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
2회 차 때는 전투 대부분을 친위대에게 맡겼고 3회 차 때는 전투를 할 기회조차 없었었다.
딱히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그의 무력은 심복들에게조차 감추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호영이 1회 차에 거인을 사냥했던 대준임을 알고 있는 사람들조차 호영의 신화적인 무력에 의문을 표하고 있었다.
2회 차, 영등포구 연합과의 전쟁에서 보여 주었던 실력이 호영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때는 호영의 마나가 극도로 부족했을 때였는데도 말이다.
‘이번 전투에서 모두에게 알려 줄 것이다. 나의 무력은 너희들 따위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가오는 적군을 보며 호영은 호기로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무력을 모두에게 알려 주겠다고 말이다.
“이미 늦은 것 같다.”
“어쩔 수 없지. 싸우는 수밖에.”
“사령관님을 어떻게든 지켜야 한다, 우리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뒤에서 간부들이 결의를 다지고 있었지만 호영은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들의 결의가 가상하게 느껴지기도 하였으나 안타깝게도 그 결의는 호영이 있는 한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왜냐하면, 적군을 상대하는 것은 오직 호영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나의 뒤에만 있으면 된다. 어차피 내 뒤로 갈 수 있는 적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니까.”
수백 명이 오건 수천 명이 오건. 전부 다 쓸어버리리라.
호영은 철창 하나만을 달랑 든 채 그렇게 말했다.
* * *
최명헌은 처음 대한 의용군의 본대를 본 순간 안심하였었다. 의용군의 규모가 예상했던 것보다 조금 적었기 때문이다.
‘언덕을 빼앗긴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병력이 저 정도라면 일방적으로 패하지는 않겠군. 어쩌면 이길 수 있을지도.’
아무리 마음에 드는 전쟁이 아니라 해도 일방적인 패배를 경험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사실 최명헌이 선제공격을 반대하는 모양새를 취한 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이점을 얻기 위함이었지 진실로 전쟁에 반대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 역시 선제공격을 해서라도 대한국을 견제할 필요가 있음을 동조하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번 전투는 가능하다면 이기는 것이 좋았다. 질 거라면 피해를 최소화해야 할 것이고 말이다.
“왕이시여! 전장 한복판에 대한국의 이 왕자가 나타나 우리 군의 수장을 찾고 있습니다!”
“뭐라고? 이 왕자가 나를 찾는다고?”
적의 규모를 보며 안심하던 최명헌은 갑자기 전장 한복판에 대한국의 왕자가 등장했다는 소식에 인상을 찌푸렸다.
전투 직전에 사신을 보내는 것이 그리 이상하기만 한 일은 아니었지만 왕자가 직접 나선 것은 예사롭게 볼 일이 아니었다.
위험을 무릅쓰기에는 왕자라는 신분의 목숨값이 지나치게 무거웠다. 심지어 불리한 전투도 아니었고 말이다.
이같은 생각은 최명헌만 한 것이 아니었는지, 최명헌을 보좌하는 인물 중 한 명이 불현듯 말을 꺼냈다.
“수상하군요. 따로 속셈이 있는 것 같습니다.”
“김 팀장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렇습니다.”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내의 말에 최명헌이 반색하였다.
사내는 신사업 추진 팀의 팀장을 맡고 있는 인물이었다. 신사업 추진 팀이란 그룹에서 센추리와 관련된 사업을 전담하는 부서였는데, 현재 신사업 추진 팀은 신사업 추진단으로 확대 개편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전망이 밝은 부서였다.
한마디로 김 팀장이라는 사내는 그룹의 실세이자 센추리에 관련된 모든 사업을 통솔하는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백제의 왕은 최명헌이지만 백제라는 나라를 만들고 소왕국들을 동맹에 가담하게 만든 것은 김 팀장이라 불리는 김휘겸의 공이었다.
센추리에서의 최명헌은 얼굴마담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최명헌은 센추리를 하는 시간보다 현실에 있는 시간이 더 길기도 하였고 말이다.
아무튼 최명헌에게 있어 김휘겸은 의지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제가 듣기로 이 왕자의 무력이 대한국에서 제일 강하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 이야기는 저도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왕자는 유저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조합이라는 것을 만들었으니 충분히 의심해 볼 만한 일입니다.”
대한국의 이 왕자는 센추리를 넘어 현실에서도 화제의 인물이었다. 가장 강력한 국가의 이인자라는 이유도 이유였지만 이 왕자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파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 왕자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자 사람들은 조금씩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이 왕자가 자신들과 같은 유저가 아니냐는 것이었다.
김휘겸과 최명헌 역시 다른 유저들처럼 이 왕자를 유저로 의심하고 있었다.
“유저에다 엄청난 무력을 가지고 있는 이 왕자. 솔직히 무엇을 해도 이상할 게 없지 않습니까? 난데없이 의장님을 공격한다 해도 말입니다.”
“……가능성이 없지는 않군요.”
“그러니 이 왕자와 직접 만나는 것은 피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자가 무슨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는지는 들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을 보내면 되지 않습니까? 그자들도 소왕국 동맹에서 나름 수장이라 부를 수 있는 인물이니 말입니다.”
그의 말에 최명헌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최명헌이 생각하기에도 나쁘지 않은 의견이었기 때문이다.
김휘겸의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최명헌은 곧바로 전령들에게 명했다.
“지금 즉시 두 왕에게 전해라, 이 왕자와 이야기를 나누라고.”
그렇게 이 왕자와 대면하는 사람은 신진호와 나영석으로 정해졌다.
