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
대한국이 내건 제시안에 신라 측의 외교관이 격노하여 벌떡 일어섰다. 외교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거리는 달아올랐는데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릴 것만 같았다.
그러자 대한국 측에서도 성을 내며 ‘어디서 소리를 지르는 겁니까, 감히!’라고 외쳤다.
그렇게 협상 분위기는 최악으로 흘러갔다.
“이제 겨우 초반인데 너무 일찍부터 강하게 나오는 거 아닙니까? 아무리 그래도 속국이라니. 그리고 기사 작위는 또 뭡니까? 일국의 왕이 어떻게 기사가 된다고 저런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멀찍이서 실무단이 협상하는 것을 지켜보던 최진수가 볼멘 목소리로 호영에게 말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여유로운 표정을 짓던 최진수였는데 기사 작위를 하사하겠다는 이야기엔 평정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자존심 하나만큼은 누구보다 강한 사내였기 때문이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호영이 피식 웃으며 그렇게 대꾸하자 최진수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대한의 왕께서는 정말 저에게 기사 작위를 하사하기라도 하실 생각입니까?”
“그게 확실하지 않겠습니까? 시스템적으로 말입니다.”
“……나를 그딴 식으로 생각했을 줄이야. 이거 진짜 기분이 나쁜데요?”
최진수는 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충구가 말했던 대로 도발에 약한 타입이었던 것이다.
‘조금만 더 도발하면 협상 결렬을 넘어 아예 나를 공격할 것 같은데?’
표정만 보면 확실히 그럴 것 같았다.
지금 당장만 해도 눈썹을 연신 씰룩거리는 게 화를 억지로 가라앉히는 것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뭐, 나를 공격해 주면 그거야 말로 최상의 결과지. 저기 있는 의병장들이 증인으로서 나의 명분이 되어 줄 것이니 말이야.’
호영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최진수의 심기를 사납게 할 만한 방법, 즉 격장지계를 떠올려 보았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최진수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었다.
경멸의 대상으로 여겼던 송호영이 대한국의 국왕으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최진수로선 자연히 분노할 수밖에 없을 터.
어찌 보면 그보다 확실한 도발은 없을 것 같았다.
물론 그 외에도 갑자기 하대한다든가, 속국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주지시킨다든가 하는 그런 방법들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전하.”
호영이 어떤 격장지계를 사용할지 고민하던 그때, 원재가 갑자기 귓속말을 하였다.
“왜 그러지?”
“잠시 자리를 옮겨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원재의 말에 호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산통을 깨듯 애써 만들어 낸 분위기를 망가뜨린 게 짜증이 나기도 하였지만 원재가 괜한 행동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급하게 호영을 찾아온 것은 분명 중요한 정보를 알리기 위함일 것이었다.
호영은 최진수에게 잠시 자리를 비운다는 말을 하고는 밖으로 나가 원재에게 보고를 들었다.
“오크족의 남진이라니,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냐?”
호영은 원재에게서 예상치 못한 보고를 듣자 저도 모르게 화를 내듯 말했다.
“개성이 공격당하고 있습니다. 바로 오크족에게 말입니다.”
“돌격대가 오크족을 몰아낸 지가 언젠데……. 하필 지금 같은 시점에 오크족의 남진이라니.”
“그보다 더 중요한 소식이 있습니다.”
“……뭐지?”
“요동국입니다. 만주의 요동국이 선전포고를 하였습니다.”
그 말에 호영의 눈이 부릅떠졌다.
‘기억에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중국의 제국들이 접촉해 오는 것은 최소 4회 차 이후의 일. 그런데 3회 차인 지금 난데없이 요동국의 침략이라니?
호영은 경악하였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는 이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간부들을 소집해라.”
요동국의 남진이 예고되는 지금, 신라와의 협상 따위에 허비할 시간이 없었다.
당장 전쟁을 하여 신라를 멸하든, 아니면 신사적인 협정을 하던 최대한 빨리 신라에 관련된 일을 끝내고 수도로 되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요동국
실제 성이 임씨고 창술 및 봉술에서 요동국 제일이라 양산박의 임충이라 불리는 사내가 적색 말을 탄 7척 거한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무능하게도 주군과의 서약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죽여 주시옵소서!”
임충의 사죄에 적색 말을 탄 사내, 공손태는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왜 늦었지?”
“패배자들이 평양성에서 결사항전을 하던 중에 낙랑의 백성들이 곳곳에서 항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을 상대하느라 시간이 지체되고 말았습니다.”
작년, 그러니까 1분기 때, 금나라를 무찌른 요동국은 곧바로 남진을 준비하였다. 목표는 한반도였다.
내정에 집중하여 실력을 기른 요동국은 2분기가 되자 예정했던 대로 남진을 시작하였다. 임진강 근처의 떨거지 부족들을 쓸어버리고는 곧바로 한반도에 진입한 것이었다.
그렇게 요동국이 한반도의 평안도 지역에 진입한 순간, 그곳에 근거지를 둔 낙랑국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낙랑국은 만주의 세력 다툼에서 밀린 중국인들이 남하해서 세운 나라였다. 즉, ‘패배자’들이 세운 왕국이란 뜻이었다.
요동국의 왕, 공손태로선 패배자 따위를 상대하는데 오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원정군의 수장 임충에게 말했다.
가을이 오기 전에 낙랑을 멸망시키라고.
하지만 결과가 말해 주듯 임충은 겨울이 다 되어서야 낙랑을 무너뜨렸다. 공손태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었다.
“이미 지겹도록 들었던 변명밖에 없군.”
“죽여 주십시오!”
“더 할 말은 없는 건가?”
“…….”
“그렇다면 죽어라.”
