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135화 (135/345)

# 135

“……당연한 일이 아니더냐. 적법한 후계자가 있는데도 왕위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역적이나 마찬가지다!”

“숙부님, 왕위는 결국 강자의 것입니다. 숙부님도 그 사실은 인정하시지 않습니까?”

순간 대천은 숨을 멈추었다.

강자 존의 법칙!

여태껏 내색한 적이 없었던 대천이지만 그 역시 강자 존의 법칙에 적잖이 동감하고 있었다. 강자 존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으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대천은 들이켰던 숨을 길게 내쉬고는 말했다.

“왕세자는 무인이 아니지만 대신 명석하다. 또, 남다른 포용력을 가지고 있지. 왕세자라면 형님 전하가 그랬던 것처럼 선정을 베풀며 현명한 통치를 펼칠 것이다. 그러니 왕국을 위해서라면 네가 아닌 왕세자가 왕이 되어야 한다.”

잠시 고민하였던 대천이지만 그의 목소리는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진심으로 호영보다 왕세자가 낫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처럼 왕세자의 위상이 크게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서도.

확실히, 현왕의 치세를 보면 그런 생각을 갖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현왕은 이 나라를 진정한 문명국으로 만든 왕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왕세자는 바로 그 현왕을 가장 닮은 인물이었고.

왕세자의 지지도가 굳건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국왕 전하가 현명한 통치를 했다고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하지만 호영은 조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모두가 찬양하는 현왕의 치세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 이제는 부왕의 업적까지 부정하려는 것이냐?”

“업적이라……. 저는 솔직히 부왕께서 통치를 잘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전쟁은 사라졌고, 사회는 극도로 안정되었다. 인구는 꾸준히 늘어나고 있으며, 문화와 기술은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그런데 통치를 잘하지 못했다니. 이보다 현명한 통치가 어디 있다는 말이냐!”

“하지만 무인들은 약해졌죠. 싸움이 없으니까, 평화로우니까. 무를 닦을 이유도 사라진 것입니다.”

대천도 무인이었다. 당연히 그 사실이 기쁠 수만은 없었다. 그러나 대천은 눈을 버럭 뜨며 외쳤다.

“그게 무엇이 나쁘다는 것이냐! 전쟁도 겪어 본 적 없는 놈이 우리가 어렵게 이루어 낸 평화를 모욕하는 것이냐!”

“평화가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양보로 얻어 낸 평화라는 게 문제입니다.”

“…….”

“남방의 소왕국들이 하는 짓거리를 보십시오. 종속국들 주제에 감히 공물을 끊고서 독립하려 들고 있습니다. 이제는 아예 동맹이라는 것을 만들어 우리를 대대적으로 적대하려 들고 있고 말입니다. 이게 평화를 구걸한 결과입니까?”

“소왕국들이 말썽을 부리는 것은 빌어먹을 이계 놈들 때문이지 않느냐!”

“그렇다면 동방의 수인들은 왜 그렇습니까? 한때 아국의 명령에 복종하였던 수인들이 지금은 제멋대로 행동하며 아국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습니다. 간간이 약탈까지 시도하며 말입니다. 이게 진짜 평화입니까?”

대천은 입술을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내심으로 동의하는 이야기였기에 그로서는 반박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군부나 지방에서 나를 지지하는 사람이 왜 그렇게 많다고 생각하십니까? 겉으로는 부왕의 치세에 열광하였지만 속으로는 불만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는 뜻입니다.”

사실 호영을 지지하는 사람 대부분은 ‘로열패밀리’ 소속의 유저들이었지만 그저 자신에게 유리한 발언만 하는 호영이었다.

“그리고 저를 지지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군사력을 쥐고 있습니다. 참고로 숙부님이 다스리는 친위대에도 저를 따르는 이들이 많을 겁니다.”

“…….”

“그런데 말입니다. 만약 지금 같은 상황에서 왕세자가 왕위를 잇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협박이냐?”

“힘이 없으니 협박당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지금 대한국의 상황처럼 말입니다.”

호영의 그 말에 대천은 또다시 장고에 들어갔다.

과연 누가 옳을 것인가? 현왕을 닮은 왕세자가 옳은 것인가, 아니면 선대 국왕을 닮은 이 왕자가 옳은 것인가?

‘이 녀석만 사라진다면…… 왕국은 안정될 것이다.’

고민을 거듭하다가 그런 생각까지 하였다. 하지만 대천이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리기 무섭게 호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대천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참고로 제가 없으면 조합을 통제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전쟁 용병 2천에 조합의 모험가 3천이 다시 무법자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무서운 협박이 아닐 수 없었다. 조합이라는 강맹한 세력이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는다니……. 소왕국에서 있었던 일이 왕국에서 재현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역성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군부 내부에도 적지 않은 유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더욱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대천은 결국 어떤 것도 선택하지 못하였다.

“원정에서 돌아오면 의용군이라는 군사 조직은 해산시키도록 하여라.”

어떤 것도 결정하지 못한 그는 이 말만을 남긴 채 돌아가야 했다.

대천이 다녀간 이후 더 이상 호영의 행보에 간섭하는 사람은 없었다. 호영이 남진을 준비하며 용병들을 훈련시키는 동안에도 왕족들은 침묵을 유지할 따름이었다.

물론 이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일촉즉발!

그야말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침묵이었다. 만약 왕세자가 명령이라도 내린다면 당장에 내전이 발발하고 마리라.

‘타이밍이 좋군, 때마침 선공을 가해 주다니.’

하지만 시한폭탄이 터지기 직전, 남부에서 비보가 전해졌다. 소왕국 동맹군이 선제공격을 개시하였다는 비보였다.

