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
“이참에 배은망덕한 역적의 씨를 완전히 제거하겠습니다. 그러니 걱정을 놓으시지요. 더 이상의 반란은 없을 겁니다.”
“…….”
왕이 말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지는 않았다. 호영의 독단적이고 강압적인 국정 운영에 대해 경고하거나 어떠한 가르침을 내리려고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호영은 왕의 의도를 완전히 무시하였다.
그는 지금 하고 있는 개혁을 멈출 생각이 없었고 이제 와서 다른 왕족이나 기사들과 상의하며 국정을 이끌어 갈 생각도 없었다.
기호지세!
호영은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주어진 결말은 기득권에 패배하거나 기득권을 완전히 투항시키는 것뿐이었다.
“……왕자들은, 어찌할 생각이냐?”
왕이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호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바마마, 소자는 폐세자처럼 무르지 않습니다.”
“형제의 피까지 볼 생각이더냐?”
“왕이 될 사람이라면, 나라를 먼저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왕자들의 목숨보다 나라의 이익이 더 중요하다는 우회적인 답변이었다.
형제들까지 숙청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었다.
“쿨럭쿨럭!”
충격이 꽤나 컸던 것일까? 왕의 기침 소리가 한층 커졌다. 피까지 흘리는 것이 당장이라도 쓰러질 모양새였다.
“괜찮으십니까?”
“놓아라!”
“어의를 부르겠습니다.”
“됐다!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호영은 병상에 누워 있는 노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현재의 아바타로는 부친이었고, 과거의 아바타로는 후손이라 할 수 있는 노왕이었다.
제아무리 정적에 가깝다지만 노왕이 죽어 가는 모습이 그리 기분 좋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한국을 위해서 너는 이제 그만 퇴장해 줘야 해. 그러니 대한국은 나에게 맡기고 조용히 떠나라.’
걱정으로 가득한 얼굴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는 호영이었다.
“세자야.”
“예. 말씀하십시오, 아바마마.”
“내가 살아갈 날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노왕의 한마디에 호영은 순간 흠칫하였다. 자신의 속내가 들킨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영은 애써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어찌 그런 참담한 말씀을 하십니까? 왕실과 나라를 생각해서라도 마음을 굳게 다지십시오!”
호영이 효성 깊은 아들을 연기하며 그렇게 외쳤지만 노왕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더 살아 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아바마마!”
“나는 너의 짐이 될 생각이 없다.”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아바마마가 짐이라니요. 소자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되었다. 이미 시대가 변했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왕은 덤덤한 목소리로 자신의 시대가 끝났음을 선언하였다.
일국의 왕이라는 자가 자신의 종말을 선언한 것이었다. 만약 이 자리에 대신들이나 왕족들이 있었다면 경악하여 온갖 소란을 피웠을 정도로 충격적인 선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호영은 침울한 기색만 내비칠 뿐, 충격을 받은 얼굴이 아니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태연하게까지 보이는 반응이었다.
실제로 호영은 이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왕세자가 아닌 왕으로서 오롯이 군림하게 될 이날을 말이다.
‘병사할 때까지 기다려 줄 수는 있지만 이왕이면 양위 선언을 하여 정식으로 권력을 이양하는 게 명분상으로 유리해.’
진정한 왕이 된다면 권력을 행사하는 것도 한결 수월해질 터.
그런 의미에서 왕이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나려는 지금의 상황이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상황을 만들기 위해 왕을 그토록 압박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다만 마지막으로 너에게 한 가지만 말해 주고 싶다. 부디 새겨들었으면 좋겠구나.”
“말씀하십시오. 각골명심하겠습니다.”
무릎을 꿇은 채 공손하게 말하는 호영을 보며 노왕은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하는 법이다. 네가 칼로서 모든 것을 해결하고자 한다면 결국 칼 때문에 망할 것이라는 거다.”
“…….”
