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
“왕세자 저하께서 광병에 걸리지만 않았어도 이 왕자 따위가 이리 오만무도하게 나올 수 없었을 것인데……!”
“정말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왕자는 절대 왕이 되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이 왕자, 대진.
그는 소왕국 동맹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이후 국정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통수권부터 시작하여 행정권, 관리 임명권, 입법권 그리고 외교권까지.
대진이 가진 권력은 사실상 왕을 능가할 정도였다.
그리고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쥔 대진은 왕세자를 폐위시키고 자신이 왕세자 자리에 올랐다.
이제 그에게 왕위 계승자라는 명분까지 생기게 된 것이었다.
권력과 명분, 그 모든 것을 가지게 된 대진은 전격적으로 왕국의 변혁을 시도하였다.
가장 먼저 벽파문벌, 즉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 신분이나 출신을 따지지 않게 하였고 왕실의 과대한 지출을 줄여 재정의 안정을 꾀하였다.
또한 백성들이 내는 세금은 모두 법령으로 정한 비율에 의하고 함부로 명목을 더 만들어 불법적으로 징수할 수 없게 하였으며, 기사나 종자 그리고 일부 호족들이 가지고 있던 특권 대부분을 회수하였다.
이제부터는 왕국에서 특권층이라 할 수 있는 존재들도 군역이나 부역에서 면죄되지 못하였다. 만약 부역이나 군역을 하지 않으려면 면역전이라고, 국가에 돈을 바치는 것으로 바뀌었던 것이었다.
여기에 더해 은결을 조사하여 호족들의 숨겨진 재산들을 색출하였으며 환곡제도를 시행하여 지방 호족들의 고리대에 시달리던 농민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야말로 변혁, 아니 혁명이라고 불릴 만한 변화가 고작 몇 달 사이에 왕국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더 이상 이 왕자의 독단과 패악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거병해서라도 이 왕자를 막아야 합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나서지 않으면 이 왕자의 폭정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가 왕이 된다면 더는 기회조차 없을 것이오! 지금이라면 우리를 따라서 거병할 호족들이 적지 않을 것이오! 모두 거병합시다!”
하지만 대진이 시도하는 변혁은 왕국의 기득권에 해당하는 존재들에겐 그리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지방에서 나름대로 큰 세력을 보유하고 있는 호족들이 오늘 이 비밀스러운 집회에 참석한 것도 바로 그 변혁에 반기를 들기 위함이었다.
반란!
호족들은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대진의 개혁에 제동을 걸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친위대가 이 왕자에게 붙었소. 무공을 익히지 않은 소작농들을 동원한다고 거사에 성공할 수 있겠소이까?”
“이미 일 왕자 저하를 따르던 왕족들이나 기사들의 반란이 실패로 끝이 났습니다. 그것도 완벽하게 말입니다. 저는 이렇게 승산 없는 반란에 가담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집회에 참여한 호족들 전부가 반란에 가담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불만은 가지고 있되, 대진을 두려워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는데, 대진을 따르고 있는 이계인들의 숫자만 수천에 달했고 여기에 친위대까지 장악한 상황이었다.
호족들이 거느리고 있는 소작농들을 동원하여 거병해 봤자 반란에 성공할 가능성은 10퍼센트도 채 되지 않으리라.
그 사실은 지난 반란들이 증명하였다. 유저들이 일으킨 반란까지 포함하여 모두 세 차례. 지금껏 대진의 손에 진압된 반란이 세 차례나 되었던 것이었다.
“집회에 참여했으면서 거사에는 가담하지 않겠다니, 그건 무슨 심보요! 여기에 온 이상 우리와 뜻을 함께해야 하오!”
“불가합니다. 저는 보다 현실성 있는 대책을 하기 위해 집회에 참석한 것이지, 반란에 가담하기 위해 참석한 것이 아닙니다!”
“이 왕자는 탐욕스러운 자요! 거병하지 않더라도 어차피 그대로 있다간 이 왕자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될 것이란 말이오!”
“목숨은 지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아, 목숨만 붙어 있어서 무슨 의미가 있다고.”
