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147화 (147/345)

# 147

어마어마한 공을 세운 만큼, 당연히 호영에 대한 평가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단지 왕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왕자였다면 전쟁이 끝난 지금은 왕이 될 수밖에 없는 남자로 바뀐 것이었다.

“저들이라고 진심으로 나를 지지하는 것은 아닐 거다. 그저 죽고 싶지 않아서 지지하는 흉내를 내는 것이겠지. 흉내를 내지 않는다면 피의 숙청을 당하게 될 것이니 말이야.”

호영은 코웃음을 치며 그렇게 말했다.

호족들이 자신을 지지한다는 사실에 신경조차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저들도 이제 저하의 편이 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손을 내밀기만 하면 당장에 충성을 바칠 것 같은데…….”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저들을 정말 숙청하실 의중입니까?”

“왜? 그것이 네가 가장 바라고 있던 일이 아니었나?”

명회의 물음에 호영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씨 가문의 사생아로 태어나 온갖 차별과 불이익을 당해 왔던 것이 바로 명회였다. 그는 호영의 뜻에 동조하였고, 호영이 하루빨리 왕위에 올라 이 나라를 뿌리부터 개혁하기를 바라였었다.

자신처럼 재능이 있음에도 신분 때문에 불평등한 대우를 받는 일이 없게끔 세상을 바꾸려고 하였던 것이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 정도의 개혁을 하려면 피의 숙청은 꼭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기득권이 개혁에 반발할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니 말이다.

“처음에는 소신도 숙청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는데…… 요즘에는 조금 흔들리고 있습니다.”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명회의 모습을 보고 호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의 다 왔건만 이제 와서 흔들린다니?

개혁에 회의감이라도 느낀 것일까?

그같은 의문을 느낄 때 명회가 말문을 열었다.

“저하.”

“말해라.”

“저하께서는 왕세자의 행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야기의 흐름을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질문은 아니었다.

‘왕세자가 곧 있으면 폐위된다는 소리가 나돌고 있다지?’

사실 호족들이 이제 와서 호영을 지지하려는 것은 호영의 평판이 달라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왕세자의 급작스러운 변화도 크게 한몫하였다.

호족들이 왕세자를 배신한 것이 아니라 왕세자가 호족들로 하여금 지지를 철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설마 그 착해 빠진 왕세자가 광인이 될 줄이야.’

호영이 한창 소왕국 동맹과 전쟁을 치르고 있을 무렵, 본국에서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였었다.

반란?

그 역시 충격적인 사건으로 볼 수 있겠지만 준기가 워낙 순식간에 진압했기 때문에 대세에는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충격적인 사건이란 반란이 싱겁게 진압된 이후 발생하게 된 왕세자의 돌발 행동을 말하였다.

어려서부터 예의 바르고 검소하며 절제하는 삶을 살아온 왕세자였다. 전설로 남아 있는 이씨 가문의 대현자, 이사만큼이나 품행이 발라 ‘군자’라고 불렸다.

그런 왕세자를 백성들부터 지체 높은 왕족들까지 모두가 존경하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왕세자의 평판이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장인어른에게 폭언을 퍼부었다느니, 부왕에게 문안 인사를 안 드렸다느니 사소하게 느껴지는 뜬소문이 퍼졌다.

그리고 대략 열흘 전부터는 지금까지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소문들이 나돌기 시작했다.

왕세자가 평소에 아끼던 수하들에게 폭행을 휘둘렀고, 아이를 가진 유부녀들을 희롱하였으며, 온갖 사치를 부리기 시작했다는 소문들이었다.

과거였다면 아무도 믿지 않았을 소문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소문은 점점 증폭되었고 몇 가지 소문에 대해서는 진실로 밝혀지기도 하였다.

특히 폭행에 관련돼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중상을 입은 관리가 왕성에서 나오는 모습이 몇 차례나 목격되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중상을 입은 관리들 대부분이 왕세자의 심복으로 알려진 자들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냐고? 이상한 것을 묻는군. 왕세자는 내가 두려워서 미친 것이 아니더냐.”

왕세자의 변화는 호영으로서도 예상치 못한 일이 분명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아닌 양 대수롭지 않게 말하였다.

실제로도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진짜로 미쳤든, 아니면 연기를 하는 것이든 중요하지 않다. 결과적으로 나는 명분과 정통성을 동시에 얻게 될 것이니.’

호영이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릴 때 명회가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신의 생각은 다릅니다. 왕세자는 저하를 두려워해서 미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는 지금 스스로를 희생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너는 왕세자가 광인이 된 것이 아니라 광인을 연기하고 있다 생각하느냐?”

“예, 확신하고 있습니다.”

사실 충구도 비슷한 의견을 보였었다.

왕세자가 미치광이로 변한 것은 어디까지나 연기에 불과하다고. 왕세자는 자신의 고고한 명예를 희생하면서까지 자신의 심복들을 지키려 하고 있다고 말이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다른 것은 몰라도 그의 의지만큼은 높이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지라…….”

호영은 의지라는 단어를 중얼거리다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왕세자는 무능하고 나약해서 왕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였던 것이 바로 두 사람, 명회와 충구였다.

그런데 우습게도 왕세자가 미치광이로 변하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왕세자를 높이 평가하는 두 사람이었다.

호영으로서는 황당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뭐, 사실 나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야. 왕세자……. 그가 양녕대군이 될 생각임은 나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자신의 재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닫고 광인을 연기하여 충녕대군, 즉 세종 대왕에게 세자의 자리를 양보한 양녕대군.

