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
그런데 지금 왕세자가 충구에게 꺼지라고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제아무리 충구가 정적의 수하라고 하지만 왕세자의 성향을 생각하면 지나치게 극단적인 반응이었다.
“내 말 안 들려? 꺼지라고, 이 빌어먹을 배신자 놈아!”
“저하! 갑자기 왜 그러시는 겁니까?”
“시끄러워! 이게 다 당신 때문이야. 애초에 당신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내가 이 왕자 따위에게 고초를 당했을 것 같아? 정말 무능하기 그지없어! 당신도 꺼져 버려! 내 앞에서 영영 사라지란 말이야!”
“저하!”
충구는 광기에 휩싸인 왕세자의 모습을 보고 조용히 접대실에서 빠져나왔다.
내성에서 돌아오는 길에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던 충구는 작게 중얼거렸다.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렇게까지 자신을 희생하는 겁니까?”
* * *
본국에서부터 반란군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의용군은 더욱 기세를 높여 몇 남지 않은 소왕국들을 점령해 나갔다.
순식간에 여러 나라가 점령되었고 대략 2주 정도가 지나자 마침내 남아 있는 소왕국은 부여 인근에 수도를 둔 금강국뿐이었다.
“저곳만 함락시키면 이 지긋지긋한 전쟁도 끝이 나겠군요.”
한 간부가 후련하다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니 다른 간부가 아쉬운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이번에는 성안에서 내응할 사람이 없다는 게 아쉽습니다. 마지막이니 쉽게 갔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거야, 신진호가 지키는 성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막나가기로 작정한 신진호잖아.”
“진짜, 미친 거 아닙니까? 패배할 게 분명한데 아직도 뻐기고 있다니.”
“어차피 그자는 이제 와서 항복한다 해도 받아 줄 수 없어. 그자가 죽인 NPC만 몇 명인데? 금강국의 수도에서도 의심스러운 NPC들을 죄다 죽였다고 하니 말 다 했지.”
“에휴, 신진호 이 미친놈…….”
호영은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다가 돌연 손을 들었다.
그가 손을 들자 떠들썩했던 지휘부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의용군의 최고 간부들부터 참모나 전령들까지 모두 호영의 행동에 주목하였다.
“돌격대장.”
“예, 사령관님.”
“이번 공성전에는 안에서 내응할 세력이 없다.”
“애초에 누군가의 조력 따위는 필요 없었습니다. 언제나처럼 돌격대가 선봉이 되어 아군이 도착하기 전에 성문을 열겠습니다.”
패기 넘치는 김성근의 모습에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조차 기대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돌격대장, 김성근!
2회 차에서 선봉을 도맡으며 수많은 활약을 펼쳤던 그는 이번 전쟁에서도 엄청난 활약을 펼쳤다.
본국에서 있었던 전투에서는 무려 두 명의 왕을 죽였고 충청도로 넘어와서는 여섯 개의 나라를 점령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제 그의 군공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지휘부의 참모들과 간부들이 그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가라. 선봉이 되어 아군의 진격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부숴라.”
물론 호영도 다르지 않았다. 그 역시 김성근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였다.
어쩌면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역할을 김성근에게 맡긴 것도 바로 그 신뢰의 표현이었다.
“사령관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그렇게 김성근이 돌격대를 이끌고 성으로 진격하자 호영은 나머지 병사들에게 이와 같은 명령을 내렸다.
“곧 있으면 성문이 열릴 것이다. 본대는 성안으로 들어갈 준비를 해라.”
“충!”
성급하다고 볼 수 있는 명령이었지만 김성근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였기에 명령을 내리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호영이 기대했던 대로 성문이 열렸다.
돌격대가 표홀한 몸놀림으로 3미터가 조금 넘는 성벽을 뛰어오르더니 그대로 성문까지 장악한 것이었다.
“모두 돌격하라!”
“와아아아아!”
성문이 열리기 무섭게 안으로 몰아닥치는 대한국의 의용군!
해일처럼 빠르게 들이닥치는 의용군의 무시무시한 돌격에 소왕국 동맹군의 잔당은 속수무책으로 밀려났다.
중간에 신진호로 보이는 거한이 잔당의 사기를 끌어 올리려고 발악하였지만 이미 승세는 기운 지 오래였다.
“끝났군.”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놓지 않았던 호영은 그제야 흡족한 얼굴을 하였다.
“경하드립니다, 사령관님!”
“이제 왕이 될 일만 남으셨습니다!”
간부들이 희미한 미소를 띤 호영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만약 전투가 끝나기 전에 이같은 말을 들었다면 방심하지 말라고 나무랐을 것이지만 이미 승리가 확정되었기에 호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모두 수고하였다.”
수고하였다는 한마디에 간부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고생 끝, 행복 시작!
표정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우리도 이제 성안으로 들어가자.”
“예!”
성을 함락했는데 언제까지고 들판에 주둔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법. 지휘부도 전쟁의 승리자로서 보무당당하게 수도로 향하였다.
“나영석?”
“네?”
“너도 따라와라.”
“……알겠습니다.”
센추리 시간으로 불과 나흘 전에 투항한 나영석.
호영은 일종의 포로라고 볼 수 있는 그까지 데리고 당당하게 입성하였다.
그가 수도로 입성하니 전장을 정리하고 있던 의용군이 함성을 질렀다.
“사령관님, 만세!”
“이 왕자 저하, 만세! 만세! 만만세!”
본래의 역사에서는 만세가 황제에게만 쓸 수 있는 말이었지만 유저들이 그런 것을 신경 쓸 리가 없었다.
모두가 만세를 외치며 승리의 함성을 내질렀다.
“어떤가?”
“……무엇이 말입니까?”
“내 군대. 네가 이끌었던 군대와 비교하면 어떤 것 같지?”
