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
“유저들이 저희를 따라 이민을 가려고 하겠습니까? 우리의 기반은 센추리에 있지만 결국 우리의 힘은 한국 유저들입니다.”
“저도 진짜 갈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협박용으로 쓰자는 겁니다.”
“재벌들의 자존심은 상상 이상입니다. 저희에게서 그런 협박을 당한다면 법을 무시하면서까지 공격할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가지지 못할 거, 부수겠다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로열 가드가 있으니 그런 건 걱정할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만.”
“아무리 로열 가드가 있어도 지켜야 할 사람이 어디 한둘입니까? 어쩌면 사장님의 일가친척이란 일가친척은 전부 건들 수도 있습니다. 주요 간부의 가족들도 안심할 수 없고 말입니다.”
“영화도 아니고, 법치국가에서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재벌들의 권력이 아무리 대단해도 여기는 한국이고 그들은 기업입니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전국적으로 불매운동이 일어나게 될 겁니다. 아니, 그 전에 대통령이나 정치인들이 가만 놔두지 않을 것입니다.”
“말이 안 될 것 같습니까? 원래 현실이 영화보다 더한 법입니다. 겪어 보지 않아서 모르시겠지만, 재벌들의 악랄함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들이라면 어떤 짓을 한다 해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두 사람의 의견 다툼이 길어지자 호영이 손을 들어 중재하였다.
“그만들 해라.”
“예,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호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영만에게 물었다.
“허 팀장,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 것 같으냐?”
사실 호영도 충구처럼 대기업들의 압력을 그렇게 위협적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내가 소유한 땅과 수하들이 소유한 땅을 합치면 1퍼센트가 넘는다. 면적으로 따지면 대략 4천 제곱킬로미터. 그리고 3회 차에서도 업적 점수를 어마어마하게 벌어들일 것이니 5회 차 때는 한반도 크기의 면적을 확보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호영이 소유한 땅은 도시 몇 개를 세워도 부족하지 않은 면적을 가지고 있었다. 센추리에서만큼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땅 부자인 것이다.
‘5회 차만 되도 재계 1위의 성삼 그룹조차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지게 될 거야. 그때쯤이면 현실과 센추리의 관계가 완전히 역전될 것이니까.’
회귀하기 전의 역사에서는 5회 차쯤 되었을 때 세계 인구 30퍼센트 가까이가 센추리를 플레이하였다.
수십억에 달하는 인구가 가상 세계에서 생활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지금과는 사회적 인식이나 분위기가 차원이 다르게 바뀔 수밖에 없었다.
재계 서열 10위에 안에 드는 대기업들?
그들은 초보자의 섬의 땅 부자들에게 돈에서도, 권력에서도 밀리게 된다.
쇼핑도 직장도, 심지어 교육이나 오락도 모두 가상 세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여기서 도태된 기업들은 현실에서도 도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반면 초보자의 섬의 땅 부자들은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과 다를 게 없었다. 센추리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 역사에서 센추리의 귀족이 현실의 귀족과 다를 게 없는 신분이 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센추리의 귀족이라면 업적 점수를 많이 딸 것이고, 업적 점수를 많이 따면 그만큼 초보자의 섬에 있는 땅을 구매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이 모든 것은 5회 차 이후가 되어야 일어날 일이야. 그 전까지는 현실의 공권력을 무시할 수 없어.’
호영이 허영만에게 대처법을 물어보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우선 정재계에 손을 내밀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는 신비주의 콘셉트가 먹혔을지 몰라도 앞으로는 그들과 담을 쌓은 채로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의 세상에 어떻게든 진출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경제계라면 몰라도 정치계는 선을 그었다고 볼 수 없을 텐데? 우리가 후원한 정치인이 수십 명이야. 지난 대선 때는 지금의 대통령을 상대로 후원했어.”
그는 미래를 알고 있었다. 비록 정치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지만 누가 당선되는지 정도는 대충이나마 기억하였다.
호영은 바로 그 기억을 토대로 유력한 정치인들을 후원하고 있었다. 올해 당선된 대통령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정치인들의 만남 요청도 전부 거절하였지 않습니까?”
“정치인들에게 허비할 시간이 없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을 텐데?”
“하지만 이 또한 투자입니다. 사장님께서 쌓으신 성채를 더욱 단단하게 해 줄 투자 말입니다.”
“…….”
“그리고 사교 클럽에도 가입하셔야 합니다. 정계, 법조계, 언론계 등등, 사회 저명인사들이 서로 교류하는 사교 클럽에 말입니다.”
호영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 역시 현실에서의 영향력을 보다 확대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었다. 5회 차가 되기 전까지 재계의 압력을 막아 내기 위해서라도 영향력이 더욱 강해져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허영만의 의견은 전부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나같이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까닭이었다.
“나는 그런 것에 시간을 허비할 생각이 없다. 안 그래도 부족한 게 시간이야.”
“하셔야 합니다. 이 이상 담을 쌓고 지낸다면 기득권이 더욱 극단적으로 반응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우호적인 기업들도 전부 사라질 것이고 말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인맥을 넓히십시오. 센추리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현실입니다.”
강요처럼 느껴지는 말투였지만, 호영은 기분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허영만의 사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험담인가 보군.’
한때 잘나가는 사업가였다가 대기업과의 마찰로 순식간에 부도를 맞이한 허영만.
대기업의 압력으로 회사 전체가 풍비박산했던 허영만이었기에 대기업을 경계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호영은 결국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알겠다. 허 팀장의 말대로 앞으로는 인맥을 넓히는 것에 중점을 두도록 하지.”
