아 후회하게 될 것이다.”
신유한은 코웃음을 치며 자리에서 물러났는데 사나운 발걸음만 봐도 그가 얼마나 분노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엄청 화난 것 같은데? 괜찮겠냐?”
최진수의 물음에 호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설마 최진수의 걱정을 받게 될 날이 올 줄이야. 역시 세상은 살고 볼 일이었다.
“어차피 적이었어. 사이가 나빠진다고 달라질 것도 없지.”
“그래도 이제부터는 그룹 전체가 나서게 될 텐데? 후계자의 자존심이 짓밟혔으니 회장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야.”
호영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재벌 회장은 아무리 그라도 꺼려질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재벌 회장들은 센추리로 따지면 국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진 권력자들이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의미는 없다. 애초에 신유한이 나를 찾아온 목적도 중신을 서기 위함보다는 전쟁을 선포하기 위함이 더 큰 것 같으니까.’
그 같은 생각을 하며, 호영은 마음 한편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을 억눌렀다.
* * *
신유한이 물러난 이후 호영은 한참 동안이나 최진수에게 끌려 다녀야 했다.
최진수가 사람들을 소개시켜 준다며 여기저기로 끌고 간 것이다.
호영은 족히 스무 명 이상의 각계 저명인사들과 통성명을 나누고 나서야 최진수에게서 해방될 수 있었다.
“민 이사랑 허 팀장은 어디에 있어?”
기진맥진 상태가 된 호영이 의자에 앉으며 원목에게 물었다.
“저기, 두 사람 모두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완전히 인기인들이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두 사람을 보고 호영은 실소를 터뜨렸다.
허영만이야 한국 최고의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고 인물도 훤칠하니 인기가 많은 것도 이상할 게 없었지만 건우는 예상외였다.
집안의 재력이 어느 정도 된다지만 다른 참석자들과 비교하면 평범한 수준이고, 인물도 그렇게 빼어나지 않았다.
‘아직도 민건우를 대한 길드의 주인으로 아는 사람들이 있는 건가?’
호영으로선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의외로 건우가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
“저기를 보십시오. 건우의 곁에 여자들밖에 없지 않습니까? 센추리에서만 인기 많은 줄 알았더니 현실에서도 건우의 매력이 통하는 것 같습니다.”
“이제 보니 카사노바였네.”
건우가 여자들에게 인기 많은 남자였을 줄이야.
무척이나 의외였다.
“오랜만이네?”
불현듯 호영의 귓가로 익숙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확인하니 그가 아는 얼굴이 맞았다.
“네가 여기는 어떻게?”
당혹한 표정으로 물으니 그녀가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어떻게는. 내가 아는 두 사람이 힘을 합친다는데 안 올 수가 있겠어?”
“…….”
“그동안 잘 지냈어? 겉으로 보기엔 정말 좋아진 것 같은데.”
마지막이 어땠는지 잊은 것은 아닐 텐데도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대하듯 호영을 대하였다.
그녀의 이름은 바로 이소희.
한때 호영이 사랑했던 여인이었다. 그리고 몇 년 전까지는 애증의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렇지 않았다.
기이할 정도로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마치 모르는 여자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인가? 나의 입장에서는 수십 년 전의 일이니까.’
역시 시간이라는 것은 사람을 무뎌지게 하는 것 같았다.
호영은 당혹감을 지우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이런 곳에 올 정도가 되었으니, 잘 지냈다고 봐야겠지?”
그 같은 대답에 소희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대답이 들려올 줄은 예상치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웃는 얼굴을 하고는 말문을 열었다.
“확실히 잘 지내긴 했나 보네. 정말 달라 보여.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어.”
“너는 예전과 똑같네. 변한 게 없는 것 같다.”
20대의 여성에게는 예뻐졌다는 말이 최고의 칭찬이겠지만 30대의 여성에게는 예전과 똑같다는 말이 최고의 칭찬이었다.
소희도 호영의 말이 싫지는 않았는지 ‘고마워.’라고 대답하였다.
‘딱히 칭찬의 의미는 아니었는데.’
그녀의 반응에 호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일부러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기 위해 한 말이었는데 그녀는 칭찬으로 알아들은 것 같았다.
‘그런데 정말 변한 게 없기는 하군.’
이제 30대가 되었으니 조금 변했을 법도 한데 그녀의 미모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녀 혼자만 시간을 거스르기라도 한 것 같았다.
호영은 잠시 그녀의 미모를 보고 감탄하다가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증오하는 마음이 사라졌다고는 해도 그녀가 자신에게 한 짓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가장 힘들었던 시절, 호영을 배신하고 최진수의 애인이 된 것이 바로 그녀였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가 없었다.
“나 내년에 결혼해.”
“……뭐?”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호영의 얼굴이 굳어졌다.
뜬금없이 결혼이라니? 설마 아직까지도 최진수와 사귀고 있었던 것일까?
‘설령 그렇다 해도 나랑은 상관없는 일인데…….’
호영은 다소 찝찝한 기분을 느끼며 소희에게 물었다.
“상대는?”
“글쎄, 누구일 것 같아?”
장난스럽게 되묻는 그녀의 모습에 호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녀와 결혼할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하였기에 그녀의 장난에 응해 주었다.
“최진수인가?”
“걔가 여기서 왜 나와? 헤어진 지가 언젠데, 호호호.”
“그러면 누구지? 내가 아는 사람이야?”
“사실 너는 모를 거야. 그 사람은 너를 알고 있지만 말이야.”
