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131화 (131/345)

# 131

열패밀리의 경우는 아직 숨겨진 비수로서 해야 할 역할이 있었고, 조합에 소속된 유저들은 호영이 강제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니까.

하지만 어찌 되었건 그의 휘하에 그만한 사람이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사람이 많다면 할 수 있는 것도 아주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의 숫자라면 지방의 이계인들을 응징해도 괜찮겠지요?”

“……안 된다.”

“왜 안 된다는 겁니까?”

“지방은 친위대가 담당할 예정이다.”

“저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이계인은 저에게 맡기기로? 그런데 갑자기 친위대가 웬 말입니까?”

호영은 사나운 기세를 피우며 목소리를 높였다. 마치 왕세자를 협박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양새였다.

“아니, 애초에 친위대만으로 지방에 있는 이계인들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들의 숫자가 얼마이며 그들의 정체를 어떻게 파악할지 다 생각하고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강짜를 부리는 것 같지만 사실 호영의 말이 꼭 틀린 것은 아니었다.

처음 유저들이 등장했을 때야 그 숫자가 왕국 전체를 합해도 1천 정도에 불과해서 나름 여유를 부렸던 왕국의 위정자들이지만 지금은 최소가 3천이었다.

그리고 이 숫자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었다.

고작해야 정원이 이백 명도 안 되는 친위대가 지방에 있는 수천 명의 유저들을 통제한다? 그게 가능했다면 지금 이렇게 왕국 전체가 혼란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그냥 저에게 맡기시지요. 현리만 봐도 혼란이 순식간에 수습되지 않았습니까? 지방의 혼란도 빠르게 수습해 드리겠습니다.”

“대신 다른 혼란이 생기겠지.”

“뭐, 그건 어쩔 수 없는 일 아닙니까? 만약 이계인들을 가만히 방치하면 혼란 정도가 아니라 역성혁명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일으키는 혼란은 적어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 않습니까?”

“…….”

이 역시 괜한 소리가 아니었다. 유저들이 위험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로 잃을 것이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었다.

사형? 초보자의 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아깝기는 하겠지만 재미만 충족된다면 한 번쯤 해 볼 만한 경험이었다.

연좌제? 가족애는커녕 가족이 누군지도 모르는 유저들이 허다했다. 대부분의 유저들은 아바타의 가족이 죽는 것 가지고는 눈 깜빡하지도 않을 것이었다.

이렇다 보니 유저들이 갑자기 반란을 일으킨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실제로 대한국 주변에서 유저들에 의해 전복되고 있는 나라가 한둘이 아니었고 말이다.

‘뭐, 대한국이 유저들에 의해 전복될 정도로 약한 나라는 아니지만…… 그래도 왕세자의 입장에서는 위협이 될 수밖에 없겠지.’

호영이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왕세자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지방으로 진출하는 것을 허락해 준다면 너는 내게 무엇을 주겠느냐?”

사실상 항복 선언이었다. 그 역시 호영이 아니라면 유저들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호영은 그런 왕세자를 향해 뻔뻔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왜 무언가를 줘야 합니까? 저하께서 시키신 일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을 뿐인데?”

“정치라는 것은 무엇을 받는다면 무언가를 줘야 하는 것이다.”

왕세자가 나름 엄해 보이는 얼굴로 그리 말하였지만 호영은 조소를 지을 따름이었다.

“하하, 정치요? 제가 아는 정치란 모든 것을 빼앗거나 모든 것을 빼앗기는 것, 둘 중 하나뿐입니다만.”

“…….”

왕세자의 안색이 더욱 나빠졌다. 아니, 이제는 안색이 나빠진 것을 넘어 마치 병자의 그것을 보는 것 같았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기색.

호영은 그런 왕세자를 보며 조소를 지었다.

‘충구의 말이 맞았군. 왕세자가 호구라더니. 진짜 호구가 맞았네.’

충구는 왕세자를 대할 때 ‘강대강’의 전략을 취하라는 제안을 하였다. 상대가 어떻게 나오건 강하게 나가라는 것이었다.

만약 상대가 평범한 위정자라면 이런 전략은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치 선전포고라도 당한 것처럼 극단적으로 반응하였을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충구는 왕세자의 성향을 이미 파악하였다며 강경하게 나가도 괜찮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실제 왕세자를 보니 극단적 상황에 놓일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분노를 표출하기는커녕 주눅 든 얼굴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런 자가 왕이 된다고? 안 될 일이야. 안 그래도 왕족들이 지나치게 세를 넓혀 가고 있는데 이런 양보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왕이 된다면 몇십 년만 지나도 왕은 허울뿐인 존재가 될 것이야. 마치 봉건제의 왕처럼 말이지.’

왕세자는 분명 수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업무 능력이나 사람들을 포용하는 능력 같은 것은 호영보다 훨씬 뛰어날 수도 있다. 정통성도 누가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였고 말이다.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다면 왕세자는 천성적으로 ‘다툼’을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만약 누군가와 다툴 일이 생긴다면?

마치 성인군자라도 되는 것처럼 먼저 양보해 준다. 설령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할 일이 생기더라도 싸움에 임할 생각보다 피할 생각을 먼저 하였고 말이다.

그렇게 양보에 양보를 거듭하다 보니 호영이 조합을 만들고서 왕세자의 권력을 위협하고 있음에도 아무런 대처를 하지 못한 것이었다.

“어쨌든 저는 지방으로 진출할 것입니다. 혹시 허락하지 않는다면 지금 말씀해 주시지요.”

“…….”

“말씀이 없으시니 허락한 것으로 알겠습니다. 저는 그럼 분점을 설치할 준비를 하러 가겠습니다.”