‘만약 이 왕자가 허튼수작을 부린다면…… 오히려 나에게 득이 될 것이다.’
가한국의 왕 신진호와 옥주국의 왕 나영석.
두 사람은 소왕국 동맹에서 최명헌 다음으로 강맹한 세력을 가졌다. 둘이서 각각 오백 명의 병사를 동원한 것만 봐도 무시할 수 없는 인물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최명헌으로선 차라리 이 왕자가 허튼수작을 부려 주길 원하였다. 두 사람이 죽는다면 최명헌으로선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이 왕자가 파격을 좋아하는 자라고 해도 그런 짓을 할 리는 없겠지. 신진호와 나영석이 나를 배신할 수 없는 것처럼, 이 왕자 역시 유저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말이야.’
허황된 기대는 할 필요도 없다며 고개를 휘휘 내저은 최명헌은 나영석과 신진호가 이 왕자를 상대할 동안 전투태세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 왕자와의 협상은 무용지물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니 미리미리 전투를 준비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최명헌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두 왕이 자신들의 군대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가며 전투를 외치는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이 왕자가 몸소 나선 것치고 협상이 생각보다 빠르게 결렬되었다.
“의장님,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군요. 과연 어떻게 될까요, 이번 전투?”
“가장 좋은 것은 공멸입니다만…… 아무래도 질 가능성이 높을 것 같습니다. 이 왕자가 친정하는 전투이니 사기도 적군이 높고 무엇보다 아군은 분열되어 있지 않습니까?”
“하기야 당장에 전방에서 지원을 요청한다 해도 들어줄지 들어주지 않을지 고민하는 판국이니 말 다 했군요. 뭐, 그렇다고 이제 와서 화목하게 지낼 생각은 없지만 말입니다.”
“그러니 질 가능성이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길 생각보다는 아군의 피해를 줄이는 데 주력해야겠습니다.”
“예,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입니다.”
나름 심각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전방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여유롭다고밖에 느껴지지 않은 분위기였다.
체스나 바둑을 두는 것처럼 느껴진다고나 할까? 두 사람에게 있어 전쟁이라는 결국 숫자 놀이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왕이시여! 가한국의 왕이 증원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때 갑자기 전령이 찾아왔다. 증원을 요청하기 위해 찾아온 전령이었다.
“증원이라니?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증원을 요청하느냐?”
“가한국에서는 이 왕자 때문이라고 하는데 정확한 사유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증원을 보내지 않는다면 30분도 버텨 내지 못할 것이라 말했습니다.”
전령의 말에 최명헌은 헛웃음을 지었다.
30분이라니.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지금이 무슨 열병기 시대도 아니고…….
‘내가 군대를 안 갔다고 우습게 보는 건가? 하! 어떻게든 병력의 소모를 줄여 보겠다고 노력하는 것은 가상하지만 그렇다고 이건 아니지.’
이만한 규모의 전투라면 특별한 전략이나 기책을 사용하지 않는 한 최소 몇 시간은 소요되기 마련이었다.
물론 한쪽의 전력이 압도적이라면 순식간에 끝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양군의 차이가 그 정도로 압도적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군세도 비슷하고 상대 역시 오합지졸인 것은 매한가지였다. 불리한 전투이나 일방적으로 당할 전투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최명헌으로선 가한국의 지원 요청이 황당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나약한 소리를 지껄일 시간에 적군을 한 명이라도 더 죽이라고 전해라.”
“그렇다면 지원군은?”
“전투가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지원군은 무슨!”
“하, 하지만 가한국의 왕께서는 30분도 버티기 힘들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시끄럽다. 그게 다 나를 끌어들이기 위한 수작이 아니더냐? 나는 그딴 헛소리에 놀아나지 않을 것이니 네놈은 어서 내 말을 전하기나 해라!”
“아, 알겠습니다.”
전령의 뒷모습을 보며 최명헌은 어이없어하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신진호가 이런 경우 없는 사람인 줄은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그래도 나름 기개 있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차라리 가한국의 왕이 경우 없는 사람이었으면 좋겠군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김휘겸의 의미심장한 발언에 최명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표할 때 최명헌의 수하 중 한 명이 다급하게 외쳤다.
“의장님, 의장님! 저기를 보십시오!”
그 다급한 외침에 최명헌은 고개를 돌려 수하가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두었다.
“저게 무슨 일이지?”
가한국의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전방. 적군과 치열한 혈전이 벌어지는 그곳에서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마치 해일이라도 몰려오는 것처럼 가한국의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어이가 없군!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도주를 하다니. 오백 명이나 데려와서 감탄해 주었건만 당나라 군대보다 더한 오합지졸이었어?’
황당함을 넘어 분노까지 느껴졌다.
저따위로 형편없는 군대를 이끌고 왔으면서 그렇게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였었다니! 사기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신진호, 그 사람은 전쟁이 끝나는 즉시 동맹에서 제명해야겠습니다. 쯧쯧, 저렇게나 한심하다니.”
“지금은 처벌을 논할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최명헌이 혀를 차며 자리에도 없는 신진호를 나무라자 김휘겸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어서 퇴각을 준비하시지요.”
“퇴각이라니, 저희들은 아직 전투 한 번 한 적이 없지 않습니까?”
“가한국의 군대가 저렇게 빨리 무너졌으니 우리가 지원하러 가 봐야 의미가 없습니다. 옥주국의 좌군과 우리 백제군이 지키고 있는 우군도 동요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저들을 제물로 삼아 아무런 피해 없이 전장을 이탈하는 게 최선의 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