“또 하나, 하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뭐지?”
“……결혼입니다.”
“……!”
“어떤 재벌이든 좋습니다. 사장님께서 재벌가의 일원이 되시기만 한다면 누구도 사장님에게 압력을 행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말에 호영은 눈을 크게 떴다.
여기서 결혼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나쁘지 않은 방법입니다만…….”
호영이 잠시 말문을 닫고 있을 때 충구가 인상을 찡그리며 반론했다.
“사장님과 격이 맞는 상대가 있겠습니까?”
충구의 대답에 호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정략결혼 하는 것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는군. 뭐, 당연한 일인가.’
왠지 모르게 씁쓸함이 느껴졌지만 호영은 내색하지 않고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마저 들었다.
“로열사로는 부족할지 몰라도 센추리의 기반을 생각하면 재벌들도 사장님과의 정략혼을 긍정적으로…….”
“반대죠.”
“……예?”
“재벌들이 부족한 거지, 사장님이 부족한 것은 아니죠.”
“…….”
“뭐, 상대가 재벌 회장쯤 되면 수지타산에 맞을 것 같은데, 우리나라에는 결혼 적령기의 여회장이 없지 않습니까?”
“회장이라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은 재벌가의 일원이 되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할 상황입니다.”
“허 팀장이야말로 너무 나약한 소리를 하시는군요. 사장님이 뭐가 부족하다고 재벌가의 일원이 되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자산만 따져도 사장님은 이미 우리나라 제일의 부자입니다.”
“제일 부자라니요?”
“초보자의 섬에 있는 자산을 모두 판매한다면 20조는 훨씬 넘을 것이니 그 정도면 제일 부자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정도나 됩니까?”
허영만은 눈을 크게 뜨며 놀라워하였다.
로열패밀리에 합류한지 몇 달이 되었지만 초보자의 섬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는 게 많았다.
“전라도 북도의 절반에 가까운 면적을 보유하고 있으니 20조도 한참이나 낮게 잡은 겁니다.”
“허어, 그렇다면 확실히 재벌가의 일원이 되는 것으로는 부족하긴 하겠군요. 나중이 되면 땅이 더 커질 것이니 말입니다.”
정략결혼에 대한 이야기는 거기서 끝났다. 어처구니없지만 호영과 격이 맞는 상대가 없다는 이유로 정략결혼이 무산된 것이다.
‘이걸 다행이라고 봐야 하나.’
만약 마땅한 상대가 있었다면 호영으로선 어쩔 수 없이 정략결혼을 해야 했을 터.
물론 호영을 강제할 사람은 없겠지만 명분상 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지도자의 결혼이란 애초에 정략적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호영과 격이 맞는 상대가 없어서 호영의 결혼은 나중으로 미루어졌다. 어쨌든 최악은 피한 셈이었다.
‘아니, 그걸 최악이라고 볼 수 있을까? 어차피 내가 연애결혼을 할 일도 없을 텐데?’
호영은 고소를 금치 못했다. 회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연애 한번 못했다는 사실이 우습게만 느껴졌다.
뭐가 부족하다고 여자를 안 만났던 것일까? 회귀 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금전적으로 부족할 게 없는 상황인데?
그의 측근들이 정략결혼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호영은 여자에게 관심 한번 보인 적이 없을 정도로 금욕적이었으니 말이다.
* * *
정략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회의가 끝났고 회의실에는 호영 혼자만이 남았다.
“결혼이라……. 이제 나도 진지하게 결혼을 생각해야 할 시기가 온 것인가?”
회의실에 홀로 남은 그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나이도 어느덧 31세, 회귀하기 전의 나이까지 포함하면 무려 40대였다. 아직 노총각이라 불리기에는 이른 나이였지만 그래도 슬슬 결혼에 대해 생각해야 될 시기였다.
호영은 자신의 휴대폰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강충구, 홍준기, 민건우, 김성근, 김병진, 허영만, 조경호…….
연락처에는 오직 남자들 번호밖에 없었다. 이성 번호라고는 고작해야 다섯 개 정도뿐.
010-○○○○-○○○○.
바쁘게 움직이던 호영의 손가락이 멈추었다.
몇 개 없는 이성 번호 중에서 유일하게 최근에 연락을 가졌던 번호였다.
‘박경선.’
호영의 머릿속에 불현듯 박경선의 얼굴이 떠올랐다.
건강미 넘치는 몸매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가진 미녀, 박경선.
-우리 한번, 만나 볼래요?
그녀는 며칠 전, 호영에게 갑자기 고백하였다. 한번 사귀어 보는 게 어떠냐고 교제를 청하였던 것이다.
그 갑작스러운 고백에 호영은 그답지 않게 당황하였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을 미루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경선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예 없지는 않은 것 같았다.
‘경선과 연애하면 나름 재미있을 것 같기는 한데…….’
드르르륵
그때 갑자기 호영의 휴대폰이 진동하였다. 전화가 온 것이다.
호영은 순간 경선의 전화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지만 아쉽게도 모르는 전화였다.
그는 혀를 차며 전화를 받았다.
-야, 이 개새끼야!
다짜고짜 욕설이 날아왔다. ‘여보세요.’라고 말하기도 전에 누군지도 모르는 이가 욕설을 날린 것이다.
‘뭐 하는 놈이지.’
호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전화를 끊으려 할 때, 상대가 고함을 지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