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164화 (164/345)

# 164

‘목조건물에 건조한 날씨이건만 방화에 실패하다니. 내 생각보다 경계가 삼엄했다는 건가? 어찌 되었건 암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군.’

안 그래도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 암살이었는데 경계까지 삼엄하다면 굳이 무리하게 시도할 필요는 없었다.

차라리 나중을 기약하는 게 나을 것이었다.

이번에는 그냥 물러나기로 결정한 하지메가 등을 돌릴 때, 갑자기 뒤에서 소리가 났다.

“네가 바로 암살잔가.”

하지메의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그가 경악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니 거대한 덩치에 붉은 얼굴, 부리부리한 눈매와 긴 수염을 가진, 마치 삼국지의 관우처럼 생긴 사내가 창 하나를 들고 서 있었다.

‘오, 오니 전사장이 왜 여기에!’

일본은 대체로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면모를 보여 준다.

약자를 상대로는 더할 나위 없이 위압적인 모습을 보이면서도 강자를 상대로는 필요 이상으로 저자세를 취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이번 전쟁에서도 그것이 잘 나타났는데, 일본은 약자였던 한국에게 대패를 당하자 한국의 강자들을 신격화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일종의 정신 승리로서 한국에게 패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악귀 또는 신에게 패배한 것이라고 위안을 삼으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본에서 가장 신격화한 존재가 바로 이 두 사람이었다.

김천에서의 대회전에서 어마어마한 활약을 보였던 대한국의 국왕, 대진과 친위대의 대장, 초운.

일본은 이 두 사람을 각각 오니의 왕과 오니 전사장이라 부르고 있었다. 인간이 상대할 수 없는 신적인 존재로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물론 하지메는 상대가 신이나 악귀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단지 자신의 실력으로 상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따름이었다.

‘도망가야 한다.’

실력에서 밀린다면 해야 할 것은 한 가지였다.

이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

즉, 도주하는 것이었다.

결정을 내린 하지메는 신속하게 다리를 놀렸다. 민첩하기 그지없는 그의 몸은 벌써 지상으로 착지하고 있었다.

이제 낙법을 하여 착지 충격을 완화하고는 미친 듯이 달릴 일만 남았다. 제아무리 오니라 불리는 상대라도 속도만큼은 그를 따를 수 없으리라.

하지만 그때, 낙법을 하려던 하지메에게 무언가가 날아왔다. 하지메는 낙법도 하지 못하고 그 무언가에 얻어맞고 말았다.

“크헉!”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창.

하지메에게 날아온 것은 창이었다. 뒤에서 날아오는 화살도 웃으며 피해 낸다던 하지메가 무거운 창을 피해 내지 못해 얻어맞은 것이었다.

‘창이 총알도 아니고 뭐가 이렇게 빨라!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어서 도망쳐야 한다. 오니 전사장이 쫓고 있어.’

예상치 못한 공격에 당혹스러움을 느낀 하지메였지만 바로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정신을 일깨웠다.

이대로 있다간 암살에 실패하는 것은 물론이요, 수치스럽게 사로잡히고 마리라!

입술을 질끈 깨문 하지메는 몸을 일으켜 다시 도망을 시도하였다.

퍼억!

그러나 갑자기 하지메의 시야가 암전되더니 극심한 고통이 엄습하였다.

“얌전하게 잡힐 것이지.”

점점 멀어지는 정신을 느끼며 하지메는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 * *

“암살자는?”

“포획하였습니다.”

준기의 대답에 호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암살을 시도한 것인지 모르겠군.”

친위대가 지키는 곳으로서 그야말로 용담호혈과 같은 곳이었다. 암살자 따위가 뚫을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뭐, 준기보다 실력이 뛰어난 암살자라면 가능성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존재가 암살에 나설 가능성도 별로 없었고 애초에 지금 시대에 그런 실력자가 존재할 가능성도 없었다.

“마지막 발악이 아니겠습니까?”

준기의 무덤덤한 대꾸에 호영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모든 걸 잃었으니 오히려 발악을 안 하는 게 이상한 일이겠지. 더군다나 일본은 원래 닌자나 암살자 같은 족속들이 많으니까.’

조선 정벌을 주도했던 쇼니 가문은 이번 전쟁에서 그야말로 모든 것을 잃었다.

당주의 목숨, 가문의 병력, 전리품과 함선 등등.

한반도를 통일하면 쓰시마, 즉 대마도까지 공격할 예정이었으니 쇼니 가문은 결국 영토까지 잃게 될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지막 발악을 시도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물론 결과적으로 봤을 때 최후의 발악은 우습게 끝이 나고 말았지만 말이다.

“암살자를 한번 보고 싶은데? 어차피 고문해 봤자 로그아웃하면 별로 알아 낼 수 있는 것도 없을 테니 접속해 있을 때 만나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하고.”

고개를 주억거리던 호영은 흥미가 동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충구가 의심스럽다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안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닌자이지 않습니까?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릅니다. 친위대장의 실력이 뛰어나다지만 너무 쉽게 잡혔다는 점이 찝찝하게 느껴집니다.”

충구의 우려에 준기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군사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암살자의 태도가 의심스럽게 느껴지기는 합니다. 대놓고 지붕 위에 몸을 드러낸 것도 그렇고, 창에 얻어맞아 얼이 빠진 것도 그렇고 수준 높은 암살자라고 보기에는 어색한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 말에 호영은 흠칫하는 얼굴을 하였다.

‘확실히, 일본의 닌자들이라면 일부로 사로잡혀서 암살을 시도할 가능성도 없진 않다.’

