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
이어지는 원재의 보고에 호영은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불쑥 물었다.
“생각보다 진압이 빨랐는데 죄 없는 이를 죽인 경우는 없었겠지?”
“그렇습니다. 전투력의 차이가 워낙 압도적이라 여유롭게 적아를 구분하였다고 합니다. 참고로 반란군에 의해 포로로 잡혀 있던 호족들은 무사히 귀가시켰습니다.”
“살아남은 호족의 숫자는 어느 정도야?”
“대략 스무 명 정도인데, 그중에 저희 로열패밀리 소속이 다섯 명입니다.”
반란군 진영에는 유저도 있었다. 일종의 첩자를 파견시킨 격인데, 호영이나 다른 간부들이 호족들의 반란을 시큰둥하게 여긴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호족들이 일으키려던 반란은 처음부터 유저들에 의해 낱낱이 파악되고 있었던 것이다.
“한동안은 반란을 걱정할 필요가 없겠군.”
“어쩌면 3회 차가 끝날 때까지 반란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니, 그건 아닐 거다. 경상도나 전라도를 점령한다면 그곳에서도 반란이 일어나게 될 것이니까.”
“그렇군요.”
지나치게 앞서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대한국의 국력을 생각하면 경상도와 전라도를 점령하는 것도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두 지역을 점령하는 것은 언제든지 가능할 정도.
다만 지금은 시기상조여서 내년이나 내후년으로 잠시 미루었을 따름이었다.
“동 상단주가 주장했던 두 지역과의 교역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지?”
“전라도의 경우는 강화도에서 생산한 함선을 통해 이제 막 교류를 시작하였습니다.”
강화도는 불과 두 달 전에 대한국의 영토가 된 섬이었다.
본래 경상도나 전라도처럼 여러 군웅들이 할거하던 강화도지만 대한국이 약간의 병사를 보내자 순식간에 정복되었다.
현재의 강화도는 조그만 조선소가 설치되면서 대한국의 조선 및 해상권을 담당하는 섬이 되었다. 아마 3회 차가 끝날 때까지는 대한국에서 나름 중추적인 역할을 맡게 될 것이었다.
물론 나중이 되면 현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해도로서 해군 기지 또는 수도를 해상에서 방어하는 요새 섬에 불과해지겠지만 말이다.
“교류의 결과는?”
“아직 시작 단계라 보고드리기가 조심스럽지만, 꽤나 성공적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하께서도 알고 계시겠지만 전라도는 여전히 흑요석이나 돌도끼를 무기로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가장 강성한 세력조차도 잡철로 만든 무구를 사용할 정도로 무기의 질이 형편없습니다.”
“대한국의 철제를 구입하지 않을 수 없겠군. 패권을 차지하려고 서로 치열하게 다투고 있으니 말이야.”
“제가 성공적이라 판단하는 근거도 바로 그것입니다. 처음 저희를 경계하던 전라도 군주들이 철제 무구를 얻기 위해 앞다투어 접촉해 오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그들은 스스로 을을 자처하게 될 것입니다.”
“잘되고 있어. 그렇다면 경상도 지역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지?”
“경상도 지역은 아직 진출하지 못한 상황입니다. 우선 전라도 지역과의 교역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이후에 경상도로 진출하겠다고 동 상단주가 말했습니다.”
“그래? 동 상단주라면 알아서 잘하겠지.”
동 상단주, 즉 동휘는 2회 차 때 이미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였다. 무수한 수인족을 대한국에 귀부하게 만듦으로써 자신의 실력을 증명한 것이었다.
3회 차에도 동휘의 활약은 이어졌다. 조합 직속의 상단을 만들자는 것도 동휘의 주장이었고 경상도, 전라도와 교역하자는 것도 동휘의 주장이었다.
또한 지금의 상단을 만들어 낸 것도 동휘였다.
이제는 그 누구도 동휘의 실력을 부정하지 못하였다. 호영 역시 동휘를 전적으로 신뢰하였고 말이다.
