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
“태사께서는 설마……?”
“잘못을 했으면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소? 그게 아무리 왕이라 해도.”
“……!”
좌중은 경악으로 술렁였다.
왕에게 책임을 묻는다니! 역모를 꾸미자는 이야기와 다를 게 없었다.
“마,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왕을 반하고서 살아남은 자는 아무도 없소이다!”
“그들은 힘이 없었고 우리는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소. 솔직히 우리가 나선다면 이 나라에서 안 될 게 뭐가 있겠소이까?”
태사, 중랑장, 내사, 호군, 도위, 중위…….
이곳에 모여 있는 자들은 그야말로 요동 정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권력자들이었다. 수도에서 1천의 병력을 동원하는 게 가능할 정도였다.
그리고 1천이라면 왕을 갈아치우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였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이라면 어림도 없었겠지만 요동국의 1만에 달하는 대병력이 남으로, 동으로 이동한 상황이었다.
수도에서는 불과 2천의 병력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 2천이라는 병력도 넓게 분산되어 있었고 말이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주무의 말도 결코 과장은 아니었다.
“하지만 왕의 힘은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지 않소?”
“맞습니다. 왕이 두려운 이유는 센추리에서의 권력 때문이 아니라 현실에 있는 왕의 배경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손태의 권위는 단순히 카리스마가 뛰어나고 무력이 강하기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것이 큰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지만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것은 따로 있었다.
“그분이 허락하셨소.”
바로 후원자의 존재 때문이었다.
“……정말이오?”
“내가 직접 그분의 말을 들었소.”
그분, 공손태의 후원자를 직접 만났다는 주무의 말에 좌중은 경악했다. 요동국의 수많은 유저들 중에서 오직 공손태만 볼 수 있는 존재를 주무가 직접 만나 봤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닐 거다. 감히 거짓을 꾸미기엔 너무 무서운 사람이었으니까.
결국 주무의 말은 사실이라는 것이었다. 그분을 만났다는 것도 그분이 공손태를 내치기로 결정한 것도.
“그렇다면 답은 정해졌구려. 왕을 죽이는 것.”
“당연한 일이오. 누구의 결정인데?”
“태사, 진즉에 말씀하지 그러셨소? 그분의 뜻이라면 애초에 회의를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 아니오.”
공손태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던 이들이 지금은 가장 먼저 찬성을 표하였다.
주무가 거론한 ‘그분’이라는 존재에 의해 회의의 분위기가 이렇게나 바뀌어 버린 것이었다.
“뭐,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지 않소? 반란이야, 태사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가 힘을 합치면 어려울 게 없을 테고……. 문제는 빵즈들과의 협상인데?”
“얼마나 줘야 할지가 걱정이오, 낙랑군 정도로는 성이 안 찰 것이니.”
“낙랑군을 준다고 하면 오히려 끝까지 싸우려 들 것이외다. 이미 빼앗긴 땅인데 우리가 주고 말 것이 어디 있소?”
“맞는 말이오. 차라리 계집들을 주는 게 어떻겠소? 빵즈들이 장정이라는 장정은 모조리 학살하여 성비가 지금 말이 아니오. 계집들을 먹여 살릴 식량도 없고 말이오. 그러니 계집을 주면 일석이조가 될 것이오.”
“중랑장, 정말 좋은 의견이오.”
“나도 계집을 주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하오. 수만 명의 젊은 계집을 준다고 하면 어느 남자가 거절하겠소?”
자국의 여성을 배상금으로 지불하는 게 좋겠다는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회의가 끝이 났다.
* * *
‘그 공손태가 반란군에 의해 죽을 줄이야.’
4회 차 때까지 만주에서 명성을 떨쳤던 요동국의 왕, 공손태. 비록 적을 너무 많이 만들어 100년의 세월을 버티지 못하고 몰락하였지만 한때는 만주의 지배자라고 불렸을 정도로 큰 세력과 명성을 가졌던 이였다.
회귀한 이후의 세상에서도 공손태는 요동국을 건설하면서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였다. 중국의 여러 제국들에게 밀리지 않는 전력을 가졌다는 것만 봐도 그 실력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공손태가 갑자기 죽임을 당하였다. 부하들에게 배신을 당한 것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이겼다. 한국을 비롯하여 일본과 중국 등 수많은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는 이 전쟁에서 이기고 만 것이야.’
요동국과의 전쟁은 오늘부로 완전히 끝이 났다.
당연히 승자는 대한국이었다.
“말 5천 필에 여인이 1만 명, 그리고 3천 명을 무장시킬 수 있는 갑옷과 병장기라……. 이 정도면 괜찮군.”
전쟁에서 승리한 대한국은 협상에서 많은 것을 얻어 냈다.
한반도 북부는 따로 거론할 필요도 없었고, 말과 여인, 그리고 무구와 철광석, 마정석 등을 얻게 된 것이었다.
여기에 전쟁에서 약탈한 식량까지 합친다면 재작년 기준으로 5년 예산의 소득을 얻은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소득이었다. 말의 가치를 따로 환산할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더 그러했다.
‘그래도 가장 큰 소득은 명성이지.’
일본에 이어 중국까지 꺾어 낸 호영!
본 게임을 넘어 센추리를 플레이 하는 모든 유저들을 열광시키기에 부족함 없는 업적이었다.
더 이상 호영의 대한국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으리라.
‘만주의 다른 국가들과도 전쟁을 하고 싶을 정도야.’
호영이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이번 전쟁에서 많은 것을 얻었다.
하지만 호영은 고개를 저으며 탐욕을 물리쳤다. 이제는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비록 요동국과의 전쟁은 두 달도 안 되어 끝났지만 벌써 해가 지난 상태였다.
더군다나 원정군의 사기가 말이 아니었다.