회귀 전에도 일본의 닌자에 관해서 제법 들은 게 있었다.

한국에서도 전해질 만큼 일본 닌자들의 암살 수법은 다양하였고 괴상한 경우가 많았으니 말이다.

“알았다. 하긴,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기는 하지.”

“암살자들에 대한 심문은 정보부에 맡기는 것으로 처리하겠습니다.”

“그러도록.”

어차피 잠깐 흥미를 느꼈을 뿐,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굳이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호영은 그렇게 일본 암살자에 대한 이야기를 끝마치고는 새로운 주제를 꺼내 들었다.

“신라 왕국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지?”

“대현의 수도는 이미 함락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아마 오늘이나 내일쯤, 점령이 완료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슬슬 신라에 대한 문제를 처리해야겠군.”

“처음 계획했던 대로 진행하실 생각입니까?”

“계획했던 대로 흘러가는 상황에서 굳이 다른 선택을 할 필요는 없겠지.”

대한국은 전쟁에 참전하기 전부터 마스터 플랜이라는 것을 짜 놓았었다. 일본을 몰아낸 이후 한반도를 어떻게 통일할지를 계획한 것이었다.

사실 호영의 경우는 전쟁이 발발하기 전, 그러니까 일본군이 침략하기 전부터 대략적인 계획을 세워 두었다.

남들이 한창 충격과 공포에 휩싸이고 있을 때 그는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호영이 세운 계획은 지금까지 나름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순조로운 수준을 넘어섰다.

일본군을 몰아낸 것이야 괜찮다고 평가할 것도 없는, 지극히 당연한 성과였다. 비록 일본군이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병력을 동원했다고는 해도 일본 본토도 아닌 한국 땅에서 대한국을 이겨 내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보다 호영의 마음에 들었던 것은 계획했던 것보다 명성을 더 많이 얻었다는 점이었다.

호영이 한반도 통일 계획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바로 명성이었다. 일본군과의 전쟁에서 호영의 이름을 높이는 것.

일단 이름을 알려야지만 한국 유저들의 지도자가 될 자격이 생기게 된다.

그리고 호영은 이번 전쟁에서 확실하게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이제 센추리를 플레이하는 유저들 중에서 호영이라는 사람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정도였다.

명성 말고도 또 하나 얻은 것이 있었다. 바로 의병장들이었다. 호영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리더에게 필요한 자질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비교 대상이 있어 더욱 두드러졌는데 최진수의 무능함으로 인해 호영의 능력은 보다 빛을 발할 수 있었다.

의병장뿐만이 아니라 신라군의 장수들에게조차 마음을 얻게 된 것이었다.

‘유저들에게 이름을 알렸고, 의병장들의 마음을 얻었다. 신라의 국력도 적당히 깎아 줬어. 이대로 계획을 마무리하면 한반도는 나의 것이 될 거다.’

그에게 이제 남은 것은 계획을 마무리하는 것뿐이었다.

“신라를 압박하여 내부로부터 무너지게 만들어야 한다. 의병장들이나 우리 편에 서기로 결심한 영주들을 이용한다면 어렵지 않겠지.”

“내부 분열이 시작된 이후에는 어떻게 하실 의향입니까?”

“신라의 국력이 어느 정도 소진되면 그때는 우리가 직접 나선다. 약해진 신라를 단숨에 끝장내 버리는 것이야.”

계획의 마무리는 단순하였다. 바로 신라의 완전한 몰락이었다.

‘신라가 멸망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경상도를 정복할 수 없다.’

현재 대한국은 전라도를 정복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당연히 새로운 점령지를 늘리기에는 부담이 갈 수밖에 없었다.

신라가 안심하고 있는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었다. 제아무리 대한국이 군사 강국이라 해도 치안이나 식량 사정을 생각했을 때 내년이나 내후년이라면 몰라도 올해만큼은 평화를 유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 판단했을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만약 신라가 멸망한다면? 경상도에 남아 있는 나라가 없게 된다면 어떨까?

대한국은 얼마든지 경상도를 점령할 수 있었다.

이미 일본군에 의해 경상도의 인구가 크게 줄어든 상황.

구심점이 될 세력만 존재하지 않는다면 대한국의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해도 감당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신라를 멸망시키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였다.

호영이 말했던 것처럼 전후 협상 테이블에서 압박을 가한 후에 신라의 국론을 분열시키면 그만이었다.

우습게도 신라의 여론은 대한국의 편이었기 때문에 내분을 조장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전후 협상을 할 때 신라의 왕, 최진수에게 남작이나 기사 작위를 하사하는 건 어떨 것 같습니까?”

충구의 뜬금없는 말에 호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작위를 하사하라고? 굳이 왜?”

“최진수를 도발하기 위함입니다.”

“…….”

호영은 여전히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자 충구가 설명을 해 주었다.

“최진수는 자존심이 무척이나 강한 사람입니다. 만약 전하께서 기사 작위를 하사하겠다고 선언하면 왕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최진수로선 전하의 아랫사람이 된 것으로 여기며 불쾌해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성을 잃어 협상 결렬을 선언할 수도 있습니다.”

“협상 결렬이라……. 그건 전쟁하자는 뜻이나 마찬가지인데?”

동맹국으로 참여한 만큼 대한국이 신라에게서 받아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라가 일방적으로 협상 결렬을 시도한다면 그것은 전쟁을 선언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명분도, 실리도 없는 아주 멍청한 행동이라는 뜻이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시도해 봤자 손해 볼 것은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저는 최진수의 성정을 생각했을 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처구니없는 제안이었지만 확실히 충구의 말처럼 시도한다고 손해 볼 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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