잠시 설전이 오갔다.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이었다.
하지만 그때 모임을 주도한 영세라는 이름의 호족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숙청의 명분이 될 것이오. 그리고 이 왕자는 명분만 있다면 상대가 누구건 가릴 것 없이 숙청을 하는 인물이지. 그런데도 우리와 뜻을 함께하지 않는다? 우리를 배신하여 이 왕자의 편에 서겠다는 것으로밖에 생각하기 어렵소. 그 방법이 아니라면 살아날 방도가 없을 테니까!”
“지나친 비약이오! 우리가 어찌 배신을 한단 말이오?”
“시끄럽소. 우리와 뜻을 함께하지 않겠다면 거사가 끝날 때까지 갇혀 지내시오. 우리의 인질이 되는 것이 당신들 입장에서도 차라리 괜찮은 일 아니오? 최소한 이 왕자의 손에 죽을 일은 없을 테니까. 뭐, 우리가 거병에 성공한다면 그때는 또 입장이 달라지겠지만.”
“…….”
“결정하시오! 우리와 뜻을 함께할 것인지, 아니면 거사가 끝날 때까지 인질이 될 것인지를.”
선택을 강요하는 영세의 외침에 온건파는 다시 둘로 나뉘었다.
거사에 가담하겠다는 쪽과 인질이 된다 하더라도 반란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쪽으로 나뉜 것이었다.
* * *
“또 반란이 일어났다더군.”
호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서 호영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고 싶어 환장했군요.”
“멍청한 것들. 아직도 현실을 몰라. 쯧쯧.”
“마침 곡식이 부족하였는데 털어 달라고 애걸하는 것 같네.”
“이번에는 저를 보내 주십시오. 저도 이제 무공 실력이 제법 됩니다.”
그의 수하들도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였다.
나름대로 규모 있는 반란인데도 불구하고 약간의 위기감조차 느끼지 않은 모습들이었다.
하지만 가지고 있는 힘을 생각하면 이들의 자신감도 결코 근거 없는 것이 아니었다. 친위대와 돌격대를 포함하면 무공을 익힌 병사만 천 명이 넘는다.
마력이라는, 인간을 초월하게 해 주는 초자연적인 기운을 가진 병사가 천 명이 넘는다는 것이었다.
비록 대부분이 수치로 따지면 10도 안 되는 미미한 마력만을 보유하고 있다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일당십 이상의 전투력을 보여 줄 수 있었다.
한마디로 무공을 익힌 병사들만 나서도 1만 이상의 군대를 감당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여기에 언제든 동원할 수 있는 조합의 모험가들이 있었다. 현재 조합에 가입한 모험가 숫자만 해도 1만을 훌쩍 넘어 2만에 가까워지는 상황이었다.
이 중 용병이나 사냥을 주로 하는 모험가들만 불러 모아도 4천에서 5천은 순식간에 집결시킬 수 있으리라.
중앙군의 존재도 무시할 수 없었다.
호영은 국정을 장악하면서 친위대를 비롯한 치안대, 중앙군까지 완벽히 장악하였는데, 중앙군의 숫자는 새로 징집한 신병을 포함하면 2천에 가까웠다.
친위대처럼 무공을 익힌 것은 아니지만 정규군이라고 할 수 있는 병사들이 2천이나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호영과 준기가 있었다. 두 사람의 존재만으로도 반란 따위에 위기감을 느낄 이유는 없다고 봐야 했다.
‘이 나라의 호족 전부가 반란을 일으킨다 해도 우리를 어찌할 수는 없다. 물론 왕족들도 마찬가지고.’
3회 차, 아니 4회 차나 5회 차 기준으로도 과분하게 느껴지는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외국을 상대로라면 몰라도 국내에서 그나 그의 파벌을 위협할 수 있는 세력은 전무하리라.
호영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굳이 시간을 끌 필요는 없겠지. 이참에 반기를 든 호족들을 모조리 쓸어버린다.”
그 말에 돌격대의 이인자, 순현이 물었다.
“진압은 누구에게 맡기실 것입니까?”
