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
#적과의 동침
‘아마 충격이 클 거다. 내가 동맹을 제안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테니까.’
아직 전생처럼 철천지원수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두 사람의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대학교 때 여자 한 명을 두고 다투었던 것도 그렇고 최근에는 센추리에서 최진수가 호영의 손에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으니 말이다.
두 사람의 사이는 한마디로 말해서 적대 관계에 가까웠다.
‘솔직히 나도 이런 상황이 아니었으면 최진수와 동맹한다는 생각 따윈 하지 못했겠지. 그놈과 나는 악연 중의 악연이었으니.’
호영은 이성적인 사내였다. 적이라고 할 수 있는 상대도 서로에게 이득이 된다면 얼마든지 손잡을 수 있었다.
최진수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재벌들이 귀찮게 구는 상황에서 재벌 3세인 최진수가 한편이 되어 준다면 아주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신호 그룹이 우호적으로 변할 뿐만 아니라, 재벌들이 한마음으로 뭉치는 것을 막아 줄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최진수가 과연 나의 손을 잡을 것인지, 아니면 같은 재벌의 손을 잡을 것인지인데……. 이상하게 나는 최진수가 나의 손을 잡아 줄 것 같단 말이지.’
사실 최진수가 호영의 편에 설 가능성은 그렇게 높지 않았다. 그 다혈질 같은 성정도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위험부담이 상당하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최진수 입장에서는 같은 재벌을 적대하게 될 수도 있는 동맹이었다.
가문에서의 입지가 그리 좋다고 볼 수 없는 최진수로선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자신 때문에 신호 그룹이 다른 재벌들에게 공격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영은 최진수가 자신과의 동맹을 선택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무슨 논리적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냥 최진수를 오래 지켜봐서 그런지, 그가 어떤 행동을 할지 어느 정도 예상된 까닭이었다.
그리고 며칠이 채 지나지 않아 호영이 예상했던 결과가 나왔다.
“반응이 빠르군요, 벌써 초청장이 날아오다니.”
“걔도 급했을 테니까. 회사에서 입지가 좋은 편은 아니거든.”
12월 중순이 되자 초청장 하나가 날아왔다. 신호 호텔에서 보낸 초청장이었는데, 발신인이 최진수였다.
동맹을 공식적으로 선포하기 위해 호영을 초청한 것이다.
‘나의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군.’
호영이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릴 때 충구가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재벌 3세와 동맹을 맺다니. 그것도 한때 적이었던 상대와 말입니다.”
“거의 운이었지. 허 팀장이 대기업들의 공세에 관해 이야기했던 그날, 때 마침 최진수의 전화가 왔거든.”
“운이든 뭐든, 정말 대단하십니다. 이제 그 친구분을 포섭했던 것처럼 다른 재벌 3세들도 포섭한다면 앞으로 재벌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쉽지 않을 거야. 오히려 우리를 집어삼키려는 자들이 더 많아질 수도 있는 일이니까.”
최진수야 그룹에서의 입지가 불안정하고 센추리의 가치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어 호영과의 동맹을 선택한 것이지만 다른 재벌가의 일원들까지 그럴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호영의 등에 칼을 꽂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물론 호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당할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파티에는 누구누구 데려갈 것입니까?”
“굳이 요란을 피울 생각은 없어서, 간부들 중에 한두 명만 데리고 갈 생각이다.”
“한 명은 허 팀장이겠군요.”
“아무래도 경험자니까. 너는 어때? 가고 싶어?”
“경험상 가 보고 싶기는 한데, 솔직히 부담됩니다. 센추리에서야 책사라고 떠받들어 주지만 현실에서는 대학 중퇴생에 불과하기 않습니까? 파티 같은 것은 애초에 경험해 본 적도 없고 말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나도 마찬가지야.”
사실 호영도 부담이 없지는 않았다.
그냥 파티도 아니고 무려 재벌가의 파티였다. 정재계의 유명 인사들부터, 연예계에서 활동하는 인기 연예인까지.
파티에는 그야말로 초호화 게스트들이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로선 파티라고는 생전 경험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센추리에서는 연회를 많이 경험해 봤지만 말이다.
“아무튼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지. 준기 아니면 원재랑 갈 수밖에.”
“민 이사를 데리고 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건우를?”
“예, 민 이사가 그래도 대한 길드의 길드장이고, 나름 금수저 출신이니 파티 같은 것에도 익숙하지 않겠습니까?”
