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
그렇게 호영이 조합의 분점을 세운 지 며칠이 지나자 왕국 전역은 조금씩 안정을 되찾기 시작하였다.
호영의 통제에 따르기 시작한 유저들이 더 이상 어떤 말썽도 부리지 않게 된 까닭이었다.
하지만 이같은 왕국의 안정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내부가 아닌 외부, 정확히는 남부에서 소란이 시작된 것이었다.
* * *
3회 차가 시작되고 현실 시간으로 열흘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자 이번 회 차의 ‘군웅’이 될 사람이 누구인지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히기 시작하였다.
가한국의 왕 신진호, 옥주국의 왕 나영석, 진한국의 왕 최진수 등등. 군웅들은 스물네 개의 소왕국 중 한 곳을 차지하며 센추리에서 조금씩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다.
하지만 같은 군웅이라고 해도 그 사이에 간격이라는 게 존재할 수밖에 없다. 어떤 군웅의 나라는 인구가 8천도 안 되는 반면. 어떤 군웅의 나라는 3만이 넘는 경우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중에서 ‘독보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군웅이 한 명 있었다. 한 나라도 아닌 세 나라를 지배하는 군웅이었다.
백제의 왕 최명헌!
바로 이자가 수많은 군웅들 중에 가장 돋보이는 존재였다.
‘빌어먹을! 나보다 훨씬 늦게 시작한 놈이 어떻게 이렇게 빨리 성장할 수 있는 거야!’
최명헌의 동생, 최진수.
그는 형의 성공에 기뻐하는 아우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형의 성공에 배가 아프고 울분을 느끼는 그런 아우였다.
지금도 최진수는 자신의 형이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소식에 분노하고 있었다. 현실에서 자신보다 잘나가는 게 안 그래도 짜증이 났었는데, 게임에서조차 잘나가니 더욱 짜증스럽게 느껴졌던 것이다.
“젠장! 개 같은 새끼! 초보자의 섬에나 있을 것이지!”
“죄, 죄송합니다.”
갑작스러운 최진수의 욕설에 수하 중 한 명이 얼떨결에 사과하였다. 그런 수하의 모습에 간신히 화를 참아 낸 최진수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 사신이라는 새끼는 어디까지 왔다고?”
“이제 곧…….”
“왕이시여! 백제국의 사신이 왕성에 도착하였습니다!”
때마침 들려오는 병사의 보고에 최진수는 신경질적으로 대답하였다.
“백제국의 사신 따위를 내가 언제까지 기다려야겠어? 빨리 뛰어오라 해!”
국력 차이를 생각하면 감히 백제국을 무시해서는 안 됐지만 최진수는 곧 죽어도 자존심을 굽히지 않을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백제국이 최명헌의 나라인 이상 그는 절대 백제국에게 자존심을 낮출 생각이 없었다.
“아니, 이게 누구야? 주인을 물었던 개새끼 아니야?”
마침내 도착한 백제국의 사신을 보며 최진수는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백제국의 사신입니다. 예의를 지켜 주시길 바랍니다.”
“개 짖는 소리가 시끄럽네?”
그 몰상식한 태도에 백제국의 사신, 임재황의 얼굴이 붉게 변하였다. 마음 같아서는 동맹이고 뭐고 전쟁을 선포하고 싶었다. 만약 그가 제대로 된 사신이라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임재황은 입술만 질끈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국력의 차이는 압도적이었다. 하나 문제는 두 나라의 왕이 형제 사이라는 것이다. 둘 모두 재벌 3세로서 임재황이 감히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상대들이었다.
임재황이 백제국의 사신이면서도 최진수에게 굽히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어쨌든, 전 프로 게이머이자 현 배신자인 개새끼께서는 이곳에 무슨 일로 오셨나?”
인격 모독에 가까운 폭언에 임재황은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최진수 밑에서 오래 있었기 때문인지 가까스로 정신을 부여잡을 수 있었다.
