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
하지만 아쉽게도 종교는 만들지 못하였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대왕이라는 존재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변수를 예측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오만하기 짝이 없던 대왕인데 신에게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소리까지 듣는다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종교가 어찌 변질될지도 예상할 수가 없고.’
어찌 되었건 그같은 이유들로 종교를 만들지 않았더니 유저에 대한 평가가 정반대로 엇갈리는 것 같았다.
“장인어른, 아니 대군사님.”
“예, 저하.”
의견이 엇갈리며 조금씩 고성이 오가기 시작하자 대향이 누군가를 불렀다. 그가 부른 사람은 바로 대군사, 이현진이었다.
“대군사께서는 이계인들을 어찌 대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감히 저하의 물음에 답변해 보자면, 소신은 그들을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통제한다는 말씀은 구금해야 한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구금하는 것은 지나친 행동이고, 단지 그들을 정책적으로 확실하게 제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의외로 평범한 의견이었다. 대향도 그의 답변이 기대에 못 미쳤던 것인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들이 반발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반발은 하겠습니다만, 혜택을 준다면 통제에 따라 줄 것입니다.”
“혜택이라면?”
“현물을 지급해 주거나 약간의 자유를 보장해 주면 될 것 같습니다.”
“과연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까?”
“소신의 부족한 생각으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에 불만을 가질 이계인들은 많을 것입니다. 그들은 성격이 오만하여 다른 세계의 존재이면서도 우리 세계의 주인이 되려고 하는 작자들이니 말입니다. 아마 반란을 일으키거나 범죄를 저지르는 일으키며 왕국에 혼란을 줄 것입니다. 그래서 소신은 왕국의 통제에 따르는 이계인들로 분란을 일으키는 이계인들을 진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설명이 끝나자 친위대 간부 중에 한 명이 발끈하며 이견을 내세웠다.
“굳이 그렇게까지 번거롭게 할 필요가 있습니까? 통제에 소요되는 인력이나 자금은 어찌 마련할 것이며, 그들이 단체로 반란을 저지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차라리 이계인들이 개개인으로 나뉘어 있는 지금, 철저하게 색출하여 제거하는 게 가장 효율적입니다.”
이에 동조하여 다른 간부가 말했다.
“이계인들은 무공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친위대가 가진 무공보다 강력한 무공을 보유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애초에 친위대원 중에 그들이 있을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일반 병사들보다 강할 것이 분명한 그들을 제어하겠다는 것은 지독히 오만한 발상입니다!”
그 말에 호영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는 말을 하는군. NPC가 유저들을 통제한다고? 감히?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회귀 전에도 유저들을 적대하던 NPC가 있었지만 8회 차 될 때까지 주도권을 빼앗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NPC 중에 고위직으로 살아남은 자는 있어도 왕국의 지도부는 언제나 유저들의 것이었다는 뜻이다.
‘사실 이번에도 주도권은 유저들의 것으로 넘어왔어야 했다. 늘어난 인구 이상으로 유저들의 숫자 역시 폭증하였으니까. 그런데 아직까지 왕국을 장악하지 못한 것은 어떻게 보면 나 때문이지.’
계획대로 되었다면 왕국은 이미 그의 것이 되었어야 했다. 그의 휘하에 있는 유저 숫자만 해도 수백 명이나 되었고, 그 수백 명의 유저들은 왕국에서 명문으로 통용되는 가문들의 아바타를 보유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대한국이 왕족들의 세상이라는 것이었다.
조회에 참석한 인사들만 봐도 이씨 가문과 신씨 가문 그리고 봉씨 가문 같은 일종의 ‘진골’ 가문들을 제외하면 오직 왕족들뿐이었다.
100년 전, 무수히 많은 공을 세웠던 친위대 유저들의 후손들은 고작해야 친위대원 또는 중앙군 백인대장 정도가 출세할 수 있는 한계였다.
이처럼 왕족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왕족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호영뿐이었다. 그가 튜토리얼에서 1등을 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조금 서툴렀다. 왕은 무력이 가장 강한 사람만이 될 수 있다는 유지를 남겼으면 그냥 능력치를 보고 뽑기만 하면 되는 건데……. 하기야 애초에 대한국이 이 정도로 문명을 발전하리라고는 예상하기 힘들지.’
그렇게 호영이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이현진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반론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통제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무공이 있으니까!”
“…….”
“100년 전에도 그러했듯, 앞으로 환란의 시대가 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환란의 시대를 통과하려면 이계인들의 조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들의 무력, 그들의 지식이 없으면 우리 대한국은 도태되고 말 겁니다! 100년 전에 수인들이 그러했듯이!”
이씨 가문의 가주이기 때문일까, 그의 말에서는 설득력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사람들은 조금씩 그의 말에 설득되었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 그들을 통제할 방법이 없습니다, 대군사.”
