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
즉, 무공을 익힌 사무라이들 대다수가 ‘왕의 권한’을 통해 ‘기사의 권한’을 하사받은 특권층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신선조 같은 낭인 집단에 속한 무인들은 예외였다.
“본가의 기사들과는 수준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무공을 익힌 자들인 것은 분명합니다.”
“흠, 빌어먹을 상황이군.”
스케모토는 혀를 차고 말았다.
솔직히 조선과의 전쟁에서 가장 불안했던 게 대한국의 참전이었다. 그가 조사했던 대로라면 대한국의 전력은 혼슈의 전국대명 이상이었으니까.
그래서 처음 ‘정한론’을 계획하였을 때도 조선을 정복하겠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었다.
조선은 공격하나 점령하지는 않는 것.
그것이 스케모토가 세운 목표였다.
정한론이란 어디까지나 일본 유저들을 끌어모으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던 것이다.
어쩌다 신선조가 끼어들었고 진짜 조선을 정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지만 스케모토의 생각은 여전하였다.
대한국, 바로 이자들 때문에라도 조선 정복은 힘들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오늘 구키의 1군단이 패배하면서 스케모토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기사에 버금가는 실력자가 무려 오백!
고작해야 열 명도 안 되는 기사를 보유하고 있는 스케모토의 입장에선 대한국의 전력은 그야말로 경악스러울 따름이었다.
‘무조건 퇴각해야 한다.’
스케모토가 속으로 그런 결정을 내릴 때, 옆에서 거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소, 총대장.”
“키요시 육군 대장.”
조선 정벌군 안에서 총대장이자 쇼니 가문의 당주인 스케모토를 상대로 거만을 피울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사내의 정체는 바로 신선조 제1번대 조장이자 조선 정벌군의 육군 대장을 맡고 있는 키요시 루조였다.
“우리 신선조가 있는데 무엇이 걱정이오?”
일개 낭인 집단, 그것도 국장이 아닌 조장에 불과한 키요시 루조였지만 의외로 그의 지위는 일본에서 상당히 인정받는 편이었다.
신선조의 간부들이 전부 야쿠자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센추리 안에서 행사할 수 있는 힘만 따져도 신선조는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일본에서 무인들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것이 바로 신선조였기 때문이다. 봉지, 작위만 없을 뿐, 신선조는 다이묘 가문을 능가하는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루조가 쇼니 가문의 당주인 스케모토를 상대로 이런 태도를 취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신선조의 무력을 믿고 있어서였다.
“아니면 우리 신선조를 믿지 못하는 것이오?”
스케모토는 루조의 거만한 태도에 불쾌감을 느꼈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서 말했다.
“……적에겐 중급 어쩌면 상급 루닌일 수도 있는 기사급의 무인이 오백 명이나 있소. 본대에는 더 많을 수도 있고. 그런데도 걱정을 안 할 수가 있겠소?”
“검법의 수준이 낮고 역사도 짧은 조센징들이야 아무리 강해 봤자 중급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오. 그리고 중급이 수백 명 있다고 해도 우리 신선조에게는 상대가 안 될 것이고.”
“대부분이 하급 루닌이고 중급 루닌 이상은 1번대만 온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오?”
“총 여섯 개의 번대가 왔소.”
“그렇구려. 삼백 명이라……. 처음 들었소.”
“뭐, 지금까지는 이야기 할 기회가 없었으니까. 적의 수준이 수준이었지 않소? 하하하!”
스케모토가 미간을 찌푸렸지만 루조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하, 고용주도 모르는 기사급의 전력이라……. 어처구니가 없군. 신선조, 네놈들은 도대체 무엇을 노리고 이 정도의 전력을 동원한 것이냐?’
신선조에는 공식적으로 열 개의 번대가 있었다. 물론 이것은 공개적으로 밝힌 번대들을 말하는 것이고 비공식적으로는 그보다 더 많다는 소리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어쨌든 간에 여섯 개의 번대를 동원하였다는 것은 신선조가 이번 전쟁에 60퍼센트 이상의 전력을 투입했다는 사실을 의미하였다.
아직 문명의 발전도 덜 되어 있어 전리품을 얻는 것도 제한되는 한국 땅에 절반 이상의 전력을 투입했다? 그것도 고용주에게 알리지 않은 채?
이것은 신선조가 스케모토와는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설마…… 진심으로 조선을 정복하려는 것인가.’
말도 안 되는 추측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대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만 한다면 1천 명 이상의 루닌을 동원한 신선조가 한국을 정복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기사급의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중급 루닌 이상의 무인들도 삼백이나 되었으니 말이다.
* * *
“지원을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같은 한국 유저끼리 도와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동맹이잖습니까?”
최진수가 악수를 건네며 감사 인사를 전하자 호영은 떨떠름한 기색을 숨기고 웃는 얼굴로 화답해 주었다.
그러자 최진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는데 호영이 자신을 막 대하지는 않을지 걱정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아랫사람 대하듯 하대하고 싶지만 나는 너처럼 사적인 감정으로 일을 그르치는 사람이 아니라서.’
아무래도 최진수와의 인연이 인연이다 보니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최진수는 호영과 악연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호영은 속내를 숨기고 최진수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었다.