왕세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호영은 피식 조소를 지으며 접대실을 나섰다.

* * *

홀로 남은 접대실에서 왕세자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비통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우애가 남달랐던 형제였다.

형은 머리 쓰는 재능이 뛰어났고, 아우는 몸을 쓰는 재능이 뛰어났다. 그래서 과거에는 이런 약속도 하였었다. 형은 왕이 되고 아우는 대장군이 되겠다는.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이 약속은 지켜질 것만 같았다. 형은 왕세자로서 경험을 쌓아 갔고, 아우는 수도 방위군의 책임자가 되어 대장군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

‘역시 장인어른의 말을 듣지 말았어야 했나…….’

군사부의 수장, 이현진.

그가 왕세자를 설득하였다. 아우를 잠시 외직에 임명하라고. 이계인들을 통제하는 역할이라면 적당할 것 같다고 말이다.

당연히 왕세자는 반대했다. 그는 아우를 의심하는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른 이들이 아우를 의심한다 해도 왕세자만큼은 아우를 절대적으로 신뢰하였다.

하지만 이현진은 아우가 ‘이계인’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물론 증거는 하나도 없었고 단지 아우가 이계인이라면 가장 위협적일 것이라며 그런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이현진의 계속된 설득에 왕세자는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내전이 발발할 것이다.’, ‘왕족들이 위협을 느끼고 있다.’라는 이현진의 말에 왕세자 역시 위기감을 느낀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아우를 외직에 임명하니 상황이 좋아지기는커녕 악화되었다. 아우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아우는 점점 공격적으로 변해 갔다. 그러다 결국 사고가 터졌다. 아우가 민심을 장악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왕과 왕세자가 멀쩡히 살아 있는데도 민심을 장악한다는 것은 제아무리 왕세자라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일.

그래서 아우를 왕성으로 불러들였다. 둘 사이의 오해를 풀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아우의 반응을 보니 ‘늦었다.’라고밖에 생각하기 어려웠다.

형이 아닌 ‘적’을 바라보는 눈빛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세자는 아우의 낯설게까지 느껴지는 변화를 보며 후회하였다. 이현진의 말을 듣지만 않았더라면…… 아우를 끝까지 믿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아니, 누구를 원망하는가. 다 내 잘못이거늘.”

* * *

왕세자를 만난 이후 호영은 한층 더 과감하게 움직였다.

우선 동휘에게 상계를 집어삼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동휘는 현재 조합 직속의 상단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벌써부터 현리를 넘어 지방 곳곳으로 영향력을 확장시키고 있었다.

조합의 상단은 많은 것을 다루었다. 기존의 상단이 다루던 쌀이나 소금, 가죽 따위부터 그동안 모험가들을 시켜 모아 두었던 약초와 철제 농기구 그리고 생산직 유저들이 만든 각종 귀금속까지.

당연히 기존의 상단들과는 경쟁이 되지 않았다. 이쪽은 폭리를 취하지도 않았고 여론을 등에 업고 있었다. 더군다나 노동력도 남아돌았다.

돌풍을 일으키며 확장을 거듭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수순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상계를 집어삼키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벌써 기존의 상단들 중에 큰 타격을 입어 몰락 직전이 되어 버린 곳도 있었으니 말이다.

호영은 이렇게 왕국의 상계를 재편성하고는 또다시 새로운 행보를 준비하였다. 바로, 조합의 대규모 확장이었다.

현재 지방의 유저들은 한창 방황하고 있었다. 주변에 있는 나라의 유저들은 쿠데타를 일으키거나 이미 일으켜 왕국을 전복시킨 상태였다.

그리고 왕국의 지도자가 된 유저들은 내실을 가꾸고 힘을 키우며 마치 땅따먹기 게임을 하듯, 정복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한국에서는 어떤 유저도 쿠데타를 일으키지 못하였다.

일단 대한국의 크기가 너무 컸고, 핵심 권력층에 닿아 있는 유저가 아무도 없었다. 무엇보다 대한국에는 무공이라는 것이 존재하였다.

친위대라는 군사 조직에 무공을 익힌 무인들이 수백 명이나 있다 보니 유저들로선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일으켜도 단숨에 진압될 것이고 말이다.

결국 대한국의 유저들은 다른 유저들처럼 땅따먹기나 도시 키우기 같은 재미를 느끼지 못한 채 부랑자처럼 떠돌아다녔다.

물론 아바타의 삶을 그대로 살아가는 유저들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중세의 삶은 현대의 삶보다 훨씬 지루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유저들은 아바타의 삶을 포기한 채 왕국 전역을 떠돌았고 그러다가 비명횡사하거나 아니면 살인, 도적질, 강간 등을 하며 온갖 사건 사고를 일으켰다.

호영으로선 왕족들의 견제를 받더라도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뭐, 애초에 왕족들의 견제를 두려워하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아무튼 호영은 무법자처럼 행동하는 유저들을 제압하기 위해 자신의 통제에 따르는 유저들을 동원하였다.

마치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한다는 이이제이 전략처럼 유저로 유저를 제압하려는 것이었다.

이같은 호영의 전략은 기대 이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왕국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유저들이 자발적으로 조합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대한국의 유저들은 호영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지쳐 있는 상태였다. 병사들에게 추격당하는 상황도 심적으로 부담스러웠고, 제대로 먹지도 씻지도 못한다는 것이 유저들로 하여금 지치게 만들었다.

그들은 즐기려고 게임을 하는 것이지 고통받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호영이 조합의 분점을 설치하자마자 조합으로 달려갔다.

이는 조합에 가입하기 위함이었는데 유저들은 조합의 시스템을 보고 크게 만족하였다. 비로소 게임다운 게임을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