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
이 속도대로라면 나머지 소왕국들을 정복하기까지 한 달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전쟁이라는 게 생각보다 시시하군요.”
회귀 전, 한국에서 손꼽혔던 검사 중 한 명인 순현이라는 사내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곰 같은 덩치를 가진 사내가 동조하는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처음으로 겪는 전쟁이라 기대했는데…….”
그 역시 회귀 전에 이름을 날렸던 무인이었다. 주로 쓰는 무기는 도였는데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섬세하여 검이나 활 같은 무기도 곧잘 다루었다.
참고로 지금은 호영을 따라 하여 창을 사용하고 있었다.
“푸하하하하! 순현, 윤수, 이 애송이들아! 2군과 싸웠을 때 그렇게나 고전했던 주제에 이제 와서 여유 부리는 척하는 거냐?”
두 사람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거한이 갑자기 대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거한의 이름은 김성근. 순현과 윤수의 직속상관이었다.
“크흠.”
“그때는…….”
“강행군 때문에 지쳐서 그랬던 것이라고? 사내놈이 조금 행군한 거 가지고 핑계는. 적군은 다섯 명의 왕 중에 세 명이 죽은 상태였어. 우리보다 훨씬 열악한 상태였단 말이다. 알겠냐?”
김성근의 말에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변명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전투 몇 번 이긴 거 가지고 자만하지 마라. 네놈들 따위가 여유를 부려도 될 정도로 전쟁이 만만한 것은 아니니까.”
두 사람을 향해 호되게 질책하고는 유유히 물러나는 김성근. 그의 뒷모습이 무척이나 멋있어 보였다.
‘김성근이 왜 장수로서도 유명했는지 알 것 같군.’
호영은 김성근의 뒷모습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
“돌격대장의 말은 경험자의 이야기니까, 새겨들어.”
“예.”
“……알겠습니다.”
눈에 띄게 주눅 든 두 사람의 모습에 호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김성근의 모습도 의외였지만 두 사람의 모습도 호영에게는 무척이나 의외였다.
자신과는 다르게 전국구로 이름을 날렸던 두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너무 아쉬워하지는 마라. 이번 전쟁은 시작에 불과하니까. 내년만 되도 질리도록 전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호영은 그렇게 말하며 두 사람을 위로해 주었다.
“그렇습니까?”
“……기대하겠습니다! 사령관님.”
위로 한 번에 극적으로 반응하는 두 사람을 보며 호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회귀 전이랑 비교하면 성격이 조금 달라 보였지만 싸움을 좋아하는 것만큼은 똑같은 것 같았다.
‘하기야, 그러니까 S급이 될 수 있었겠지.’
S랭크에 대한 억측은 지나칠 정도로 많아서 호영도 자세히 아는 바가 없었지만 눈앞의 두 사내들은 6회 차 이전에 이미 A랭크에 도달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6회 차 이전에 A랭크였으니 8회 차쯤 S랭크에 도달했다고 추측하는 것도 개연성에 무리가 없으리라.
‘그나저나 다른 유저들도 어떻게든 찾아야 할 텐데…….’
처음 순현과 윤수가 조합에 가입하였을 때 호영은 마치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준기와 김성근만으로도 든든하기 그지없었는데 그에 비견되는 재능을 가진 두 사람이 더 합류하다니!
이제 다른 나라의 군주들과 비교해도 꿀릴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S랭크의 잠재력을 가진 인재는 세계적으로도 극소수에 불과하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합류하고 며칠이 지나자 호영은 또다시 욕심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더 많은 인재가 갖고 싶어진 것이었다.
‘한성 제일검과 차상민 범사까지만……. 아니, 최연소 고수 청룡창이랑 십팔기의 달인인 이성은도 있었지. 그자들도 어떻게든 얻어야 할 텐데.’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 절제력이 남다른 호영이라고 다를 게 없었다.
그래서 그는 조합을 만든 이후 한참 동안 인재 찾기에 몰두하였다. 회귀 전에 활약했던 유저들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직까지는 희소식이랄 것이 없었다.
분명 3회 차부터 센추리를 시작한 유저들도 적지 않을 텐데 도저히 보이지가 않았던 것이다.
전쟁이 시작되고 충청도에 진출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신진호나 나영석처럼 군주로서 명성을 떨친 이들은 많았지만 무인으로서 명성을 떨친 이들은 별로 보지를 못하였다.
‘뭐, 사실 군주들만 얻어도 나쁘지 않은 성과야.’
명성으로만 따지자면 소왕국을 지배하고 있는 군주들도 순현이나 윤수 같은 이들과 비교했을 때 크게 손색이 있다고 보기 어려웠다.
순현과 윤수가 무공으로 이름을 떨쳤다면 소왕국의 군주들은 권력이나 재력으로 이름을 떨쳤으니까.
그러니 군주들을 포섭하는 것도 지금으로선 나쁘지만은 않으리라. 어쨌든 그들도 인재는 인재였으니 말이다.
“물론 군주들을 받아들이기 전에 무조건적인 항복부터 받아 내야겠지만…….”
“예? 사령관님,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아니다.”
순현의 물음에 호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젓고는 나직하게 말했다.
“이제 슬슬 출발하자.”
호영이 창을 집어 들며 나직하게 말하니 가까운 곳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복명복창이 울려 퍼졌다.
“조합장님이 명령을 내리셨다. 모두 출정하라!”
“출정하라!”
그의 명령이 군중 전체로 퍼져 나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의용군은 호영의 명령이 떨어진 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출정 준비를 완료하였다.
‘우리나라는 이게 좋다니까. 성인 남자 대부분이 군필이라는 거.’