“기근도 해결되었고 외교 문제도 해결되었다면 이제 남은 문제는 내정인가?”
가장 급선무였던 식량난은 충구의 재치와 김성근의 행동력으로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황해도를 약탈함으로써 부족했던 식량을 제법 확보하였던 것이다.
외교에 대해서도 상단을 보냄으로써 대략이나마 해결했다고 볼 수 있었다. 아직 경상도와는 교류조차 시도하지 않았지만 전라도에서 있었던 교류의 결과를 보면 경상도와의 교류도 성공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 외에 북한이나 수인족에 관련해서도 거의 해결한 것이나 마찬가지야.’
군사 부문도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인해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북한은 이미 돌격대에 의해 세력이 축소된 상태이고 수인족의 경우도 다시 강력해진 대한국의 국력을 보고 움츠러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 남은 것은 호영이 말했던 것처럼 국내의 정치, 즉 내정뿐이었다.
“내정에 대해서는 일단 양위가 가장 중요할 것 같습니다. 노왕이 갑자기 변덕을 부려 양위를 취소한다면 아무래도 분란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니 말입니다.”
“오늘 조회에서 왕이 선언하였다. 나에게 왕위를 양위하겠다고. 노망이 나지 않는 한, 변덕을 부릴 일은 없을 것이니 양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다.”
불과 며칠 전에 문안 인사를 할 때 호영에게 대놓고 양위 의사를 밝혔던 노왕이었다.
그리고 오늘 마침내 노왕이 대소신료들이 참석한 조회에서 공개적으로 양위를 선언하였다. 이제 호영의 왕위 계승은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었다.
물론 노왕이 갑자기 변덕을 부린다면 변수가 생길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하면 즉위식을 준비해야겠군요.”
“2회 차의 경험이 있으니 어렵지는 않겠지.”
“그때보다는 성대하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라의 국력이 달라졌는데.”
원재의 말에 호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왕이 아직 살아 있다. 즉위식을 성대하게 해 봤자 득 될 것은 아무것도 없어.”
“그렇습니까? 저하의 뜻이 그렇다면 적당한 수준으로 즉위식을 준비하겠습니다.”
“날짜는 겨울이 오기 전에 하는 것이 좋을 거야.”
“너무 촉박하지 않겠습니까?”
“허울뿐인 행사에 긴 시간을 투자할 생각이 없다. 중요한 것은 왕위지 즉위식이 아니니까. 아무튼 즉위식은 그렇게 하는 것으로 하고 다른 문제는 또 뭐가 있을 것 같나?”
“즉위식 하니까 생각나는 건데, 아무래도 공신들의 포상 문제에 대해 결정을 내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포상? 정확히 어떤 것을 말하는 거지?”
“2회 차처럼 즉위식 행사 때 작위 수여식을 하실 거잖습니까? 공신들 중에 작위 수여식 때 봉토까지 수여하지 않을까, 기대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2회 차 때처럼 말입니다.”
“봉토를 하사한 결과가 어땠는지를 알면서도 영주가 되기를 희망하는 유저가 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전쟁에서 공을 세운 용병들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로열패밀리 안에서도 조금씩 영주가 되고 싶어 하는 유저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영주라…….”
호영은 말끝을 흐리며 잠시 침묵의 시간을 가졌다.
‘확실히 언젠가는 결론을 내야 할 문제이기는 해. 현실에서 상당한 보상을 받은 로열패밀리 유저들조차 지쳐 가는 분위기이니 말이야.’
이미 세계 각국은 봉건제가 주류였다. 애초에 ‘왕의 권한’이라는 스킬부터가 봉건제를 의도하였다.
즉, 센추리의 시스템에 의해서라도 자연스럽게 봉건제를 지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보니 대한국의 유저들도 영주 같은 독립적인 세력가가 되기를 희망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었다.