나름 설득력 있는 말이었다.
“하긴, 건우를 데리고 가는 게 낫긴 하겠다. 어차피 재벌들이 궁금해하는 것도 대한국보다는 대한 길드니까.”
“이참에 대한 길드가 누구 것인지를 확실하게 알려 주고 오십시오.”
“그래야겠어.”
대한 길드의 실제 주인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건우를 귀찮게 하는 사람도 많았고 말이다.
호영은 충구의 말처럼 이참에 대한 길드가 자신의 것임을 확실하게 밝힐 생각이었다. 그래야지만 건우와 호영 사이를 이간질하는 무리도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로열패밀리는 이미 가족이나 마찬가지다. 너희들이 우리 사이를 아무리 이간질하려 해도 로열패밀리가 분열할 일은 절대 없을 거야.’
* * *
12월 22일, 최진수가 주최한 리셉션 파티가 신호 호텔의 대연회장, 그랜드 볼룸에서 열렸다.
호영은 허영만과 민건우 그리고 윤원목만 대동한 채 파티장으로 향했다.
그가 파티장에 입장하니 사방에서 시선이 쏟아졌다.
“저 사람이야, 저 사람.”
“인물은 괜찮아 보인다.”
“돈도 엄청 많대.”
시선만 쏟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를 향한 온갖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답게 생겼다느니 돈이 많아 보인다느니, 대충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공식적으로는 그의 첫 번째 대외 활동이었기에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이쪽입니다.”
호영과 세 사람은 들려오는 목소리를 애써 무시한 채 안내해 주는 직원을 따라 지정된 자리로 향하였다.
그들의 자리는 파티장 정중앙에 있었다.
“완전히 주인공 취급이군요.”
“주인공이 맞습니다. 애초에 파티의 목적부터가 사장님과의 동맹을 축하하기 위함이니까요.”
건우가 작게 중얼거리니 허영만이 그렇게 답하였다.
허영만의 말처럼 이번 리셉션 파티의 주인공은 호영과 최진수였다. 두 사람의 동맹을 공식적으로 선포하기 위한 파티였던 것이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속으로 그 같은 생각을 하며 자리에 앉으니 허영만이 말했다.
“저기 있는 사람은 홍보 수석의 장남입니다.”
“…….”
“그리고 저기는 신호 그룹의 임원이고 저기는 봉황 재단 이사장의 차남……. 중견 기업인 영일 그룹의 상속녀도 보이는군요.”
계속해서 이어지는 허영만의 설명에 호영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던 대로 참석자들의 신분은 하나같이 범상치 않았다.
셀럽이라면 인지도, 정치인이라면 권력, 경영인이라면 재력.
참석자 전체가 자신의 활동 분야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인사들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나를 보기 위해 파티에 참석했다니.’
물론 재벌 3세인 최진수가 주최한 파티여서 참석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호영을 보기 위해 참석한 것이다.
그만큼 호영은 정재계에서 급격한 관심을 받고 있었다.
“여기서, 대한 길드의 주인이 누구요?”
그때 갑자기 30대로 보이는 사내가 호영의 테이블로 다가와서는 그렇게 물었다.
“누구시죠?”
“나는 로테 제과 상무 신유한이오. 내가 누군지 알았으면 이제 내 질문에 답해 줬으면 좋겠는데?”
무례하기 짝이 없는 태도에 호영이 눈을 찡긋거리니 옆에서 허영만이 조그맣게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로테 그룹의 후계자입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 말에 호영의 표정이 더욱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
로테 그룹은 로열사를 공격하였던 다섯 개의 대기업 중에 하나였다. 당연히 호영과는 적대적인 관계일 수밖에 없었다.
‘무슨 목적으로 나를 찾아온 거지?’
호영이 일그러진 얼굴로 상대의 의도를 파악할 때, 호영 대신 건우가 신유한의 물음에 답하였다.
“저, 제가 대한 길드의 길드장입니다만.”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민건우입니다.”
“그럼 아니네요. 내가 주위에서 듣기로 대한 길드의 서열은 2위가 윤원목이라는 사람이고 1위는 송호영이라는 사람이었거든. 길드장은 10위 정도였던가?”
신유한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건우에게 무안을 주었다.
그러자 건우는 얼굴을 붉히며 입을 꾹 다물었다.