같은 한국 유저로서 일본의 만행을 저지하기 위해 도와주는 선량한 동맹군을 연기하기 위함이었다.
‘이번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명분을 얻는 것이다.’
유저들 사이에서도 명분은 중요하였다. 한국 유저들이 반일 감정을 적극적으로 표출하고 있는 것처럼, 어떤 명분을 가졌느냐에 따라 유저들의 지지가 천차만별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호영은 이번 전쟁에서 명분을 얻고자 하였다. 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될 수 있는 명분을 말이다.
외적을 무찌르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다면 어느 정도의 명분을 얻게 될 터.
그래서 호영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적군이 바로 수도 인근까지 진격했다고 들었습니다.”
호영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최진수는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제아무리 공공의 적, 일본을 상대하기 위해 동맹을 맺었다지만 나라가 다른 이상 조율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병력의 분배도 그렇고 물자 보급이나 전후의 영토, 전리품 따위도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호영은 오직 전쟁만을 생각한다는 양 일체의 협상 과정도 없이 곧바로 본론에 들어섰다. 최진수로선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껍게 느껴졌을 것이었다.
신라가 약소국인 이상 협상에서 유리한 것은 대한국이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신라의 모든 것은 나의 것이 될 테니 사소한 이야기를 길게 나눌 필요는 없다.’
협상을 아예 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호영은 되도록 대범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하였다. 작은 것보다는 큰 것을 노리기 위함이었다.
“그, 그렇습니다. 짐이, 아니 제가 듣기로 이틀 안에 적군이 수도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적절한 시점에 도착하는 것 같군요.”
“흠흠, 신라의 의병대가 일본군의 진격 속도를 늦추는 데 크나큰 역할을 했습니다.”
최진수가 자부심 어린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호영은 조소를 지었다.
‘민병대의 희생으로 간신히 막아 내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다니.’
신라가 일본군의 공세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애국심 넘치는 한국 유저들의 자발적인 희생 덕분이었다.
마치 임진왜란에 있었던 의병 투쟁처럼 한국 유저들은 목숨을 잃는 것도 불사하고 일본군의 공세를 막아 냈던 것이다.
‘최진수, 너의 그 한심한 모습을 보니 의병대가 나를 따르게 될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구나.’
이 전쟁이 끝나면 유저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었다. 외세의 침략을 막아 내기 위해서라도 한국에 강한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호영만큼 지도자에 어울리는 사람은 없었다.
* * *
다음 날 오후가 되자 수천에 달하는 일본군이 수도 인근에 도착하였다.
“병과가 다양해 보입니다.”
“검만 사용할 줄 알았는데 창병이나 궁병이 생각 이상으로 많습니다.”
“숫자는 우리보다 적은 것 같습니다. 2,500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참모들이 저 멀리 보이는 일본군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분석하기 시작하였다.
가장 먼저 병력의 규모를, 그 이후에는 병종이나 사기 같은 것을 파악하였다.
그리고 파악이 대충 끝나자 충구가 호영에게 그 결과를 보고하였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아군이 미세하게 유리합니다.”
“신라군이 포함되었는데도 조금밖에 유리하지 않다고?”
“그렇습니다. 일단 훈련도 차이가 너무 큽니다. 아무래도 아군의 병력들은 대다수가 의병이나 용병이어서 어쩔 수 없습니다.”
“왕실 정보부에서 파악하기를, 적군도 대다수가 용병이라 하였는데?”
“같은 용병이어도 일본 용병과 한국 용병은 질 자체가 다릅니다. 적군의 병종부터 보시면 아시겠지만 일본 용병은 한국 용병과 달리 용병이라고 폄하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용병들이 이 자리에 있다면 기분 나빠할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호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하였다.
한국 유저들은 대다수가 센추리를 3회 차부터 시작하였으니 전투력이 아무래도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1, 2회 차부터 호영의 친위대로서 활동했던 로열패밀리 같은 경우는 무시무시한 수준의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병종에서도 밀리고 조직력에서도 밀립니다. 아군이 미세하게나마 유리하다고 보는 이유는 아군의 병력이 적군에 비해 조금 더 많고, 전하와 전하의 친위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충구의 말에 호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결국 아군에게 유리한 것은 병력의 규모와 친위대밖에 없다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 친위대조차도 신선조나 다른 낭사조에서 참전하였다면 100퍼센트 이길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다.
그는 일본의 3대 낭사조가 가진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미세하게 유리하다면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만들어야겠군.”
호영은 쓴웃음을 지우고는 그렇게 말했다.
“생각해 놓으신 방도가 있습니까?”
“오랜 행군을 하였으니 적군은 분명 지쳐 있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 밤, 야습한다.”
“……!”
참모들은 눈을 크게 떴고 장수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적군은 야습을 대비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야간전투 훈련을 받은 적도 없고 밤눈이 밝은 것도 아닌, 전쟁 용병들이 저희의 통제에 따를 수 있을지가 의문입니다.”
적극적으로 이견을 내세운 사람은 두 명이었지만 나머지 간부들도 반대하는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모두가 야습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호영은 그런 간부들의 우려를 일축시켰다.
“용병들은 야습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적군이 대비하고 있어도 문제 될 것은 없다. 내가 직접 친위대를 이끌 것이니까.”
“……흐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