용의 꼬리가 되느니 뱀의 머리가 되겠다는 말처럼, 중앙의 실력가로 군림하는 것보다 지방의 절대자로 군림하는 게 일부 유저들에게는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이니 2만에 가까운 유저를 휘하에 둔 호영으로선 고민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나라고 유저들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야. 솔직히 내가 일반 유저라도 왕이 되지 못한다면 영주라도 되고 싶어 할 것이니까. 공신들이라면 말할 것도 없고.’
하지만 지방에서 조금씩 형성되기 시작한 봉건주의를 완전히 해체시킨 것이 불과 얼마 전이었다.
왕족들과 기사들 그리고 최근에는 호족들까지 숙청함으로써 대한국은 진정한 중앙집권 체제의 기틀을 갖추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봉건제로 회귀한다?
대의명분이 훼손되는 것도 훼손되는 것이지만 다시 중앙집권 체제를 되돌아가려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어려운 길을 걸어야 할 것이었다.
어쩌면 완전히 불가능할 수도 있고 말이다.
그렇기에 호영은 가능하면 중앙집권 체제를 이어 가고 싶었다. 말 그대로 ‘가능하다면’ 말이다.
“물론 반대로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바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윤원목 감찰관처럼 말입니다.”
그때 원재의 목소리가 호영의 상념을 깨뜨렸다.
호영은 고개를 번쩍 들고는 원재에게 물었다.
“넌?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저야 당연히 지금보다 강력한 중앙집권을 원합니다.”
일체의 고민도 없이 즉답하는 원재를 보며 호영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변함없는 그의 모습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가장 지쳤어야 할 사람은 사실 원재인데 말이야.’
현실에서든 센추리에서든 워커홀릭처럼 그 누구보다 열심이던 원재다. 지쳤다는 이유로,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영주가 되어야 한다면 원재는 최소 충청도 크기의 영토를 가졌어야 했을 것이다.
충구와 더불어 그는 대한국의 일등 공신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저나 윤원목 감찰관만의 생각이 아닙니다.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원하는 유저들은 의외로 많습니다. 특히 전투대에 소속되어 있는 유저들은 전제군주제와 중앙집권 체제에 열성적입니다.”
맞는 말이었다.
3회 차에 합류한 유저들이, 즉 돌격대의 병사들이 최근 들어 물을 흐리고 있었지만 2회 차 때 호영에게 충성을 바쳤던 유저들은 여전히 전제군주제를 열성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지도자로서 누가 옳은지를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맞아. 나에게는 로열패밀리가 있다. 비록 조금씩 흔들리는 유저들이 생겨나고 있지만 적어도 반란을 일으키면서까지 영주가 되고자 하는 유저는 없어. 즉, 3회 차인 지금은 안심해도 된다는 뜻이야.’
지나치게 희망적인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호영은 자신의 수하들을 믿었다. 아니, 자신이 만든 환경을 믿었다.
현실과 긴밀하게 연계된 작금의 상황에서 같은 빌라 단지에 살아가는 수하들이 호영을 배신하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물론 ‘대외 협력 팀’에 소속되어 있는, 금수저들이라면 독한 마음을 먹을 수도 있겠지만 일부로는 대세를 거스를 수가 없었다.
그러니 지금은 중앙집권 체제를 이어 가는 게 현명하였다.
불평불만의 소지가 계속 남게 되는 셈이지만 봉건제를 선택하여 나중에 후회하는 것보단 백배 천배 나은 일이었다.
“공신들에 대한 포상은 2회 차 때와는 다르게 하겠다.”
봉토를 하사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 * *
‘봉토 대신 장원을 준다면 공신들의 불만을 최소화할 수 있겠지. 뭐, 대신 땅의 크기는 늘려 줘야 하겠지만 말이야.’
장원과 봉토.
중세 유럽에서는 사실 장원과 봉토는 같은 뜻으로 쓰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대한국의 장원은 뜻이 조금 달랐다.
호영이 2회 차 때 최측근 유저들과 NPC들에게 하사하였던 봉토는 규모가 조금 작을 뿐, 봉건제의 영주가 지배하는 영지와 다를 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