제법 군기라는 게 느껴지는 자신의 군대를 보며 호영은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유분방한 유저들로 이루어진 군대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 정도면 지금 시대에서는 나름 정예라고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전쟁을 몇 번만 더 치르면 진짜 정예군이 되겠어. 다른 나라의 정예들과 비교해도 부족할 게 없는 정예가.’
그런 생각을 하며 미소를 짓는 순간, 멀리서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북쪽에서 전령이 오고 있습니다.”
전령이 도착했다는 음성이었는데 호영은 왠지 모르게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딱히 이유는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예감이었다.
호영은 전령이 자신의 앞에 도착하자 숨을 들이켤 시간도 주지 않은 채 물었다.
“본국에 무슨 일이 생겼느냐?”
“헉헉. 예,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반란이라니?”
“다수의 모험가들로 이루어진 반란군이 왕국의 북부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규모는 최소 1천이랍니다.”
“…….”
반란이 일어났다는 보고에 호영은 잠시 말문을 잃었다. 하필 지금 같은 순간에 반란이 일어나다니?
예상을 아예 못 한 것은 아니지만 타이밍이 지나치게 공교로웠다. 호영의 의용군이 적지 깊숙한 곳까지 도달한 상태였으니 말이다.
‘유저들이 일으키는 반란이니 원재와 충구도 어쩔 수 없었겠군. 그들이 대비하고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왕족들과 왕세자뿐이니까.’
3천에 달하는 전쟁 용병들을 이끌고 원정에 나섰지만 호영은 지금껏 후방을 걱정한 적은 없었었다.
조합 하나만 믿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 물론 조합만으로도 반란 억제력이 대폭 상승하겠지만 그럼에도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은 없지 않았다.
기득권을 사수하겠다는 목적으로 무작정 반란을 일으키는 자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충구와 원재가 있었기에 그런 반란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시시한 반란 따위는 언제든지 제압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보 세력을 통제하는 원재와 정치 세력을 통제하는 충구.
두 조합이라면 설령 권력이 막강한 왕족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 해도 조기에 처리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이번 반란이 왕족이나 왕세자가 일으킨 반란이 아니라는 것이다.
유저!
호영의 세력이라 여겨지던 유저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사령관님, 어서 회군을 명해 주십시오! 본국이 위험합니다!”
“그렇습니다. 소왕국 동맹은 언제든 징벌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왕국에서 일어난 반란부터 진압하는 게 우선입니다!”
아무 명령도 내리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호영을 향해 간부들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쟁은 이미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소왕국 동맹군의 군대는 대부분 격퇴되었고, 이제 남은 것은 왕성이나 산속에 틀어박힌 잔당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잔당은 언제든지 처리할 수 있었다. 지금의 군세로도 손쉽게 무찌른 상대이니 다음에는 보다 쉽게 무찌를 수 있을 터.
그러니 지금은 간부들의 의견처럼 회군하여 본국의 반란군부터 진압하는 게 맞는 일이었다.
“아니, 우리는 이대로 진격한다.”
하지만 호영은 진격을 고집하였다.
“회군이 아닌 진격입니까?”
“왜 그런 결정을 하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간부들은 호영의 주장에 깜짝 놀란 얼굴을 하였으나 이전처럼 경악하거나 반대 의견부터 내세우지는 않았다.
전쟁 초부터 파격적인 행보를 보여 주었던 호영이다. 그리고 그 파격적인 행보의 결과는 언제나 아군에게 엄청난 이득을 가져다주었었다.
당장에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처럼 보여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보다 시기적절하고 효과적인 행동은 또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간부들은 호영의 지휘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였다. 지금처럼 이해가 안 가는 명령을 내려도 신뢰를 잃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아직 신진호와 나영석을 잡지 못했다. 다른 자들은 놓칠 수 있어도 두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놓쳐서는 안 된다.”
물론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기에 간부들은 의아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두 사람이 살아 있다고 딱히 큰 영향을 끼치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그들이 그만큼 중요한 자들입니까?”
간부들로선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신진호나 나영석은 전투에서 진 패장이자 나라를 잃은 왕이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기껏 해 봐야 병사 백 명 정도뿐. 그것도 사기가 땅끝으로 떨어졌을 패잔병들 말이다.
보유하고 있는 군사력이 수천에 본인이 만부부당, 즉 만 명으로도 감당하지 못할 무력을 소유한 호영 같은 인물이 경계하기에 너무 보잘것없는 존재들이었다.
솔직한 말로 호영이 단독으로 그들을 추격하여 말살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그만큼 중요한 자들이다.”
의아해하는 간부들에게 호영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진호는 중간에 나가떨어졌다 해도 두 사람 모두 한국에서 손꼽히는 세력가였다. 아무리 약세를 보이는 상황이라도 경계를 낮출 수는 없어. 오히려 약세를 보이는 지금 확실하게 제거해야 한다.’
호영으로선 신진호와 나영석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능력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그였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투항을 요구하시지요. 지금 소왕들이 투항하지 않는 이유가, 왕의 지위를 잃고 4년간 감금되기 때문이 아닙니까? 왕의 지위를 유지시킨다는 조건하에 투항하라고 한다면 어렵지 않게 투항을 받아 낼 수 있을 겁니다.”
“아니, 투항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예외는 없다.”
“…….”
관용을 베풀라는 간부의 말은 나름 혹할 법한 의견이었지만 호영은 이번에도 단호하게 대꾸하였다.
예외는 없다고 말이다.
그러자 간부들이 답답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본국을 포기한다는 겁니까?”
“절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도 저도 못한다면 차라리 군을 나누시지요. 일부는 진군을 계속하고 나머지는 회군시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