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
신진호가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내려고 할 때 옆에 있던 나영석이 신진호를 진정시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의장님, 선봉군인 저희는 먼저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러도록 하세요. 저는 모든 군을 조율해야 하니 천천히 진격하도록 하겠습니다.”
나영석의 말에 최명헌이 여유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의 상황과는 왠지 어울리지 않게 느껴지는 여유로움이었다.
하지만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여유를 부려도 이상할 게 없는 일이었다.
의장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는 최명헌은 현재 동맹군의 본대를 이끌고 있었다. 본대는 일종의 예비대 성격이 강했는데 예비대답게 초반에 싸울 일은 없다고 봐야 했다.
신진호와 나영석의 선봉군이 큰 피해를 입지 않는 이상 최명헌이 나서게 될 일은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지금처럼 여유를 부리는 것도 그리 이상하게 볼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왠지 기분이 나쁘군. 우리만 손해 보는 기분이야. 하긴, 억지로 참전시킨 셈이니 감수해야 될 일이지. 영토 문제도 있고.’
나영석은 느긋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는 최명헌을 보며 쓴웃음을 짓다가 신진호와 함께 출정 준비를 서둘렀다.
선봉군으로서 전투 준비를 미리부터 하고 있었기에 출정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곧바로 병사들을 이끌고 진지에서 벗어난 신진호와 나영석.
두 사람은 지도상으로 ‘진천군’에 해당하는 지역을 가로지르고는 본격적으로 대한국의 영토에 들어섰다.
“지금쯤이면 다른 방면을 맡은 동맹군도 움직이기 시작했겠군요.”
행군을 하던 중, 나영석이 불현듯 말을 꺼냈다. 그러자 신진호가 아쉬워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그렇겠죠. 크으, 원래였으면 우리가 가장 먼저 승리를 따내는 것인데!”
“그런데 대한국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진천군을 버리는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겁니다. 수비하기에는 진천군이 너무 돌출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하긴, 그건 그렇겠네요. 유일하게 충청도에 있는 지역이니.”
“그래서 저는 걱정입니다, 과감하게 진천군을 버린 대한국이 앞으로 어떻게 대응할지.”
나영석으로선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국력 차이가 워낙에 압도적이고 유저수도 대한국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진호는 변함없이 승리를 확신하는 얼굴로 말했다.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제 소식통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대한국은 지금 내전이 일어나기 직전이랍니다.”
“내전요? 우리와의 전쟁이 발발했는데 설마 내전이 일어나겠습니까?”
“뭐, 내전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이 왕자와 왕세자 간의 신경 다툼이 장난 아니라고 하니 제대로 대응이나 하겠습니까? 병력을 뒤로 뺀 것도 두려워서 그런 거지, 우리와 맞서 싸우려고 그런 것은 아닐 겁니다.”
“……그렇습니까?”
그같은 확언에 오히려 불안감이 더해질 때쯤, 나영석의 심복이 충격적인 보고를 하였다.
“대한국의 군세가 남하하고 있습니다! 다수의 유저들로 구성된 수천 명의 대군이라고 합니다!”
심복은 유저였고 정보의 출처는 인터넷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100% 신뢰할 수 있는 정보가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잠시 당황하였던 나영석은 애써 침착한 표정을 연기한 채 물었다.
“대군이라니? 그게 도대체 어디서 나온 병력이지?”
“이 왕자의 군대랍니다!”
“그자가 어찌? 왕세자가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을 텐데?”
“저도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습니다만, 커뮤니티가 떠들썩한 것을 보면 아무래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비슷한 정보를 담고 있는 게시물만 수백 개가 넘습니다.”
나영석은 말문을 잃었다. 자신만만해하던 신진호도 급격히 조용해졌다.
예상치 못했던 대한국의 반격은 이번 전쟁이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 * *
“……이러한 이유로 의용군의 참전을 허하노라. 이 왕자는 지금 즉시 의용군을 이끌고 남부에서 일어난 난을 징벌하라.”
일종의 선전관이라 할 수 있는 친위대원이 외치는 말에 호영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계획대로 되었어.’
언제 내전이 터질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전쟁이 발발하였다. 소왕국 동맹, 그들이 쳐들어온 것이었다.
당연하겠지만 외부의 침략이 발생하기 무섭게 내부는 급격히 안정을 찾았다. 외적들 앞에서는 왕세자도 호영도 힘을 합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중에서 호영의 군대인 ‘대한 의용군’은 이미 모집이 끝나 훈련까지 어느 정도 이루어진 군대였기에 가장 먼저 남진하기로 결정되었다.
지금 친위대원이 왕을 대신하여 외치는 말도 바로 그 사실을 통보하는 것이었다.
“국왕 전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호영은 왕을 대하듯 친위대원을 향해 극진한 예를 다하고는 왕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곧바로 자신의 병력이 있는 곳으로 향하였다.
수도 외성 밖의 공터.
수도에서 불과 2킬로미터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이 공터에는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전쟁에 참전하는 전쟁 용병들이 집결해 있었다.
‘오직 유저로만 이루어진 수천의 군대라……. 군주 중에 이러한 군대를 이끌었던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 같은데 말이야.’
무려 수천에 달하는 군사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회귀 전에도 몇 번 보지 못했던 광경이었다.
아니, 군사들 대부분이 유저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라고 할 수 있었다. 회귀 전에 그가 보았던 군대들은 언제나 NPC와 유저가 섞여 있었으니 말이다.
“남부에서 훈련시키고 있는 병력이 몇이라고 했지?”
“이백 명의 이계인들이 남부에서 따로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참고로 견인 전사 삼백이 추가로 참전에 응했습니다.”
“오백이라……!”
안 그래도 엄청난 군사 수였다. 왕국의 자랑인 친위대조차 부담을 느끼며 신속히 출정하라는 압박을 가해 오고 있을 정도였다.