영문 모를 소리였다. 호영은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호호호. 그 표정도 오랜만이네. 잠시 기다려 봐, 소개해 줄 테니.”
그 말을 하고서 소희는 어디론가 떠나 버렸다.
2분 정도 지나서야 다시 돌아왔는데, 그녀는 웬 남자와 함께였다.
“여기 이 사람이 나와 결혼할 사람.”
소희는 자신과 결혼할 사람이라며 40대 초중반의 사내를 호영에게 소개하였다.
“반갑습니다. 한경오 신문사의 편집장을 맡고 있는 차한열이라고 합니다.”
“송호영이라고 합니다. 하고 있는 일은…….”
“알고 있습니다. 대한국의 국왕이시죠?”
“예?”
느닷없이 대한국의 국왕이라고 묻는 사내를 보며 호영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소희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 사람이 네 팬이래.”
“맞습니다. 국왕 전하께서 일본과 싸우는 모습을 보고 팬이 되었습니다. 참고로 저는 모험가 조합 소속의 용병이었습니다.”
“…….”
호영으로선 정말 어처구니없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애증의 존재였던 소희가 결혼한다는 소식부터가 뜬금없었는데 그 결혼한다는 사람이 자신의 팬이라니.
몰래카메라로 찍고 있는 것 같았다.
“혹시 사인 좀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호영이 어처구니없어하고 있을 때, 차한열이라는 사내가 호영에게 부탁하였다.
“사인요?”
“제가 정말 팬이라서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정말 가지가지 한다고 속으로 생각한 호영은 차한열이 건네준 종이에 사인을 해 주었다.
그 이후로는 번호도 교환하였는데 무슨 좋아하는 연예인의 번호를 얻어 낸 것처럼 황송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사진 찍어도 될까요?”
“죄송하지만 사진은 안 됩니다.”
“아…….”
상대가 신문사의 편집장이었기에 사진만큼은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그는 아직 언론에 얼굴을 공개할 생각이 없었다.
물론 머지않은 시일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아니었다.
“아쉽군요.”
“미안합니다.”
“아니요. 저는 이 사인만으로 충분합니다. 이건 가보로 삼겠습니다.”
“가보까지야…….”
“제게는 가보 이상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혹시 나중에 언론의 힘이 필요하실 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하는 차한열을 보고 호영은 미묘한 얼굴을 하였다.
처음에는 소희의 남편이 될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안 좋은 선입견을 가졌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열성 팬이라는 것을 알아서 그런지 나쁘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예상치 못한 인연이지만 왠지 오래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한열 씨, 다 했으면 이만 가자. 계속 여기 있는 것도 민폐잖아.”
“그런가?”
“호영, 우리 3월에 결혼할 거니까 올 수 있으면 꼭 와. 그리고 우리는 이만 갈게.”
소희는 그 말을 하고서 손을 흔들었다. 이별의 의미였다.
호영은 심란한 눈으로 두 사람이 멀어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파티라는 것이 이렇게나 다사다난한 것이었나. 미치도록 피곤하군.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을 정도야.’
어느덧 파티가 끝나자, 호영은 피로한 눈으로 그 같은 감상을 늘어놓았다.
* * *
“오랜만에 접속하는 것 같군.”
리셉션 파티가 끝난 이후로도 호영은 허영만과 최진수가 소개해 주는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느라 센추리에 접속할 시간이 없었다.
마침 연말이라 사교 모임이 많았기에 더욱 그러했다.
호영은 결국 3회 차가 끝나기 직전이 되어서야 간신히 센추리에 접속할 수 있었다.
‘정말, 마음 같아서는 센추리에만 집중하고 싶은데……. 빌어먹을 재벌들 때문에 이게 뭐 하는 건지 모르겠네.’
재벌들이 쓸데없는 짓만 하지 않았다면 원하지도 않는 사교 활동으로 시간을 낭비할 일도 없었을 터.
그로선 새삼스레 재벌들이 거슬렸다.
복수라는 것을 하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접속하셨습니까?”
호영이 이를 갈며 재벌들에 대한 적의를 불태울 때, 원재가 불쑥 말을 꺼냈다.
“기다리고 있었나?”
“예, 오늘은 접속하실 거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미리부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원재의 말에 호영은 기분이 조금 풀린 것을 느꼈다. 역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센추리임을 다시금 자각하였다.
“그동안 별일 없었어?”
“일이야 많았지만 전하께서 신경 쓰셔야 할 만한 일들은 없었습니다.”
“반란이나 외부 침략 같은 사건은 없었다는 거군. 하기야 그런 일들이 있었다면 진즉에 보고했겠지.”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이번 회 차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더 이상 없는 건가?”
“예, 전하께서는 이제 편히 쉬셔도 될 것 같습니다.”
“여유롭게 다음 회 차를 기다리면 되겠군. 뭐, 그래 봤자 며칠 안 남았지만 말이야.”
3회 차가 끝나기까지 불과 사흘도 채 남지 않았다. 사실상 3회 차는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생각해 보면 적절한 시점에 전쟁을 모두 끝내 놓아서 다행이야. 그 덕분에 백년대계를 완벽하게 준비할 수 있었으니까.’
호영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2회 차보다는 마무리 시간이 부족하였지만 그래도 센추리 시간으로 반년에 가까운 시간이 주어졌기에 3회 차도 그럭저럭 만족스럽게 끝맺을 수 있었다.
후환거리도 확실하게 제거하였고, 후계자도 키워 냈으며 국가의 백년대계도 세워 놓았다.
또한 아바타의 성향을 개조하는 것도 성공적으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