“후우, 우리 백제의 왕께서는 대한국의 침공을 대비하여 24개국이 동맹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런데?”
“……진한국도 동맹에 참여해 주시길 바랍니다.”
“왜 우리가 동맹에 참여해야 하지?”
“방금 말했지 않습니까? 대한국의 침공에 대비하여…….”
“개소리하네. 침공해도 너희를 침공하지 우리나라를 왜 침공해? 나는 너희들처럼 역적질은 안 했어. 대한국에서 인정받은 왕이라는 뜻이지.”
최진수가 빈정거리며 말하자 임재황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하지만 이번 말만큼은 최진수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백제의 최명헌이야 반란을 일으켜 왕이 된 것이지만 최진수는 처음부터 왕이었다.
즉, 정통성을 가졌으니 대한국의 공격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정통성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왕이 유저라는 이유만으로 공격할 것입니다.”
“왜?”
“그들은 NPC이고 우리는 유저들이지 않습니까? 어떻게든 유저를 통제하고자 할 것입니다.”
“유저들을 통제한다고? 그게 명분이 될 수 있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진한국은 어떨지 모르지만 아국의 경우는 유저들에게 불만을 품고 있는 NPC들이 수두룩합니다. 왕족들조차 자신의 나라를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에게 복수하는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쯧쯧, 그러게 통치를 잘하지 그랬어.”
임재황은 자신의 처지가 서럽게만 느껴졌다. 최진수 따위에게 이런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게 너무 서글펐다.
유저는 평민이고 NPC는 노예라는 이분법을 최초로 만든 게 최진수이지 않던가!
“어쨌든 진한국도 공격 대상에서 벗어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전하가 유저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말입니다.”
“…….”
그 말에 최진수도 진지해질 수밖에 없었다.
대한국의 침공! 그로서도 결코 가볍게 볼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아직 전쟁이 선포된 것도 아니고 외교가 완전히 결렬된 것도 아니지만 언젠가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고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유저들부터가 전쟁의 명분을 꾸준히 제공하고 있지 않은가. 대한국의 사신을 찬밥 대우하며 공물을 제공하지 않은 것 말이다.
이렇게 작정하고 전쟁 명분을 만들고 있으니 전쟁은 필연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만약 전쟁이 발발한다면 유저들로선 힘을 합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대한국의 국력이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일단 군사력만 봐도 그렇다. 누가 천 단위의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단 말인가!
유저들 중에서 가장 세력이 크다고 알려진 백제조차 천 단위는커녕 팔백 명 정도가 동원할 수 있는 최대 병력일 것이었다.
다른 나라의 경우는 삼백 명도 동원하기 어려울 것이고 말이다.
‘나도 무리한다면 백쉰, 아니 이백 정도 동원할 수 있으려나.’
평소라면 이백은커녕 백 명도 동원하기 힘들겠지만 주변국과 동맹을 맺어 본진을 수비할 필요가 없어진다면 진한국도 최대 이백 명을 동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대한국과 비교하면 부족하게 느껴졌다. 군사력도 군사력이지만 체급이나 철제 무기, 무공 등을 비교하면 대한국이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백제의 제안은 최진수로서도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그 역시 대한국으로부터 침공을 받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동맹군의 수장 자리는 100% 최명헌 것이겠지?”
“……아직 결정된 것은 없습니다.”
“지랄. 최명헌 그 새끼가 수장 자리를 양보한다고? 흥! 웃기는 소리. 그 새끼, 고고한 척은 존나 잘해서 천한 것들 밑에 있는 것은 절대 용납하지 못하는 놈이야. 실제로 반란 일으켰을 때 반대하는 애들이 많았다며? 아직 이르다면서 말이야. 그런데도 그 새끼는 자신의 같잖은 긍지를 지키기 위해 무모하게 반란을 일으켰지. NPC 따위의 밑에 있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던 거야.”
“……반란은 성공했습니다만.”