1만의 여성을 받아 낸 이유도 원정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함일 정도로 원정군은 크게 지쳐 있었다.
애초에 규모도 심각하게 줄어든 상태이고 말이다.
이 이상 욕심을 부린다면 전쟁에서 이긴다 해도 최종적으론 지고 말 것이었다. 100년의 세월을 버티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벌써 두 세력과 적대 관계에 들어섰다. 하루빨리 귀환해서 본국의 역량을 강화시키지 않으면 안 돼. 지금 상태로는 우리가 없으면 위험해진다.’
중국과의 전쟁은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앞으로 중국뿐만이 아니라 일본이나 북한, 러시아 등 여러 세력들과 각축전을 벌이게 될 터.
호영이 있다면 문제 될 게 없겠지만 호영이나 유저들이 부재한다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랐다.
그러니만큼 하루빨리 대한국 자체의 역량을 키워 낼 필요가 있었다.
* * *
요동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왕을 영접하기 위해 백성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한눈에 봐도 즉위식 때 모여든 인파보다 많아 보였다. 최소 5만. 어쩌면 7만이 넘을 수도 있는 규모였다.
“우와아아아아아!”
호영은 자신을 보고 환호하는 백성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러자 진동이 느껴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환호 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흐흐, 말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김성근의 뜬금없는 한마디에 호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갑자기?”
“말이 없었으면 폼이 안 났을 거 아닙니까?”
그 말에 간부들이 픽 웃음을 지었다.
“맞습니다. 전에도 걸어서 개선식을 했는데 왠지 쪽팔렸습니다. 제 아바타가 워낙 키가 작아서 특히…….”
“전하께서도 말을 타고 계셔서 더욱 멋있는 것 같습니다. 백마 탄 왕이라니, 크으.”
“뭐, 전하께서는 말이 없어도 딱히 상관없지 않나. 아우라부터가 어마어마하시니까.”
몇몇은 김성근의 말에 맞장구를 쳤고 몇몇은 뜬금없이 호영에게 아부를 하였는데, 수도로 돌아온 탓인지 하나같이 분위기가 업 되어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리 밝다고 볼 수 없는 분위기였는데 말이다.
호영은 그런 간부들을 보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긴장감은 완전히 해소된 모양이군.’
전쟁이야 진즉에 끝났지만 원정군은 긴장감을 풀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있던 곳이 적지였기 때문이다.
지난 전쟁에서 대한국이 요동국 백성들에게 남긴 상처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죽은 장정의 숫자만 10만에 가까웠고 폐허가 된 마을은 서른 개가 넘었다.
더군다나 수십만이 한 달 동안 먹을 수 있는 식량이 원정군의 손에 의해 불타 버렸다. 이제 요동국은 극도의 식량난에서 살아남을 걱정을 해야 할 판국이었다.
당연히 요동국의 백성들 입장에선 원정군에게, 정확히는 대한국에게 원한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작 팔백이라는, 한줌밖에 되지 않은 병력으로 적지를 가로지르던 원정군은 엄청난 긴장감과 압박감을 느껴야 했다.
요동국을 지나 본국의 영역에 들어선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낙랑군은 불과 얼마 전까지 요동국의 영토였고 그 전에는 낙랑국의 영토였다.
언제 무슨 일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지역이었다.
원정군은 그렇게 자국의 영토에서도 24시간 긴장한 채 강행군을 하였다.
지금껏 분위기가 나빴던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폼을 챙기려면 일단 그 입들부터 닫도록 해라. 지금 너희를 보고 있는 것이 백성들뿐만이 아니라 유저와 국민 전체라는 걸 생각해.”
“충.”
호영의 한마디에 간부들이 ‘충’을 외치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기분이 상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하나같이 싱글벙글한 것이 이제부터 휴가라는 생각에 들뜬 것이 분명하였다.
‘편히 쉬어라, 고생했으니.’
전라도에서의 전쟁을 시작으로 친다면 거의 1년 내내 전쟁을 치렀던 간부들이었다.
다음 전쟁이 있을 때까지는 아무것도 안 하고 쉰다 해도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그 정도로 고생하였으니 말이다.
‘물론 나는 쉴 시간이 없겠지만.’
호영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원정군에게 해산명령을 내렸다. 그러고는 7인회에 소속되어 있는 최고위 간부들을 불러들였다.
* * *
“정말 인기가 많으십니다. 함성 소리가 왕궁까지 들렸습니다.”
충구의 뜬금없는 첫마디에 호영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얼굴이 잘생겼잖아.”
“성군이라서 그렇다는 말은 안 하시네요. 다행입니다.”
“나 정도면 성군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
“농담이다, 농담.”
정색하는 충구의 얼굴을 보자 호영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무슨 이상한 마음이 생겨서 그런 것은 아니고, 갑자기 긴장감이 풀린 탓이었다.
‘진짜 돌아왔구나, 나의 왕국으로.’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은 간부들뿐만이 아니었다. 호영도 24시간 내내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왕의 몸으로 타지에 있었으니 긴장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관서 지방(낙랑군)이나 해서 지방(황해도)도 그의 영토지만 솔직히 말해서 아직까지는 낯설게만 느껴졌다.
여전히 타지로만 느껴졌는데,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한 문제인 것 같았다. 센추리 시간으로 1년 정도는 필요하지 않을까? 애초에 올해의 목표부터가 한강 이남이었고 말이다.
반면 현리는 달랐다. 1회 차부터 근거지로 삼은 곳이어서 그런지 애착이 갔는데, 어찌나 애착이 가는지 현실의 고향보다 이곳이 더 고향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호영은 잠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오래간만에 느껴 보는 여유를 만끽하다가 갑자기 말문을 열었다.
“수도의 민심은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지방의 분위기는 지금 어떻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