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
“벌써 3회 차가 시작된 지도 사흘이 지났어. 센추리 시간으로는 열흘 가까이 지난 셈이지.”
자리에 앉기 무섭게 센추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드는 호영. 그러자 원탁에 앉아 있던 20, 30대의 청년들이 무게감 있는 얼굴들을 하며 호영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제 우리도 슬슬 움직여야 할 시점이야. 더 이상 지켜볼 수만은 없으니. 모두, 안 그래?”
“그렇습니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수하들의 대답을 들으며 호영은 고개를 우측으로 돌렸다.
“윤 이사.”
“예, 사장님.”
“이사가 관리하는 전투대는 어때? 무공은 회복했대?”
호영은 가장 먼저 원목을 불렀다. 올해 40살인 윤원목은 현재 로열 가드의 이사이자 전투대의 총책임을 맡고 있는 인물이었다.
로열 가드는 호영이 충구의 조언에 따라 설립한 경비 업체였는데 업계에서 가장 큰 4대 업체까지는 아니어도 10대 업체 안에는 들 정도의 규모를 가진 경비 업체였다.
참고로 전투대는 2회 차에서 친위대에 소속되어 있었던 유저들이 중심으로 있는 조직을 뜻하였다.
일종의 ‘무력’을 담당하는 조직이었는데, 이 전투대에 소속되어 있는 유저들 중 일부는 로열 가드의 직원이기도 하였다.
“전투대에 소속되어 있는 유저들은 대부분 튜토리얼에서 좋은 성과를 보았습니다. 덕분에 우수한 아바타를 선택하여, 무공 회복도 무척이나 순조롭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2회 차 때의 무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행이군. 앞으로도 무공 회복에 중점을 둬. 그리고 유저 티는 최대한 내지 않게 하고. 전투대는 나의 비밀 무기가 되어야 하니까.”
“예, 알겠습니다.”
“다른 변동 사항은 없고?”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 있다면 김성근이 유저인 것을 스스로 밝힌 일인데…….”
원목이 말끝을 흐리자 호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여전히 사고뭉치에 천방지축으로 불리는 김성근이었다. 분명 유저라는 사실을 밝히지 말라고 이중 삼중으로 경고했건만 며칠이 지났다고 스스로 공개하다니.
“김성근은…… 내가 관리할 것이니 더 이상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이를 갈며 그렇게 말하니 원목이 희미한 웃음을 짓고는 자리에 앉았다. 다음에 호영이 지목한 사람은 원재였다.
“우 팀장.”
“네.”
“유저들을 찾아내는 것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현재 유저임이 증명된 사람은 모두 사백스무 명으로 수도에는 이백일흔아홉 명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내 휘하에 들어올 만한 유저는 얼마나 될까?”
“일단 사장님이 NPC로 알려져 있어서 그리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김성근을 얼굴마담으로 삼는다면?”
“음, 그렇다면 유저들이 제법 합류할 것 같습니다. 김성근은 유저들 사이에서 꽤나 인기 있는 사람이니 말입니다.”
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끄럽고 말썽을 곧잘 부리는 사내였지만 유명해질 수밖에 없는 캐릭터가 바로 김성근이었다.
박력 넘치고 파워풀 하며 심지어 외모까지 장비와 비슷하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군대식으로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
“물론입니다. 만약 2회 차 때처럼 강하게 통제하는 대신 그에 상응하는 권력이나 재물을 줄 수 있다면 모를까, 사장님의 권한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무공을 준다면?”
“물론 무공으로 유혹한다면 통제에 따를 유저들이 많아지기는 하겠지만…… 왕족들이 반발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호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뭐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군.’
수도 방위군이라는 군사력을 잃었으니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얻어야 했다. 하지만 NPC로 알려진 그가 유저들의 마음을 얻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권력이라도 손에 쥐고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는 무공을 베푸는 것조차 마음대로 못하는 일개 왕자에 불과하였다.
‘하긴, 이러니까 왕세자가 나에게 유저들을 통제하라고 명령한 것이겠지.’
4년. 호영이 유저들을 통제하느라 4년을 허비할 때 왕세자는 착실하게 왕이 될 준비를 할 것이다.
아니, 4년까지 갈 필요도 없이 2년 안에 모든 준비를 끝마치리라.
“그렇다면 유저들을 어떻게 통제하면 좋을 것 같으냐?”
“스스로의 선택에 맡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자유를 원하는 자에겐 자유를 주고, 만약 야망을 가진 자가 있다면…… 반란에 동조하게 만드는 겁니다.”
“유저 수가 최소 수천 명은 될 것이니 그중에 야망을 가진 자가 적지 않기는 하겠지. 그런데 자유를 원하는 자에겐 자유를 주라니? 내가 그들을 통제해야 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데 자유를 어찌 줘?”
“어차피 통제할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농사를 지으라고 할 수도 없고 어디 전쟁에 보낼 수도 없고 말입니다.”
“그러니 방치하라는 말이냐?”
“방치라기보다는…… 철저하게 유저로 대하십시오. 다른 게임에서 NPC가 유저들을 대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퀘스트를 주거나 물건을 거래하는, 그런 방식으로 말이냐?”
“예, 그것이 최선의 방도라고 생각합니다.”
“……일종의 용병이라 보면 되겠군.”
호영은 원재의 의견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유저를 통제할 방법이 마땅히 없었는데 ‘용병’으로 대우한다면 최소한의 통제는 될 것 같았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호영은 원재에게 격려해 주었다.
“좋은 생각이야.”
“감사합니다.”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그렇게 대답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는 원재였다. 호영은 그런 원재를 보며 싱긋 웃다가 시선을 돌려 민건우를 바라보았다.
“민 이사.”
“예, 예!”