면전에서 그런 말을 들으니, 사람 좋은 건우라고 해도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송호영이라는 사람은 없어요?”
“제가 송호영입니다만.”
“아, 반갑습니다. 이름이야 더 말할 필요는 없겠지요?”
느글거리는 얼굴로 악수를 건네니 호영도 거부하지는 못하고 굳은 얼굴로 악수를 받아 주었다.
“그런데 저는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별거 아니고, 계속 궁금했거든요.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기에 나의 제안을 그토록 거절한 것인지. 그런데 직접 보니 이건 뭐.”
“…….”
“아무튼 이렇게 보게 되어서 참 좋네요. 그쪽, 송 사장이라고 부르면 되나요?”
“편할 대로 부르십시오.”
“어쨌든 사장은 사장이니, 송 사장이라고 부를게요. 여기서 국왕 전하라고 부를 수는 없으니까.”
뭔가 하대하는 느낌이라 기분이 상했지만 이런 자리에서 함부로 행동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호영은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면서도 예의에는 어긋나지 않게 신유한을 상대하였다.
“그런데 송 사장은 기분이 어떤가요? 이런 곳도 처음이고 나 같은 사람을 본 적도 처음일 텐데.”
하지만 신유한을 상대하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신유한은 마치 도발이라도 하는 것처럼 호영의 심기를 거슬리게 만들었는데, 반말과 경어 사이를 마구 오가는 것도 그렇지만 은연중에 호영의 신분을 무시하는 태도도 호영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격장지계를 사용하여 나의 성격을 떠보려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꽤나 성공적이군. 아주 기분이 더러워졌으니 말이야.’
으드득.
호영은 이를 악물고 대답하였다.
“별로 특별할 것은 없더군요. 사람 사는 세상이 어디든 다 똑같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낀 것 같습니다.”
“아, 그래요?”
피식.
호영의 대답에 신유한은 조소를 지었다. 마치 ‘네 따위가 뭐를 알겠냐.’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조소였다.
그런 신유한을 보며 호영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저의 일행이 불편해하는 것 같은데, 하실 말씀 다 끝나셨으면 이제 그만…….”
“꺼지라고요?”
“자리를 피해 달라는 겁니다.”
“그게 그것 같은데.”
“…….”
“알았어요. 알았어. 꺼져 달라면 꺼져 줘야지.”
그렇게 말하고서 등을 돌린 신유한이 돌연 탄성을 내질렀다.
“아! 꼭 해야 할 말을 안 해 버렸네. 잠시 이 말만 하고 갈게요. 그 정도는 괜찮죠?”
“……그러십시오.”
신유한은 갑자기 싸늘한 표정을 짓고는 입을 열었다.
“나의 조카 중에 유영이라는 아이가 있다. 얼굴도 예쁘고 머리도 똑똑한 아이지.”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겁니까?”
“조용히 들어라. 유영은 스물여섯 살, 나이도 적당하다. 우리 가문의 일원이니 재산도 적지 않아. 그리고 다른 재벌들과 비교했을 때 성격도 괜찮은 편이야. 상대의 신분이 하찮다고 무시할 아이는 아니란 거지.”
아직 신유한의 말은 끝나지 않았지만 호영은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정략결혼!
신유한은 지금 호영과 자신의 조카를 결혼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죄송하지만 조카분과 결혼할 생각은 없습니다.”
“신중하게 고민하고 결정하는 게 좋을 텐데?”
“아무리 고민해도 결과는 같을 겁니다.”
그 단호한 대답에 신유한이 얼굴에 노기를 드러낸 채 호영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호영도 피하지 않고 신유한의 눈을 마주 봤다.
잠시 동안 두 사람 사이에 납덩이처럼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하하하. 유한 형님, 여기 계셨습니까?”
정적은 쾌활한 목소리에 의해 깨어졌다.
“호영이, 너도 여기 있었냐? 잘됐네. 마침 서로를 소개해 주려고 하였는데 말이야. 하하하!”
“최진수…….”
호영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과장스럽게 웃는 최진수의 모습은 평소와 달라도 너무 달라 보였다.
조금 가볍게 보이기도 했지만 어찌 되었건 파티의 주인공다운 모습이었다.
‘나한테 친한 척을 할 줄이야. 연기 실력이 제법인데?’
단숨에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최진수를 보며 호영은 감탄하였다. 은연중에 최진수를 무시하고 있었는데 앞으로는 최진수에 대한 평가를 달리해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