“훨씬 정예한 것 같습니다.”
“그뿐인가?”
“…….”
나영석은 입술을 질끈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얼굴을 보니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그런 나영석을 보며 호영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내가 가진 군대에는 세계 전체에도 몇 존재하지 않는 무인들로 이루어진 부대가 존재하지.”
“돌격대 말씀이십니까?”
“그래. 너도 알고 있겠지만 이번 전쟁에서 돌격대의 활약이 무척이나 컸어. 무공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지를 알게 해 주는 전쟁이었지.”
“……저에게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나는 너의 재능을 높이 보고 있다. 다른 유저들처럼 감금만 시키기에는 너의 재능이 너무 아까워.”
“그래서, 돌격대로 들어오라는 말씀이십니까?”
“만약 무공만 배운다면 너는 돌격대장 이상의 장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통솔력이나 집단 전술 능력을 갖추었다는 게 증명되었으니 말이야.”
“저는 돌격대장에게 완패했습니다만.”
“그거야 전투력에서 압도적으로 차이가 나니 어쩔 수 없었던 일이고. 네가 이끄는 군대는 패잔병에 불과했잖아. 돌격대장은 무인들로 이루어진 돌격대를 이끌었고. 그러니 당연한 결과 아닌가? 만약 상황이 반대로 바뀌어서 네가 돌격대를 이끌었다면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그같은 물음에 나영석은 침묵하였지만 굳이 답변을 듣지 않아도 답변을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영석의 얼굴에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깃들어 있었으니 말이다.
“돌격대로 들어간다면 저의 지위는 일반 병사가 되는 것입니까?”
“왜 그게 불만인가?”
“…….”
입을 꾹 다물며 무언의 긍정을 표하는 나영석.
호영은 그런 나영석을 보며 마치 그의 처지를 이해한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의 신분이 신분이었으니 불만을 갖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국의 왕이었는데 일개 병사로 신분이 추락하다니. 거기에다 나만 아니었으면 소왕국 동맹의 수좌가 될 정도의 실력을 가졌는데 말이야.”
“그 정도는 아닙니다.”
자신의 상황을 이해해 주는 듯한 호영의 발언에 나영석의 얼굴이 조금은 풀어졌다.
제아무리 패장지장의 신분이라지만 일국의 왕이었던 그가 일개 병사가 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호영이 그런 나영석의 처지를 몰라주지 않은 것 같으니 그로서는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호영은 나영석의 기대를 무참히 배신하였다.
“하지만 네가 알아 둬야 할 것이 있다. 그건 바로 내가 너에게 부탁이나 제안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네가 만약 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저기 보이는 신진호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때 호영이 어딘가를 가리키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영석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호영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니 그의 경쟁자인 동시에 가장 든든했던 전우가 목이 잘린 채 죽어 있었다.
신진호!
대한국을 상대로 최후에 최후까지 저항했던 그는 결국 수급이 장대에 걸리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었다.
“흐음!”
“더 이상 시간을 주지 않겠다. 나를 따를 것이냐, 따르지 않을 것이냐? 만약 나를 따른다면 돌격대의 일원이 될 것이고 따르지 않는다면 즉참할 것이다.”
“……어쩔 수 없군요. 사령관을 따르겠습니다.”
나영석은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결국 호영의 수하가 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회귀 전에 나의 주군이었던 허영만이 이제는 나를 주군으로 모시는군.’
호영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다시 생각해도 얻은 게 많은 전쟁이었다.
이번 전쟁을 통해 최명헌과 신진호를 죽이고 허영만을 수하로 받아들였으니 단순히 영토나 인구 외에도 얻을 수 있는 것은 다 얻었다고 봐도 좋을 것 같았다.
* * *
호영이 수도로 복귀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왕의 귀환을 보는 것 같았다.
가는 곳곳마다 환영 인파가 몰려들었고, 대한국의 백성들은 열렬한 환호로 호영과 의용군을 맞이하였다.
“이 나라에서 저하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더 이상 없을 것 같습니다.”
백성들의 환호에 일일이 손을 흔들며 화답해 주는 호영의 곁으로 명회가 다가와서는 조용히 말했다.
“원래부터 백성들은 나를 따르지 않았더냐.”
“물론 백성들이야 저하를 지지하였지만 저런 부류들은 대체로 왕세자를 지지하지 않았습니까?”
그가 가리킨 곳에는 일반 백성과는 확연히 달라 보이는 무리가 있었다. 대한국의 상류층으로, 호족이라 불리는 자들이었다.
호족들은 명회의 말처럼 호영보다는 왕세자를 지지하였었다. 이유야 단순명료했는데, 왕세자의 성정이 우유부단하고 주체성이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노골적으로 말해서 다루기 쉬운 인물이라는 뜻이었다.
반면에 호영은 선대 국왕인 패왕을 쏙 빼닮았다. 무력도 대단하였고 결단력도 강하였다. 카리스마적인 성격의 전제군주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었다.
이렇다 보니 호족들로서는 왕세자를 지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호족들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힘이 강한 군주보다는 힘이 약한 군주가 편할 것이기 때문이다.
‘박쥐 같은 것들. 내가 왕위를 잇게 될 것이 확실해지니 이제 와서 아첨이라도 떨겠다는 건가?’
왕세자를 지지했던 호족들이 이제 와서 호영의 귀환을 환영해 주는 이유야 뻔했다. 호영이 왕위를 잇게 되는 것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굳혀졌던 까닭이었다.
감히 선제공격을 시도함으로써 대한국의 자존심에 흠집을 낸 소왕국 동맹!
호영은 바로 그 소왕국 동맹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하다가 결국 멸망시키기에 이르렀다. 자존심을 회복한 수준을 넘어 소왕국 전체를 발아래에 두게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