왕국의 모든 이들이 그 비보를 듣고 분노를 표출할 때 호영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상황은 그가 세웠던 계획보다 훨씬 수월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 * *

돌로 지어진 조그만 성채의 정면으로 대규모 병력이 집결하였다. 수백, 아니 수천은 되어 보이는 어마어마한 대군이었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에 있는 기분이군요, 흐흐.”

대군을 이끄는 지휘관이자 가한국의 국왕인 신진호는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옥주국의 왕 나영석이 진지한 얼굴로 신진호의 말을 받았다.

“그 영화에서 승자는 우리겠지요?”

“하하하! 당연하지 않습니까? 대한국이라고 해 봐야 이빨 빠진 호랑이입니다. 과거에야 강국으로 불렸을지 몰라도 소왕국들이 전쟁을 수도 없이 겪을 동안 대한국만 평화로웠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빨이 무뎌질 수밖에요. 이 전쟁, 우리가 이길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감 넘치는 신진호의 대답에 나영석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과연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하지만 고개를 끄덕인 것과는 반대로 나영석은 속으로 불안해하였다. 그는 승리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것이다.

나영석, 그는 2회 차 때부터 센추리를 플레이 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그가 2회 차 때 가장 경계했던 대상은 서울 전역을 차지하고 김포와 파주까지 영역을 확장한 대한국이었다.

3회 차가 되면서 그의 나라가 충청도로 이전되고 주변에 쟁쟁한 이들이 많아 대한국에 대한 경계심을 낮추게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대한국을 가장 위협적으로 생각하였다.

‘올해 안에는 전쟁이 안 나기를 바랐는데 말이야.’

그런 생각을 하며 쓴웃음을 지었지만, 그렇다고 나영석이 싸움을 피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이왕 시작된 전쟁, 어떻게든 이겨 낼 생각이었다.

전쟁에서 이겨야 독주하는 사자를 무찌를 수 있고, 옥주국의 고토도 회복할 수 있으니 말이다.

“무슨 이야기들을 그렇게 재미있게 나누십니까?”

“……의장님.”

그때 화려한 복장을 입은 20대의 사내가 그들 사이로 다가왔다. 마치 귀공자의 전형처럼 보이는 사내였다.

귀공자처럼 생긴 사내의 정체는 다름 아닌 소왕국 동맹의 의장 자리를 맡고 있는 재벌 3세, 최명헌이었다.

“뭐, 그냥 전쟁에서 승리할지 패배할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최명헌의 물음에 신진호가 살짝 퉁명스러운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나이도 자신보다 다섯 살 이상 어리고 자신보다 강력한 국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진호는 최명헌을 그리 좋게 여기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소왕국 동맹에서 최명헌을 싫어하는 이들은 꽤나 많았다. 무려 세 개의 나라를 합병시킨 인물이니 경계심이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반대로 간신처럼 최명헌의 충신을 자처하는 이들도 적잖이 있었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그 이야기의 결과는 어땠습니까?”

최명헌은 신진호의 퉁명스러운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그리 물었다.

“결과야 처음부터 나왔죠, 우리 동맹군의 승리로.”

“그렇습니까?”

왠지 모르게 미적지근한 대답. 신진호가 그 대답에 인상을 찡그릴 때 나영석이 최명헌에게 물었다.

“의장님께서는 여전히 회의적으로 생각하시고 계신 겁니까, 승리에 대한 가능성에 대해?”

소왕국 동맹에서 모두가 선제공격하자는 의견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대한국과 국경을 맞대지 않는 나라들, 특히 충청도 남부 지역에 위치한 나라들은 공격보다는 방어를 지지하였다. 그리고 최명헌은 충청도의 대전과 세종에 해당하는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남부에 해당한다는 것인데, 남부의 다른 소왕국처럼 그 역시 선제공격에 반대하는 의견을 내세웠다.

전쟁에서는 방어자가 절대적으로 유리한데 안 그래도 불리한 전쟁에서 왜 굳이 선제공격을 해야 하냐며 반대하였던 것이다.

“글쎄요. 회의적이라기보다는 반신반의하는 거죠. 다르게 표현하자면 50%?”

“…….”

최명헌의 답변은 두 사람, 특히 아군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신진호에게 불쾌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신진호는 콧김만 뿜어낼 뿐, 별다른 이견을 내세우지는 않았다.

이미 동맹국 회의에서 지겨울 정도로 설전을 나눈 상황이었다.

공격파와 수비파의 설전. 결국엔 공격파의 승리로 끝났지만 수비파는 여전히 이 전쟁을 회의적으로 바라보았다.

이 전쟁에서 얻을 게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최명헌에게 승리할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최명헌은 전쟁이 시작되려는 지금도 전쟁보다는 전쟁 이후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니 말이다.

“저기, 정찰병이 돌아오는군요.”

어색한 침묵이 흐르던 도중, 최명헌이 정면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가한국의 용사, 즉 신진호의 병사들이 정찰을 마치고 돌아오고 있었다.

“대한국의 병사들은?”

신진호가 자신의 병사들을 향해 물었다.

“성안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적군이 성을 버리고 떠났다는 것이냐!”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병사의 대답에 신진호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러자 팔짱을 끼며 정찰병의 보고를 가만히 듣고 있던 최명헌이 입을 열었다.

“축하드립니다. 무혈입성이네요.”

왠지 모르게 빈정거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최명헌의 말에 신진호가 다시금 얼굴을 붉혔다. 무혈입성이 축하할 일인 것은 분명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만큼 대한국의 대비가 철저하다는 사실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대한국의 대비가 철저하다는 사실은 신진호의 입장에서는 굴욕이라고 볼 수 있었다. 신진호가 일전에 이야기한, ‘대비할 시간도 없이 순식간에 박살 내겠다.’라는 말이 허언이 되었으니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