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
즉, 시설 독점권이나 영주 재판권 그리고 영지 내공권 따위의 특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특권들로 인해 대한국의 기사들은 왕족들의 세상이 된 이후에도 강력한 세력을 보유할 수 있었다.
자신의 봉토에서는 왕 이상의 권력을 가지니 세력을 유지하는 것쯤은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장원은 달랐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비슷하게 바뀔 수밖에 없겠지만 어찌 되었건 장원은 봉토에 포함되었던 특권 대부분이 회수된 경우였다.
그렇다 보니 중앙에서 보낸 지방관의 눈치를 살펴야 했고, 농민들을 강제로 장원의 농노로 만드는 것에도 제약이 따랐다.
장원이 가진 장점은 결국 세금을 적게 내는 것과 상인들에게서 자릿세 또는 통행세를 받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장원에 포함된 공공시설을 공짜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뿐이었다.
물론 이조차도 지방에서는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권력이었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건 장원을 하사한다면 공신들의 불만을 최소화할 수 있을 거야. 봉토 문제는 대충 해결된 셈이지.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폐세자의 처리 문제인가.’
생각이 폐세자, 이향에게까지 미치자 호영은 곧장 명회를 불러들였다.
최근 들어 수상쩍은 행동을 보여 주는 명회였다. 특히 이향을 변호하거나 옹호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 주고 있었다.
이향을 어찌 처리할 것인지를 결정하려면 명회와 상의할 필요가 있을 듯싶었다.
“어디를 갔다 왔느냐?”
“폐세자를 잠시 관찰하고 왔습니다.”
호영의 물음에 명회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였다. 그러자 호영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야인이 된 그에게 아직도 관심을 두는 것이냐?”
“누군가는 만약을 대비하여 주의 깊게 살펴야 하지 않겠습니까?”
“즉, 폐세자를 감시했다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망설임 없이 대답하였지만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감시했다는 것이 거짓말이라는 증거였다.
호영은 그런 명회를 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그래도 폐세자에 대한 처리를 고민하였는데 이참에 결정해야겠구나.”
“…….”
“폐세자를 제거해야겠다.”
폐세자 이향을 제거해야겠다는 호영의 말에 명회가 경악하는 얼굴로 외쳤다.
“저, 저하!”
“그렇게 놀랄 일인가?”
“이제 곧 있으면 즉위식이 열리지 않습니까? 이 같은 경사스러운 순간에 어찌 피를, 그것도 왕족의 피를 본다는 말씀이십니까? 부디 재고하여 주시옵소서.”
“후환거리를 남겨 둘 필요가 있겠느냐? 너도 만약을 대비해야 한다면서?”
“저하께서 왕위에 오르신다면 만약을 대비할 필요도 없어지게 됩니다. 대한국의 역사에서 그 누구도 왕의 권위에 도전한 사람이 없었지 않습니까? 과거에 인망이 있었던 폐세자라고 다를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가?”
명회의 말에 호영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다른 말이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더더욱 제거해야 될 것 같구나.”
“……!”
“그 누구보다 강력한 개혁을 원했던 네가 폐세자로 인해 마음이 약해질 때부터 느꼈다, 폐세자는 왕국의 발전에 방해가 될 것이라고.”
사실 호영도 이향 때문에 마음이 약해진 적이 있었다.
어쨌거나 이향은 그의 후손이었으니 애정이 없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서 이향은 대한국의 발전에 방해가 될 존재였다. 훗날의 후환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였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과감한 선택을 할 필요성이 있었다.
비록 이향의 재능이나 사상이 선조로서 자랑스러울 정도여도 나라를 위해서라면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소, 소신은 그저 불필요한 희생을 우려하였을 뿐입니다. 결코 개혁에 반대하겠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변명할 필요는 없다, 이미 나는 결정을 내렸으니.”
명회는 입술을 열었다 닫었다 하기를 반복하였다. 반론을 제기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호영은 그의 반론을 기다리지 않은 채 말했다.
“물론 그렇다 해서 지금 당장 폐세자를 제거하겠다는 말은 아니다. 시작은 폐세자의 파벌을 숙청하는 것이다.”
“……그들을 결국 숙청하시려는 것입니까?”
“4년 뒤에 어떤 변수가 될지 모르니 당연한 선택이다.”
호영의 단호한 답변에 명회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로서는 안타까운 심정일 것이었다. 뒤늦게 이향의 사상에 감화되어 어떻게든 이향의 사람들을 지키려 노력하였던 명회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호영은 그의 심정을 신경 쓰지 않고서 말을 이어 나갔다.
“나는 계속해서 폐세자를 궁지로 내몰 것이다. 파벌의 숙청이 끝나면 그의 자식들을 노릴 것이고, 그 이후에는 그의 처가와 외가를 노릴 것이다. 그렇게 폐세자를 궁지로 몰다 보면 폐세자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
“물론 끝까지 광인을 연기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때는 내가 직접 손쓸 것이다. 완전히 끝을 내는 거지.”
“꼭…… 꼭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순간 호영의 눈썹이 한차례 꿈틀거리더니 한층 더 무거워진 목소리를 뱉어 냈다.
“나를 말릴 생각이라면 이대로 내 곁을 떠나는 걸 추천하겠다. 결정을 내리기 전이라면 그 어떤 반론도 들어 주겠지만 이미 폐세자에 대한 처리는 결정을 내린 상태다.”
“하, 하나…….”
“반론은 듣지 않겠다고 말했을 텐데.”
호영이 낮지만 강한 힘이 실린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니 명회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너는 이제 결정해야 될 것이야. 나의 곁에 남아 폐세자의 잔재를 척결할 것인지, 아니면 나의 곁을 떠나 폐세자의 몰락을 그저 지켜보기만 할 것인지에 대해서.”