이런 자리가 익숙하지 않은 것인지 민건우가 어색하게 대답하였다.
“대한 길드의 상황은 어떻지?”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같습니다? 내가 그런 식으로 보고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아, 죄송합니다.”
호영의 엄격한 목소리에 건우는 울상을 지으며 사과하고는 재차 설명을 이어 나갔다.
“땅이 커져서 관리해야 할 범위가 넓어지기는 했지만 길드의 규모 역시 커졌기 때문에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애초에 본 게임처럼 적수라고 할 만한 이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특별한 일은 없나?”
“강북제패라고 기억하십니까?”
건우의 물음에 호영은 작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자신이 처음으로 현실의 안전을 걱정했던 그 기억이 말이다.
“조폭들 말하는 건가? 본 게임에서 만났던?”
“예, 저를 초보자의 섬에 가게 만든 작자들인데, 아무튼 그자들이 우리 대한 길드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어떤 도움을?”
“자신들의 사업장에 무인들 좀 파견해 달라는 그런 요청이었습니다.”
“허, 나를 죽이겠다고 협박하던 놈들이 그런 요청을 하다니.”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호영이 그렇게 중얼거리니, 옆에서 갑자기 ‘쾅!’ 하는 소리가 났다. 원목이 테이블을 내리치며 벌떡 일어선 것이었다.
“두식이 파, 그놈들이 감히 사장님을 협박했다는 말씀이십니까?”
“……게임에서 있었던 일이다. 근데, 두식이 파라고? 윤원목 이사는 그자들을 어떻게 알지?”
“작년에 빌라 근처를 집적거리기에 한번 손봐 준 적이 있습니다.”
“……그래?”
처음 들어 보는 이야기였기에 호영은 제법 당황하였다. 강북제패의 유저들이 진짜 현피를 시도하려고 했을 줄이야.
그리고 그 현피가 원목의 손에 무산되었다는 것도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도대체 저 양반은 정체가 뭘까?
“아무튼 그놈들을 다시 손봐 줘야 될 것 같습니다. 감히 사장님을 노리다니. 진즉에 알았으면 그 정도로 끝내지는 않았을 텐데!”
“……일단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
호영은 평소 과묵한 성격답지 않게 과도하게 흥분하고 있는 원목을 가까스로 진정시키고는 건우에게 물었다.
“무인을 파견해 달라는 이유가 정확히 뭐야?”
“왜놈들이, 아니 일본 놈들이 계속 쳐들어온답니다.”
“일본? 내가 다른 나라의 유저들을 최우선적으로 통제하라 말했을 텐데?”
“아무래도 유흥가 같은 곳은 대한 길드만으로 통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솔직히 사냥터를 지키는 것도 버거운 일이라서…….”
“하긴, 도시 크기의 사냥터를 통제하기란 쉽지 않겠지.”
그 변명 아닌 변명에 호영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 납득하지 못했다 해도 애초에 유흥가 따위가 어떻게 되건 호영의 알 바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 정도의 일은 민 이사가 알아서 하도록.”
호영은 결국 그렇게 말하고 관심을 끊었다.
어차피 초보자의 섬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민건우였다. 길드의 사정이나 형편에 대해서는 민건우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터.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면 민건우가 자체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여러모로 효율적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엔터테인먼트는 잘되고 있지?”
참고로 건우는 대한 길드의 길드장인 동시에 로열 엔터테인먼트의 이사였다.
“회사 일은 저에게 물어보셔도 아는 게…….”
물론 엔터테인먼트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이사였지만 말이다.
“로열 엔터테인먼트는 작년에 갑자기 시작되었던 세무조사가 끝난 이후 줄곧 순항 중에 있습니다.”
건우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끝을 흐리자 건우와 마찬가지로 로열 엔터테인먼트의 이사직을 맡고 있는 강충구가 대신 답했다.
“작년보다 잘되고 있다는 건가?”
“수익은 여전히 보잘것없습니다만 인지도는 확실하게 올라가고 있습니다. 아마 TV를 켜면 익숙한 얼굴들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광고에서든 드라마에서든 말이죠.”
특유의 자신감 어린 목소리를 들으며 호영은 흡족한 얼굴을 하였다.
“애초에 엔터테인먼트를 인수한 목적이 인지도를 얻기 위함이었으니 수익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런데 강 이사.”
“예, 말씀하시지요.”
“요즘 여자 연예인들을 꽤나 열심히 섭외하려 하던데? 센추리는 이제 지겹나 봐?”
“……흠흠, 죄송합니다. 제가 워낙 걸 그룹을 좋아해서…….”
무표정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충구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웃겼다.
‘충구에게도 저런 모습이 있었나?’
자신처럼 영락없는 게임 폐인인 줄 알았는데…….
호영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이내 화제를 전환하며 물었다.
“그렇게 여유를 부린다는 것은 계획이 세워졌다는 뜻이겠지?”
그가 묻는 계획이라는 것은 왕위를 탈취할 명분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계획을 세우긴 했습니다.”
“어떤 계획이지?”
“유저들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유저들을?”
“예. 아까 우 팀장이 말한 것과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데, 간단하게 말해서 유저들로 유저들을 제압해 명성을 쌓는 것입니다.”
충구의 의견에 호영은 자신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가능성의 여부가 문제였다.
“저는 애초에 사장님이 유저들을 통제하는 역할을 맡게 된 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왜냐하면 손쉽게 세력을 기를 수 있으니 말입니다.”
“수도 방위군의 책임자로 있을 때도 유저들은 얼마든지 통제할 수 있었다. 로열패밀리가 있으니까.”
“하지만 공개적으로 세력을 키우기는 어려웠겠죠. 유저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안 되니 말입니다. 그래서 전투대의 유저들에게도 조용히 힘을 키우라고 하신 거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