“처음에는 칼을 쓰는 게 편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모두가 네 칼을 두려워하여 복종하니 말이다. 하지만 종국에는 네 칼을 네가 제어할 수 없는 상황이 올 것이야. 그때 만약 네가 칼을 제어하려면 방법은 하나뿐일 거다. 바로 네 칼에 네가 죽는 것.”
왕의 가르침에 호영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반론을 내세워야 하는 상황이라면 얼마든지 내세울 수 있었다.
‘나는 칼에 휘둘릴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칼만 앞세울 사람도 아니고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날카로운 반론으로 상대의 주장을 논파해 봤자 득 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호영은 왕의 가르침이 끝나는 순간, ‘명심하겠습니다, 아바마마!’라고 외쳤다. 마치 감명이라도 받은 듯한 얼굴로 말이다.
‘당신의 가르침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당신이 말했던 것처럼 지금 시대는 당신의 시대가 아니야. 적어도 지금의 시대에서는 내가 하는 방식이 옳다.’
호영은 그렇게 자신의 속내를 감추며 문안 인사를 끝마쳤다.
#약탈전
북한은 예나 지금이나 가난한 나라였다. 돈이 되는 것이라면 마약 판매든, 가짜 담배 제조든 어떤 것이든 가리지 않고 해야 될 정도로 가난하였다.
그런 북한이 센추리에 진출한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센추리의 경제 규모는 북한의 경제 규모보다 압도적으로 컸다. 게임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제활동이 일국의 그것보다 많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센추리의 경제 규모는 나날이 성장하고 있는 추세였다. 2000년대 초반, 중국이 한창 성장할 때를 보는 것 같은, 아니 그 이상의 성장 속도였다.
북한으로서는 센추리라는 가상현실 게임이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북한은 작년부터 센추리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당연하겠지만 처음 시작은 초보자의 섬이었다.
경제활동은 대부분 초보자의 섬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으니 돈을 벌려면 초보자의 섬에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북한 세력은 센추리에 진출하여 초보자의 섬에서 나름대로 수익을 얻기 시작했다. 특수부대 출신들이 사냥을 하면 나머지가 그 부산물을 파는 식으로 수익을 얻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냥으로 벌어들이는 수익에는 한계가 있었다. 가치 있는 사냥터는 이미 나라를 대표하는 길드들이 선점한 상황.
세금처럼 일정한 금액을 지불하면 사냥터를 이용할 수 있겠지만 그래 봤자 수익이 크게 나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 해서 다른 업계로 진출하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매춘이나 마약 같은 것은 삼합회, 야쿠자, 마피아 들이 이미 꽉 잡고 있었고 다른 업계들도 현실에서 대기업이라 부르는 회사들이 선점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사업에 진출하려면 땅이 있어야 하는데 본 게임을 한 적이 없는 북한 유저들이 땅을 갖고 있을 리가 없었다.
본격적으로 부동산을 매매할 수 있는 자본을 갖춘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그래서 북한은 3회 차가 시작되자 본 게임으로의 진출을 시도하였다. 돈을 어떻게 벌어들일지 계획한 것은 아니지만 일단 본 게임을 통해 부동산부터 갖추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본 게임도 결코 쉽다고만 볼 수는 없었다. 선두 주자가 압도적으로 유리한 초보자의 섬처럼 답이 안 보이는 것은 아니었으나 막막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특히 북한 유저들의 아바타가 위치한 지역의 특성을 생각하면 더욱더 막막하게 느껴졌다.
한반도 북부.
그곳은 현재 오크 세력이 강세를 보이고 있었다. 100년 전, 남부에서부터 ‘종족의 대이동’을 하여 북부에 대거 정착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북한 유저들은 매일같이 오크족과 치열한 사투를 벌여야 했다. ‘새로운 조국 건설’이 늦어진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남조선 아새끼들 때문에 이게 뭔 고생이네? 오크들만 없었어도 내래 이미 왕이 되었을 기여.’
