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
지금 그녀의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도 바로 그 경외심 때문일 것이었다.
“대장!”
경선이 호영을 생각하며 복잡한 기분을 느낄 때, 몽골인의 후예라고 불리는 부하가 다급하게 그녀를 불렀다.
“왜?”
“적들이 왔습니다.”
“드디어 왔네? 지영아, 애들 집결하라고 해.”
“예, 대장.”
부하의 보고에 경선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무작정 기다리기만 했을 때는 긴장감이 극에 달했는데 막상 적이 등장하니 희열감으로 가득해졌다.
역시 그녀도 2회 차의 동료들처럼 정상은 아닌 것 같았다.
‘하긴, 그러니 인간 사냥꾼이 되었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그녀는 자신의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바라보았다. 현실에서 데려온 양궁 후배들이 가장 먼저 보였고, 봉씨 일족에서 찾은 기재들도 제법 보였다.
모두 자신과 함께하는 동료이자 부하들이었다.
“모두 활을 들어. 이제 싸울 시간이야.”
그녀는 나직하게 말을 꺼냈다. 그러자 여전사들이 조용히 활을 손에 쥐기 시작하였다.
“천천히 따라와.”
“…….”
이번에도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여전사들.
경선은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여전사들을 이끌고 매복지로 향하였다. 적군의 이동로상에 있는 매복지에 도착하자 그녀는 부하들에게 말했다.
“여기서 대기한다. 곧 적이 올 것이니 긴장을 놓지 말도록.”
시기적절한 그녀의 말에 여전사들은 날카로운 집중력을 유지하였다. 때마침 전방에 적군의 군대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적의 군대는 대열이 길게 늘어져 있었는데 그녀들이 있는 장소에서 볼 때는 끝이 안 보이는 것 같았다. 그만큼 적의 수효가 많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스무 명도 안 되는 여전사들은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침착한 얼굴로 경선의 명령만을 기다렸다.
그녀들에게 있어 경선은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지휘관이었던 것이다.
“3발을 쏜다. 명심해. 3발이야.”
경선은 공격을 개시하기 전, 여전사들에게 말했다.
3발만 쏘라고.
적군을 기습하려는 의도였다면 당연히 적군이 큰 피해를 입을 때까지 화살을 쏟아부었을 것이지만 그녀의 목적은 암살이었지 기습이 아니었다.
“누굴 쏩니까?”
“딱 보면 알 수 있잖아? 저기, 저기, 저기. 세상을 가지기라도 한 것처럼 요란을 떨고 있는 사내놈들.”
경선은 손가락으로 누군가를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그녀가 가리킨 방향에는 진중한 분위기 속에 유일하게 소란을 피우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중무장한 병사 수십의 호위를 받고 있었는데, 전쟁을 치르러 가는 것이 아닌 마치 소풍 가는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들이었다.
그녀의 말처럼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인사들 같았다. 그리고 범상치 않은 인사라는 것은 그만큼 ‘수당’이 세다는 뜻.
경선으로선 무조건적으로 처치해야 할 사람들이었다.
“모두 목표 확인했지?”
“예.”
“그럼 쏴!”
주요 인물처럼 보이는 이들이 사거리 안에 들어서자 경선이 곧바로 사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활시위를 당기고 있던 여전사들이 일제히 화살을 쏘아 냈다.
경선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화살을 쏘았는데 이제는 목궁에 익숙해졌는지 그녀의 화살은 정확하게 목표를 향해 날아갔다.
“큭.”
“허억!”
“무, 무슨 일이…… 으윽!”
그녀들이 노렸던 목표들은 대부분 단말마도 남기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였다. 매복을 대비하지 않고 이동하였으니 당연하다고 볼 수 있는 최후였다.
목표의 호위를 맡고 있던 동맹군의 정예 병사들도 비슷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그들은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화살 공격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의미하게 죽어 나갔다.
“이제 됐어. 후퇴해!”