서걱!
낙랑국을 정복했던 대장군, 임충은 그렇게 죽었다. 정복이 조금 늦어졌다는 이유로 일체의 자비 없이 처형당한 것이었다.
‘다음 회 차에서도 또다시 한심한 모습을 보여 준다면 더 이상의 기회는 없을 것이다.’
공손태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수하들에게 말했다.
“이제 고려 봉자들을 공격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한반도 북부를 지배하고 있던 낙랑국을 무너뜨림으로써 남쪽으로 향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즉, 한강 이남을 지배하고 있는 대한국을 정복하는 게 가능해진 것이었다.
대한국만 무너뜨리면 한반도 전체가 요동국의 땅이 될 것이기에 공손태는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비록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공손태는 또다시 군사를 일으켜 남진에 나설 생각이었다.
“명령만 내려 주신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빵즈 놈들을 요동국의 노예로 만들겠습니다!”
“이번에는 저를 보내 주십시오. 반년 안에 점령하겠습니다.”
“저, 성무도 있습니다!”
요동국의 장수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자신을 주장으로 임명시켜 달라고 말했다.
언제나 치열한 충성 경쟁이 벌어지는 요동국의 군부에서 전쟁이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였다.
장수들로선 주장의 자리를 욕심내지 않을 수 없었다.
“고려 봉자를 칠 때는 내가 친정할 것이다.”
하지만 공손태는 말했다. 이번 전쟁은 자신이 직접 지휘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자 장수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요동국에서 공손태의 권위란 절대적인 것. 누구도 공손태가 결정한 일에 이견을 내세울 수 없었다.
“고려 봉자들에게 선전포고는 하였겠지?”
“예, SNS나 고려 봉자의 사이트에 선전포고문을 올렸습니다. 게시물 수백 개로 도배하였으니 보지 못했을 가능성은 없을 것입니다.”
“일본 때문에 졌다는 핑계는 댈 수 없겠군.”
요동국은 대한국을 침략하기에 앞서 전쟁을 선포하였다. 인터넷에다 침략 날짜, 침략 규모, 침략 이유 등을 적어서 올린 것이었다.
그들이 신사적이라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단지 그들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변명의 여지를 없애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대비하고도 막을 수 없는 군대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마.’
* * *
오크족의 습격은 중앙군이 어떻게든 막아 내겠지만 문제는 요동국과의 전쟁이었다.
요동국이 예고한 날짜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황.
중앙군만으로 요동국을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최진수와 신경전을 벌일 시간이 없다.’
하루빨리 수도로 돌아가야 하는 만큼 신라와의 협상을 오래 끌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기에 호영은 간부 회의를 마치자마자 최진수를 찾았다.
협상을 끝내기 위함이었다.
“일본과의 전쟁이 끝나자마자 오크와의 전쟁이라니. 아, 중국과의 전쟁도 남아 있었죠? 동맹국으로서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최진수가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역시 요동국이 대한국에게 선전포고를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었다.
‘운 좋은 새끼.’
호영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황을 아신다니 이야기가 쉽게 풀리겠군요. 우리 대한국은 신라 측의 요구에 따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동백 왕국과 대현 왕국의 땅을 가지십시오. 우리는 경상도 북부만 가져가겠습니다.”
“흐흐,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예상했다는 듯 조소를 지으며 대꾸하는 최진수였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라고요? 그럴 상황이 아니실 텐데? 뭐, 어쨌든 들어는 봅시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조건을 달겠다는 호영의 말에 최진수는 조롱의 눈빛을 보냈다. 여전히 강한 척하고 있는 호영의 모습이 우습게 느껴졌던 것이다.
호영은 그런 최진수의 눈빛을 보았지만 개의치 않고 말했다.
“남작이 되십시오.”
“남작이라면?”
“대한국의 유일한 남작이 되시란 말입니다.”
순간 최진수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금 나보고 따까리가 되라는 말입니까? 허! 어이가 없네?”
호영의 말이 황당하게만 느껴졌는지 최진수는 분노하기보단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남작 위를 받으신다면 양측이 전쟁하게 될 가능성은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시스템적으로 제약이 생길 것이니 말입니다.”
“그래서요?”
“우리의 굳건한 동맹을 위해서라도 남작 위를 받으셔야 한다는 겁니다.”
헛웃음만 짓던 최진수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선 몸을 돌리며 말했다.
“하! 계속 들어 주었더니 말도 안 되는 개소리만 하시는군. 내가 그딴 개수작에 놀아날 것이라 생각하셨습니까?”
조금씩 멀어지는 최진수를 향해 호영이 묵직한 한마디를 던졌다.
“신중히 말하고 신중히 행동하는 게 좋을 겁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지금?”
“왕으로서 마지막이 될 수도 있으니까.”
“……!”
그의 얼굴에 당혹감, 모멸감, 분노 등 여러 감정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마지막에 남은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기세.
호영에게서 무지막지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그 기세는 무인들이 내뿜는 살기 수준이 아니었다.
마치 염력처럼 상대의 몸을 옴짝달싹 못하게 옥죄는 그런 기운이었다. 당연히 무공을 익히지 못한 최진수로선 감당할 수가 없었다.
“나의 힘이라면 신라쯤은 언제든지 멸망시킬 수 있다. 지금 당장이라도 말이야.”
“…….”
“작위를 얻는 것은 너로서도 나쁘지 않은 일일 것이다. NPC들이 배신할 확률이 극단적으로 줄어들 것이니 말이야. 그러니 불만을 가질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호영은 그 말만 남기고서 자리를 떠났다.
협박이 통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일까지 호영이 원하는 답변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때는 진짜 신라를 멸하면 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