김인성은 인상을 찡그리며 오크족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밀어 낸 한국의 유저들을 비난하였다.
그는 본래 정치장교 출신으로 북한이 센추리에 진출하면서 새 조국 건설을 담당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한마디로 본 게임에서만큼은 최고 실력자라는 뜻인데, 김인성은 단순히 본 게임에서의 실력자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왕!
그는 새로운 조국의 최고 권력자가 되기를 희망하였다. 센추리를 넘어 현실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그런 권력자 말이다.
“날래날래 움직이라우!”
하지만 왕이 되는 길은 험난하기만 하였다.
김인성은 오늘도 NPC 인민들에게 신경질을 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였다.
그때였다.
“지도자 동지! 지도자 동지!”
작전국에 소속되어 있는 상위가 호들갑을 떨며 달려왔다.
“뭔 일이네? 오크 그 간나 새끼들이 또 쌔리러 오기라도 하네?”
“지금 남에서부터 남조선 놈들이 몰려오고 있습네다!”
“나, 남조선? 그게 갑자기 뭔 개소리네? 똑바로 설명을 해 보라우!”
상위의 보고에 김인성은 기겁한 얼굴로 설명을 독촉하였다.
난데없이 한국의 등장이라니?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이었기에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김인성의 독촉에 상위는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로 보고하기 시작하였다.
보고 내용은 특별할 게 없었다.
남쪽에서 몰려오고 있는 적군의 숫자를 보다 상세하게 알려 주었을 뿐이었다.
“족히 수백은 되어 보이는 남조선 놈들이라…….”
“…….”
“간나 새끼들, 이기가 어디라고 쳐들어오는 기야?”
김인성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하고는 하전사들을 불러 모았다.
대략 백여 명의 하전사가 집결하자 김인성은 정치장교 출신답게 선동적인 말투로 하전사들의 사기를 끌어 올렸다.
“우와아아아아!”
선동적인 연설로 하전사들의 사기가 충천하니 때마침 남조선의 병력이 성 외곽에 당도하였다.
못해도 삼백이 넘어 보이는 대군이었다.
김인성은 불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3미터 높이의 성벽을 보며 애써 자신감을 가졌다.
‘남조선 놈들이 우리보다 숫자가 많다고 해도 수성이라면 이기지 않캈어?’
하지만 그 같은 자신감은 불과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깨져 버렸다.
대한국의 돌격대.
일당십 이상의 전투력을 가진 그들이 3미터의 성벽을 가볍게 뛰어넘어 성 내부로 진입하였기 때문이다.
* * *
이제는 정보나 감찰 쪽보다는 비서로서의 역할에 더욱 집중하기 시작한 우원재가 언제나처럼 무뚝뚝한 목소리로 호영에게 보고하였다.
“기근은 어느 정도 해결된 것으로 보입니다. 돌격대에서 황해남도, 황해북도를 약탈하였고 그곳에서 상당한 식량을 획득하였습니다.”
가장 먼저 보고한 것은 돌격대의 활약상이었다.
김성근은 간부 회의에서 호언장담한 것처럼 나흘이 채 지나지 않아 어마어마한 활약을 보여 주었다. 황해도 지역을 그야말로 쑥대밭으로 만든 것이었다.
오크족은 물론이요, 북한 유저들이 만들어가던 부족국가들까지 모조리 약탈하였다. 그의 활약으로 아사자를 1만 이하로 줄이는 게 가능해졌을 정도였다.
‘덤으로 북한 유저들을 위축시키기도 하였지.’
식량도 식량이지만 북한 세력이 크게 축소되었다는 점도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또한 호족들의 봉기도 성공적으로 진압하였습니다. 친위대에 소속되어 있는 유저들이 보고하기를, 숲으로 도망친 잔당만 내일쯤에 토벌한다면 반란 진압은 완전히 끝이 날 것이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