공황 상태에 빠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적군을 보며 경선은 신속하게 명령을 내렸다.
후퇴하는 명령을 말이다.
한창 혼란에 빠져 있는 적군이니 추가적인 공격을 내리면 크나큰 피해를 입힐 수 있겠지만 애초에 그녀들에게 적군의 피해 여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중요 인물을 죽이는 데 성공했는가, 실패했는가, 그뿐이었다.
그리고 이미 그녀들은 목표를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다.
목표가 소왕국 동맹에서 어느 정도로 중요한 인물인지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적군이 저 정도로 혼란에 빠졌다는 것은 그만큼 주요 인물이라는 뜻이 될 터.
그렇기에 시간을 끌 필요가 없었다. 지금 당장 후퇴하여 위험 지역에서 이탈하는 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이같은 경선의 명령은 무척이나 시기적절하였다. 적군의 후미 대열과 선두 대열에서 추격자를 보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만약 퇴각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전멸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법 큰 피해를 보았을 터. 여러모로 운이 좋다고 볼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심법을 구매하는 것도 가능할 거야!’
이름 모를 산에서 완전히 벗어난 경선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적장을 암살한 것은 엄청난 군공!
그녀가 의용군에 속한 지휘관이었다면 ‘영토’를 하사받을 수 있을 정도의 군공이었다. 하지만 영토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미 영토나 작위 같은 것은 여성인 그녀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이 3회 차에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경선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무력뿐. 그렇기에 경선은 이번 저격으로 얻게 될 ‘공헌도’로 심법을 구매할 생각을 가졌다.
#최명헌
‘예상보다 큰 성과로군, 왕을 세 명이나 잡다니.’
호영은 경선의 성과에 크게 만족해하였다.
어느 정도의 성과를 예상하기는 했었지만 무려 왕을, 그것도 세 명이나 저격할 줄은 예상치 못했었다.
그녀의 활약은 서전을 승리로 장식한 것과 다름없을 정도였다. 아니, 적의 기세를 보면 그 이상의 효과를 보았다고 해도 좋았다.
‘돌격대도 잘해 주고 있고, 명회도 곧 있으면 좋은 소식을 보내 줄 것 같네.’
왕이 세 명이나 죽자 적군의 기세는 크게 위축되었는데 김성근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수도에서 출정한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전장에 당도한 김성근은 기세가 줄어든 적군을 그대로 공격하였다.
아쉽게도 강행군으로 돌격대의 피로가 지나치게 쌓여 전투에서 이겨 놓고 추격전에서 큰 피해를 입히지 못하였지만 승세를 탄 것은 분명하였다.
오늘이나 내일 전투가 다시 벌어진다면 그때는 확실하게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 것이었다.
명회의 상황도 나쁘지 않았다.
얼떨결에 적의 1군을 상대하게 된 명회는 선봉으로 견인 전사들을 보내 적군을 견제하였다. 수인족 특유의 기동력을 이용한 것이었다.
한창 대한국의 병사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적의 1군은 갑작스러운 견인 전사들의 등장에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노리고 있던 지역을 정복하지도 못하였고 피해만 심하게 보았기에 1군의 사기가 말이 아니었다. 만약 명회가 이끄는 병력까지 전장에 도착한다면 그들의 기세는 더욱 무뎌질 수밖에 없으리라.
당장의 상황만 놓고 봤을 때 명회도 승세를 타고 있는 것은 분명하였다.
‘이제 나만 잘하면 되는 건가?’
1군과 2군이 고전하고 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적의 본대였다.
호영이 적의 본대를 상대로 승리를 따낸다면 이번 전쟁은 이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가장 쉬운 일이 마지막에 남았네.”
그는 다가오고 있는 전투를 기다리며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군대에서 40킬로미터 행군도 안 해 봤나. 왜 이걸 못 버티지?”
“그러게. 이 날씨에 그 정도도 못 걷나. 행군하기 딱 좋은 날씨인데.”