“그래서 지금 이렇게 대한국과의 전쟁을 목전에 두고 있지. 명분도 없고, 공물도 바치지 않으니 대한국 입장에서 공격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 아니야?”
“…….”
“아무튼 나는 그 새끼 밑으로 들어가지 않을 거야.”
“전하! 동맹군에 가담하지 않는다는 말씀이십니까?”
“어. 동맹 따위에 내가 왜 가담해?”
임재황이 당황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나라를 멸망시키려는 겁니까! 저희가 당하면 그다음은 진한국이 당하게 될 것인데 어찌 그런 결정을 내리시는 겁니까!”
그로서는 황당하기만 할 것이었다. 대한국의 공세를 막아 내기 위해 동맹을 맺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였다.
솔직히 동맹을 하여도 100% 막아 낼 자신이 없는데 동맹도 하지 않는다면 어찌 나라를 지켜 낸단 말인가.
한 달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게 될 것이다.
‘아무리 형이 싫어도 공과 사는 구분 좀 해라. 이 망나니 같은 놈아!’
상대가 재벌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외쳤을 임재황이었다.
“거참, 시끄럽네. 개새끼라 그런가?”
“……전하, 부디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전하께서도 장난으로 센추리를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장난으로 거절하는 것처럼 보여?”
최진수가 정색하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임재황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마지막으로 물었다.
“전하께서는 동맹군이 이기든 지든 손해를 보게 될 것입니다. 물론 중간에 대한국에게 항복한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목숨은 지킬 수 있어도 왕위는 빼앗기겠죠. 그런데도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으십니까?”
“하, 이 새끼가, 이제는 협박까지 하려 하네? 왜, 동맹군이 이기면 나를 어떻게 해 보려고?”
“……저희가 그럴 생각이 없어도 대세는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 말에 최진수는 피식 웃었다.
“그래? 그럼 이기고서 나를 후회하게 만들어 봐. 어떻게 되나 내가 똑똑히 지켜봐 줄 테니.”
“동맹이 결렬되었으니 저는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등을 돌리고 멀어지는 임재황의 뒷모습을 보며 최진수는 실컷 비웃었다.
“대한국을 이긴다고? 병신 새끼. 지도 2회 차 때 대한국이 얼마나 강한지를 경험했으면서 어떻게 저런 착각을 하냐? 개새끼가 아니라 금붕어 새끼였나?”
최진수는 임재황의 생각처럼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동맹 참여를 거절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의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이성적이었다.
‘혼자서 수백의 오크를 격퇴시킨 괴물이 존재하는 나라야. 전사 쉰 명을 쓰러뜨린 또 다른 괴물도 존재하지. 그런 나라를 오합지졸로 상대하면서 승리를 바라? 풉, 거기에는 유저가 없는 줄 아나.’
그로서는 임재황의 자신감이 우습게만 느껴졌다. 동맹을 만들면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그가 생각했을 때,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숫자라도 압도한다면 모를까, 동맹국을 만들어 봐야 오백 명 정도밖에 차이 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상대는 단일 세력이었고 이쪽은 수십 개의 세력이 연합한 상태에 그 안에는 또 NPC와 유저가 나뉘어 있었다.
이렇게 엄청난 격차가 존재하는데 승리를 자신한다? 차라리 최진수의 진한국이 나머지 스물세 개 동맹국을 이긴다는 것이 훨씬 현실성 있게 느껴졌다.
‘니들은 열심히 삽질을 해라. 나는 니들이 삽질할 동안 새로운 땅을 차지할 테니.’
* * *
충청도의 소왕국들이 동맹을 맺었다는 소식은 호영에게도 전해졌다.
“유저들의 성장세가 너무 빠르다. 충청도의 소왕국 동맹도 동맹이지만 다른 지역의 유저들도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어.”
호영은 혼자 중얼거리며 머릿속으로 지도를 그려 보았다.
현재 가장 큰 세력을 떨치고 있는 것은 당연히 대한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