만약 노왕이 오늘내일 하지 않았다면…… 왕세자가 호구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면…….
소왕국들과 전쟁을 시작하기 이전에 내전이 발발했을 것이었다.
그 정도로 호영이 통제하는 병력의 숫자는 상식을 초월하였다.
3천!
호영이라는 개인이 통제하는 병력이 무려 3천이나 되었다. 대한국의 역사에서 이만한 병사가 집결한 적이 없었기에 더욱 충격적이었다.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나를 좌천시키기 위해 만든 조합장이란 한직이 대장군이나 대군사 이상의 힘을 가지게 해 줄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호영 자신조차도 이 정도까지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으니까.
지금 호영이 동원한 ‘전쟁 용병’의 숫자는 3천이었다. 처음 기대했던 게 1천이었으니 무려 3배에 가까운 숫자가 모인 셈이었다.
‘그저 지방으로 분점을 내며 수도에서 했던 방식을 그대로 했을 뿐인데…… 유저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지.’
전쟁 용병을 모집한 일도 그랬다. 조합에서 등급을 올리기 위해 필요한 공적치와 무공, 토지 등등의 몇 가지 보상을 내걸으니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그것도 그저 그런 유저들이 아닌, 제법 이름을 날리는 유저들이 말이다.
호영은 흡족한 얼굴로 자신의 군사들을 바라보다 명회에게 물었다.
“후방은 어떨 것 같아? 왕족들이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것 같은데.”
단숨에 수천의 군사를 모으는 모습을 보며 왕족들은 두려움에 떨었지만 만약 그 군사가 외부로 출정한다면 두려움을 이겨 내기 위해서라도 헛짓거리를 하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였다.
호영이 후방을 걱정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잔류하는 이들이 많아서 괜찮을 것 같습니다. 후방에서 조력하는 이들도 많고 말입니다.”
“그들을 믿을 수 있을까? 전투에 관련 없는 이들이 대부분인데.”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인질의 개념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이름 있는 가문을 배경으로 둔 조합원들이 많으니 왕족들이라고 함부로 행동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명회의 대답에 호영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의 말처럼 후방은 안정적이라고 볼 수 있었다. 현재 상황에서 유일하게 후방을 위협할 수 있는 세력은 왕세자의 파벌뿐이었다.
하지만 그들로는 왕국에 잔류하는 조합원들조차 상대하기 버거웠다. 왕국에 잔류하는 인원만 3천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물론 친위대가 전격적으로 공격에 나선다면 군사훈련을 받지 못한 조합원들은 각개격파를 당할 우려가 있었다.
친위대의 숫자도 200에 가까웠고 개개인이 잘 단련된 무인이었으니 위협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잔류하는 조합원들도 무력이 약할 뿐, 무시할 수 있는 존재들인 것은 아니었다.
만약 친위대가 각개격파를 시도한다면?
조합원들의 반격을 걱정하기 이전에 다른 이들의 반격을 걱정해야 할 것이었다. 잔류하는 조합원들의 아바타는 명문가 출생인 경우가 적지 않았고, 만약 이들이 공격받는다면 지방의 기사나 향사 가문이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키게 될 것이니 말이다.
‘사실 조합이 아니어도 걱정할 필요는 없긴 하지.’
로열패밀리!
그들은 왕국의 허리에 해당하는 중앙군 지휘관, 종자, 주사 등의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이른바 호영의 비밀 무기로서 만약 조합을 공격하려 한다면 이들에게 먼저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무엇보다 준기가 있다.’
아직은 호영보다 약하지만 언젠가는 호영을 뛰어넘을 차대의 제일 고수. 그가 있는 한, 후방을 걱정할 이유는 없으리라.
* * *
“평택에서 출발한 적군이 화성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병력은 3군과 마찬가지로 1천 정도랍니다.”
“적군 1천가량이 남사현 방향으로 진격 중!”
“본대로 보이는 2천의 병력이 진천군을 지나 강을 타고 북상 중입니다! 소수의 병사들이 맞서 싸웠지만 패퇴하였습니다!”
전령 부대에 소속되어 있는 유저들이 정신없이 입을 놀리며 온갖 정보를 쏟아 냈다. 하나하나가 더할 나위 없이 귀중한 정보들이었다.
“정보 체계가 예상보다 훨씬 잘 구축되었어.”
유저들이 쏟아 낸 정보들 덕분에 호영은 앉은 자리에서 형국이 어떠한지 적군은 얼마나 되는지를 파악하였다.
마치 현대의 실시간 네트워크처럼 정보 전달 속도가 엄청났는데, 수십 킬로미터 밖에 있는 적군의 움직임을 모조리 파악하고 있는 것이었다.
원래라면 수십 킬로미터 거리가 아닌 몇백 미터 거리에 있는 적들조차 파악하기 어려웠어야 했다. 무전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말 같은 탈 것조차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런데도 이렇게 적의 움직임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전방에 파견된 모험가들이 있어서였다. 모험가, 즉 유저들이 로그인과 로그아웃을 반복하며 적의 소식을 알려 주고 있었던 것이다.
호영은 용병들을 훈련시키는 동안에 꾸준히 전쟁을 준비하였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시한 것이 정보였는데 소왕국 동맹에 소속되어 있는 유저들을 매수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었다.
왕의 심복이나 군의 지휘관에 해당하는 이들을 매수하였던 것이다.
물론 매수뿐만이 아니라 전방으로 파견시킨 모험가들처럼 직접적으로 정보를 얻기 위한 노력도 하였다. 가장 적절한 순간에 가장 적절한 정보를 얻기 위한 노력이었다.
아무튼 이같은 노력들로 호영은 앉은 자리에서도 천하를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