의용군의 간부이자 로열패밀리에 소속되어 있는 유저들이 누군가를 향해 한심하다는 목소리로 한마디씩 꺼냈다.
그들이 비난하는 대상은 행군 중에 낙오된 전쟁 용병들이었다.
사백 명!
무려 사백 명이 넘는 전쟁 용병들이 행군 중에 낙오되었다. 이틀간 대략 60킬로미터 거리를 행군하자 버티지 못하고 낙오된 것이었다.
“뭐, 그래도 적군은 더 심하지 않겠어? 우리보다 거리가 한참 가까웠으면서 이제야 도착한 것을 보면 말이야.”
호영이 눈앞의 적군을 보며 그렇게 말하자 간부들이 실소를 지었다.
유저들은 의용군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적군의 주력도 유저들이었고, 아군이나 적군이나 유저들은 대체로 인내심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30킬로미터도 안 되는 거리를 이동했을 적군의 본대가 뒤늦게 전장에 도착하였다. 아군이 유리한 위치를 선점한 이후에 말이다.
‘점령도 하면서 이동했으니 적으로선 어쩔 수 없었겠지만, 어찌 되었건 패착은 패착이다.’
안 그래도 불리한 싸움인데 유리한 장소까지 아군에게 내주다니. 수백 명의 낙오자가 생기더라도 장소만큼은 선점했어야 하는데 적군은 아주 큰 실수를 하였다.
물론 이번 전투에서 그 정도의 실수는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이제 슬슬 가 봐야겠군.”
적의 움직임을 가만히 지켜보던 호영이 불현듯 말을 꺼냈다. 그러자 간부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표했다.
“어디를 가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사령관님?”
“적을 만나 봐야지. 이 나라의 왕자이자 군대를 이끄는 사령관으로서 말이야.”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호영을 보며 간부들이 눈을 크게 떴다. 적을 만나러 간다는 소리에 당황한 것이었다.
하지만 당황한 것은 잠시뿐, 간부들은 이내 목소리를 높이며 반대하였다.
“사령관님이 직접 움직이신다니, 그건 안 될 말입니다!”
“위험한 일입니다! 재고하여 주십시오!”
“맞습니다! 처음 세웠던 계획대로 가는 게 현명한 선택입니다!”
간부들은 대한국의 최고 권력자로 손꼽히는 호영을 상대로 불경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행동들을 하였다.
감히 목소리를 높인 것부터가 지금 시대에서는 불경이라고 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누군지를 생각하면 딱히 불경하다고 생각할 일은 아니었다. 그들은 2회 차부터 호영과 함께하며 충성심을 증명한 이들이었으니 말이다.
즉, 호영에게 이견을 내세우는 것도 충성심의 발로라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호영은 간부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 줄 필요가 있었다. 독재자가 될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나 호영은 간부들의 이견을 묵살하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걱정할 필요 없다. 저 정도의 군세가 나를 위협할 일은 없으니까.”
아집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 전투에서 군공을 독점하기 위해선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무엇보다 호영이 말한 것처럼 이번 전투에서 그를 위협할 만한 요소는 단 한 가지도 존재하지 않았다.
설령 적군이 막무가내로 그를 공격하려 한다 해도 호영을 어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저들과의 협상이 꼭 필요한 일이라면 차라리 저희를 보내 주십시오. 어떻게든 협상에 응하게 만들겠습니다.”
“협상 때문에 가는 것이 아니다. 유저들에게 나를 알리기 위해 가는 것이다.”
“…….”
호영은 의문을 표하는 간부들에게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은 채 곧바로 명을 내렸다.
“세 명만 따라오고 나머지는 지휘부에서 대기하도록. 협상은 실패할 가능성이 높으니 긴장감을 늦추지 말고.”
“……명에 따르겠습니다.”
명령을 내리자 간부들은 떨떠름해하면서도 더는 이견을 내세우지 않았다.
무조건적인 상명하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