물론 그 양녕대군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미화된 양녕대군이었지만 어찌 되었건 지금 왕세자가 하려는 행동은 미화된 양녕대군과 다를 게 없었다.

미치광이를 연기하여 자연스럽게 왕세자의 자리를 호영에게 넘기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왕세자가 광인이 되어야지만 호영의 정통성이 강화되고 또 무익하게 피를 흘리는 것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너는, 왕세자가 스스로를 희생하면서까지 자신의 사람을 지키려 하니 되도록이면 숙청은 하지 말라는 것이냐?”

“어디까지나 소신의 의견일 뿐입니다.”

“나는 지금 너의 의견을 묻고 있다.”

“……소신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숙청은 불필요하다고.”

“개혁할 때 반발이 거셀 텐데?”

“생각보다 반발이 크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왕세자가 직접 자신의 사람들을 관직에서 물러나게 만들었으니 말입니다. 즉, 숙청 아닌 숙청을 왕세자가 대신 해 준 셈입니다.”

호영은 그 말에 신중한 얼굴을 하였다.

‘왕세자는 정적이다. 그가 사실 모두를 속인 채 4년 뒤를 노리고 있을지도 몰라.’

칩거하거나 낙향하기 시작한 왕세자의 파벌을 보면 굳이 피의 숙청을 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한편으로는 후환을 남겨 놓을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4년 뒤를 노리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3회 차가 끝나 유저들이 관여할 수 없게 되는 그 순간, 왕세자의 역습이 시작될 가능성도 없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왕세자가 나의 후손이라는 사실도 잊으면 안 된다.’

정적을 경계하는 것은 나쁘지 않은 마음가짐이었지만 왕세자는 정적인 동시에 그의 후손이기도 하였다.

한마디로 호영과 왕세자는 피로 이어진 관계라는 것이었다. 센추리를 가상 세계가 아닌 또 하나의 세계로 생각하며 대씨 가문을 자신의 혈족이라 여기는 호영으로선 심사가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숙청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 왕세자와 직접 만나 볼 필요도 있으니 말이야.”

“왕자 저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결국 호영은 왕세자나 왕세자의 파벌에 대한 처리 문제를 차후로 미루었다.

어차피 지금 당장은 급할 게 없었다. 그는 아직 왕이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걸 보니 국왕이 나를 어찌 대할지도 궁금해지는군. 대놓고 왕세자를 지지하였던 양반인데 말이야.’

호영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왕성으로 향하였다.

* * *

의용군을 해산시킨 호영은 간부들만 동원한 채 왕성으로 들어섰다. 오랜만에 돌아온 왕성의 분위기는 지난번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뭐랄까, 우중충한 분위기랄까? 왕성 바깥이 한창 축제 분위기인 것을 생각하면 완전히 상반된 분위기였다.

“어서 오십시오, 저하.”

분위기만 바뀐 것이 아니었다.

호영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바뀌었다. 신분은 일개 시종에 불과하나 왕을 직속으로 모신다는 점에서 상당한 권세를 자랑하던 유전이라는 시종관이 허리를 숙이며 호영을 환영하였다.

과거에는 여느 왕자를 대하듯 적당히 고개를 숙이는 게 끝이었는데 말이다.

“전하는 어디에 계시느냐?”

하지만 호영은 유전의 태도 변화를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고는 왕의 위치를 물어보았다.

“알현실에 계십니다.”

“쯧쯧, 몸도 편찮으신데 내실에서 편히 쉬시지.”

겉으로는 부친의 건강을 걱정하는 모습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호영, 그는 벌써부터 노왕을 뒷방 늙은이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었다.

“…….”

“뭐 하느냐? 어서 안내하여라.”

“……예, 알겠습니다.”

유전은 아까보다 더 어두워진 얼굴로 호영을 알현실까지 안내하였다.

알현실에 도착하니 친위대 소속의 병사가 경비를 서고 있었다.

“충!”

“조국의 영웅, 이 왕자 저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친위대원들이 호영을 대하는 태도도 과거와는 완전히 달랐다. 마치 왕을 대하는 것처럼 극도의 존경을 표하고 있었다.

‘로열패밀리도 아닌데 이런 반응이라니. 친위대가 이 정도라면 대신들이나 왕족들은 어떻게 반응할지 기대가 되는군.’

권력의 향배에 민감한 그들이라면 분명 어떤 식으로든 변화를 보일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호영이 알현실에 입장하니 숨이 막힐 듯한 적막감이 느껴졌다. 예전에는 호영이 들어오건 말건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저들끼리 회의를 진행했을 텐데 지금은 하나같이 긴장한 얼굴로 호영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호영은 그런 대신들의 모습에 속으로 조소를 짓고는 옥좌에 앉아 있는 노인에게 기운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소자, 대국의 은혜를 배신한 간악하고 비열하기 그지없는 소왕국들을 징벌하고 왔나이다.”

“쿨럭쿨럭! 무사히 돌아와서, 쿨럭! 다행이도다.”

노인의 입에서 기운 넘치는 호영의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죽음을 목전에 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려 30년에 가까운 시간을 절대자로서 군림한 대척!

대한국의 지배자이자 모두에게 경외를 받았던 그도 결국 노환은 피해 가지 못하였다. 이제 그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던 것이다.

‘어디서 나온 말인지는 모르지만 이럴 때 쓰는 말이 있던데. 왕위를 계승 중입니다, 아버지……였던가?’

늙고 쇠약해진 부왕을 보며 호영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다음 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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