“이번에는 친위대가 반란을 진압할 것이다.”
순현의 물음에 호영이 그렇게 답하니 돌격대의 간부들이 웅성거렸다.
“왜 저의 돌격대가 아니고 친위대입니까?”
“중앙군을 보내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이제 나설 때가 됐지. 지금껏 우리는 지켜보기만 해야 했다고.”
몇 차례 없는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였기에 장수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출전 의사를 표하였다.
그중에서 가장 목소리를 높인 사람은 다름 아닌 김성근이었다.
“저하! 제가 있는 돌격대를 보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저를 보내 주신다면 언제나처럼 저하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호영은 그런 김성근의 말에 조용히 손을 들었다. 그러자 장내에 침묵이 찾아왔다.
“친위대를 보내겠다고 이미 명을 내렸다. 그런데도 항명하겠다는 거냐?”
“……죄송합니다.”
목소리를 높였던 김성근이 모든 장수들을 대표하여 사과하였다. 호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 갔다.
“지훈의 말처럼 친위대는 지금껏 활약할 기회가 없었다. 비록 친위대의 대장이 왕족에다 왕세자의 편에 섰던 대천이라고 해도 친위대는 엄연히 나의 병사들이다.”
“…….”
“친위대에 소속되어 있는 유저들은 지금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출정을 준비해라. 오후에 정식으로 출정을 명하겠다.”
“충!”
그렇게 호족들이 일으킨 반란에 관한 대책이 결정되었다. 친위대가 출정하는 것으로 결론이 난 것이었다.
반란이라는 주제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신속한 결정이었지만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호족들의 반란은 그만큼 중요도가 낮았던 것이었다.
“현재 시급한 문제는 반란 따위가 아니다. 흉년으로 인해 생기게 될 기근을 막는 게 가장 시급하다.”
친위대 소속의 유저들이 출정 준비를 위해 자리를 뜨자 호영은 전혀 다른 현안을 거론하였다.
그 현안은 다름 아닌 식량 문제였다.
“기근이 올 정도로 식량이 부족한 겁니까?”
“기획부에서 추산한 대로라면 보릿고개 때 최소 5만 이상이 아사할 것이다.”
“……헉, 5만이라니.”
“식량이 부족하다고는 들었지만, 그 정도였습니까?”
“왕족들의 창고를 다 털어서 괜찮을 거라 생각했건만…….”
호영의 말에 문사들은 물론이요, 장수들까지 기겁한 얼굴을 하였다. 식량이 부족하다는 사실은 익히 알았지만 무려 5만에 달하는 인구가 아사할 것이라는 추측은 이번에 처음 들었으니 놀라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그들이 위치한 경기도 지역은 식량난을 겪고 있지 않았기에 더욱 위기감이 덜하기도 하였고 말이다.
“하기야…… 생각해 보면 부족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소왕국 동맹과의 전쟁에 연이은 반란까지. 충청도 지역의 경우는 파종도 제대로 못했지 않습니까?”
“내전도 내전이지만 유저들의 영향도 큽니다. 유저들의 아바타는 대개 20, 30대의 청년입니다. 즉, 농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노동력이죠. 그런데 가장 중요한 노동력이 농사에는 일절 관심이 없으니 식량이 부족하지 않은 게 오히려 이상한 일입니다.”
문사들의 추측은 정확하였다. 농사 자체는 평작임에도 기근을 우려할 정도로 식량이 부족한 이유는 바로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전쟁이었다.
경기도는 그나마 호영이 있어 파종의 시기를 놓치지 않았 제거하겠습니다. 그러니 걱정을 놓으지만 충청도 지역이 문제였다. 소왕국 동맹들이 농사에 소홀하였고 여기에 전쟁까지 벌어짐으로써 올해의 농사가 완전히 망해 버렸다.
기획부에서 뽑은 5만이라는 아사자도 거의 대부분이 충청도에서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충청도는 보릿고개는커녕 올해의 겨울도 넘기기 힘들 것이었다.
두 번째는 유저들로 인한 노동력 부족이 원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