선택을 강요하는 호영의 말에 명회는 그저 입을 굳게 다물 뿐이었다.
* * *
가을이 끝날 무렵, 즉위식이 열렸다.
시간이 촉박하였기에 제대로 홍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열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즉위식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수도의 백성들이 전부 구경하러 온 것 같았습니다.”
“지방에서부터 즉위식을 구경하겠다고 상경한 사람들이 적지 않던데요?”
“유저들은 반 이상이 모였다고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마 이번 즉위식을 기점으로 새로 유입되는 유저 수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행사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로열패밀리의 간부들이 저마다 즉위식에 대한 감상을 늘어놓았다.
즉위식은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비록 대한국이 사치를 멀리하는 풍조를 가지고 있고 또, 호영부터가 허례허식을 좋아하지 않는 성정이라 행사 자체는 성대하게 치러지지 않았지만 모여든 인파나 사건 사고 같은 것을 고려하였을 때 즉위식은 성공적이라고밖에 평가할 수 없었다.
특히나 인파의 규모는 입이 떡 벌어지는 수준이었는데, 즉위식을 구경하기 위해 모여든 인파의 규모가 3만이 족히 넘었다. 백성들에게 제대로 알리지도 않았는데도 그 정도의 인파가 모여든 것이었다.
“그만큼 저하의 통치가 기대된다는 뜻이 아닐까요? 유저들에게나 NPC들에게나 말입니다.”
충구의 한마디에 간부들이 흥분한 표정으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간부들의 입장에서도 3만이 넘는 인파의 규모는 호영을 향한 민심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백성들에게 성군이라 불렸던 노왕이 퇴위하는 날임에도 기쁘다는 양 웃고 떠들던 인파의 모습을 생각하면 말이다.
‘사실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나의 통치를 기대할 수밖에 없겠지. 내가 성군이라서가 아니라, 소왕국 동맹을 징벌한 전쟁 영웅이자 왕국의 변혁을 꾀하는 개혁가이니까.’
어떻게 보면 아부라고 할 수 있는 말을 들었음에도 호영은 필요 이상으로 들떠하지 않았다.
그저 냉철하게 민심이 자신을 향하고 있는 이유를 생각할 따름이었다.
왕세자로서 국정을 대신 운영할 때 호영은 이 나라를 근본부터 철저하게 개혁시켰다.
일종의 노예 내지는 농노화되어 가던 빈농들을 자영농으로 전환시켰고, 조세제도를 뜯어고쳐 세금을 법령으로 정한 비율에 한해서만 징수할 수 있게 만들었다.
또한 부역이나 군역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보상을 해 주었으며, 기사와 호족들의 특권을 회수함으로써 농민들의 권리를 인정할 수 있는 법적 조치를 마련하였다.
여기에 모험가 조합을 시켜 마을이나 지방 도시의 치안을 위협하는 도적 떼나 마물 따위도 처리해 주기도 하였다.
가진 자들의 입장에서는 하나같이 반발할 수밖에 없는 개혁이고 또 그래서 반란이 네 번이나 일어난 것이었지만 일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지지할 수밖에 없는 개혁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즐거워하는 기색으로 호영의 즉위식을 반겼던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백성들의 지지가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라 확신하는 것은 바보 같은 행동이야. 지금 당장은 민심이 나쁘지 않지만 그동안 알게 모르게 특혜를 받아 왔던 수도의 백성들부터 소왕국 부흥을 꾀하는 충청도의 백성들까지, 민심이 이반할 소지는 많이 남아 있어.’
호영이 가진 최고의 강점은 바로 이것이었다.
어떤 순간에서도 해이해지지 않는 것.
이제 왕이 되었으니 부귀영화를 누려도 좋았지만 그는 변함없이 초심을 유지하였다.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강철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의 사신들도 찾아왔다 들었는데?”
호영은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건조한 목소리로 물음을 던졌다. 그러자 간부들도 들뜬 기분을 가라앉히고 회의에 집중하였다.
“예, 전라도와 경상도 그리고 강원도의 수인족이 사신을 보내왔습니다.”
“소왕국 동맹에 소속되어 있었던 나라에서도 사신을 보내왔다던데 사실인가?”
“신라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경상도에서 찾아온 신라가 본래 진한이라는 국명을 사용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에 호영은 실소를 지었다.
‘최명헌이 세웠어야 할 신라를 동생인 최진수가 세우게 되었군. 참으로 우습게 되었어.’
만약 최명헌의 신라였다면 경계해야 마땅했겠지만 최명헌의 신라다 보니 딱히 위협이 된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저 역사의 변화가 재미있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내가 접견하기 전까지, 사신들을 잘 대접해 주도록. 남아도는 철제 무구를 비싼 값에 사려는 호구들이니까.”
호영의 말에 간부들이 피식 웃었다.
두 지역의 사정을 생각하면 호구라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대한국의 입장에서는 그저 호구일 따름이었다.
잡철로 만든 하급 무구를 주고 값비싼 식량을 얻어 오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장원에 대해서는 다들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
“…….”
호영이 갑작스럽게 민감한 문제를 꺼내 들자 간부들은 잠시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침묵하였다.
그들이 상관없는 입장이라면 모를까, 그들 역시 공신이다 보니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분위기가 가라앉은 그때, 충구가 불쑥 말문을 열었다.
“솔직히 마음에 들지는 않습니다. 아무래도 2회 차보다는 보상이 약하다고 생각됩니다.”
“음?”
“대, 대군사님!”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불평을 늘어놓는 충구를 보며 간부들은 크게 당혹해하였다.
군대만큼은 아니지만 센추리의 특성상 경직된 조직 체계를 갖출 수밖에 없었다. 유저들 사이에서도 위계질서가 명확하게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