“방법이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어떤 방법을 말하는 겁니까? 이계인들은 왕국의 법도도 무시하는 작자들인데?”
“무법자처럼 행동하는 이계인들이라 해도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는 굴복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힘으로 그들을 어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지 않습니까?”
“유일하게 가능한 사람이 이곳에 있지 않습니까, 왕국 제일의 무인이라 불리는 사람이?”
대신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현진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몇몇 대신들은 눈을 빛내고 있었다. 이현진의 생각을 눈치챈 것이었다.
그리고 호영 역시 이현진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차렸다.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이현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 왕자 저하, 왕국 제일의 무인이신 왕자 저하께서 나서 주십시오. 왕자 저하께서 나서 주신다면 이계인들도 통제에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결정타였다. 더 이상 이현진의 말에 의문을 표하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부담스러운 눈으로 호영을 바라볼 뿐이었다.
‘젠장, 처음부터 이러려고 부른 거였나. 숙맥인 줄만 알았더니…….’
호영은 눈을 질끈 감고 있는 왕세자를 노려보았다.
계획적인 함정이었다. 유저를 통제한다는 명목으로 수도 방위군이라는 자신의 군사력을 제거하기 위한 치졸한 함정이었던 것이다.
순간 짜증이 난 호영이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겉으로 태연한 척하며 이현진의 말에 긍정하였다.
이제부터 유저들을 통제하는 것은 오롯이 그의 책임이었다.
#모험가 조합
왕궁을 나와 수도 방위군의 병영이 있는 외성으로 향하는 동안 호영의 굳어진 얼굴은 풀릴 줄 몰랐다.
“대장님.”
“왜 부르지?”
걷는 도중 명회가 부르자 호영이 퉁명스럽게 대꾸하였다.
“이계인들을 통제하라는 것은 대장님을 견제하기 위함이 아닌가 싶습니다.”
“…….”
“국왕 전하의 용태를 생각했을 때 앞으로 1~2년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합니다. 그런데 대장님은 왕세자 저하의 일방적인 명령으로 4년 가까이를 헛되이 낭비하셔야 합니다. 왕위 경쟁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이계인들 때문에 말입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왕세자 저하의 명령을 무시하십시오.”
호영은 걸음을 멈춘 채 명회를 노려보며 말했다.
“감히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하다니. 왕실이 우습게 느껴지더냐?”
“소신이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단지 이대로 있으면 대장께서…….”
“시끄럽다. 너의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할 테니, 더는 얘기하지 마라.”
호쾌하고 쾌활한 성정의 대진답지 않게 엄격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호영은 휙, 고개를 돌려 명회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재차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다면…… 소신도 데려가 주십시오.”
웅얼거리는 목소리. 호영이 듣지 못한 척 무시하니 명회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소신도 데려가 주십시오, 대장!”
“하.”
호영은 헛웃음을 짓고는 명회를 바라보았다. 평소 몸을 움츠리며 동태눈을 하고 다니던 명회가 목을 빳빳이 세운 채 당당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안 하던 짓들을 하는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대장, 아니 이 왕자 저하를 따르고 싶습니다.”
“왜? 수도 방위군에 남아 있는 게 훨씬 나을 텐데?”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슨 기회를 말하는 거지?”
“이 나라를 바꿀 수 있는 마지막 기회…….”
휘이익!
불경하기 그지없는 명회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호영의 창이 돌연 명회의 목을 겨누었다.
“네놈……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
“왕자 저하께서 가시려는 길, 소신도 따라가고 싶습니다. 부디 함께하게 해 주십시오.”
“군사부에서 시키더냐, 나를 역적으로 만들라고!”
쿵!
명회가 갑자기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소신은 군사부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비록 소신이 군사부에 잠깐 있었던 적은 있지만, 말 그대로 잠깐뿐입니다. 그들의 냉대와 차별에 질려서 제 손으로 직접 나왔습니다.”
“차별?”
“소신의 성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건 갑자기 왜 묻지?”
“소신은 이씨 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
이씨 가문의 일원이라는 말에 호영의 말문이 턱 막혔다. 여기서 이씨 가문이 왜 나온다는 말인가?
명회는 명씨 성을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었던가?
“이씨 성을 가졌음에도 명회라는 이름만 고집했던 것은 소신에게는 이씨 성을 사용할 자격이 없어서였습니다.”
“…….”
“이 왕자 저하께서도 사생아를 향한 시선이 어떤지를 알고 계실 겁니다. 소신이 바로 그 사생아입니다.”
그 말에 호영은 표정을 굳혔다. 그의 아바타, 대진은 서자였다. 일개 시녀의 몸에서 태어난 서자였던 것이다.
호영은 잠시 말문을 잃은 듯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정색한 채 말했다.
“네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는 알겠다. 하지만 나는 이 나라를 바꿀 생각이 없다.”
“……그렇다면 소신을 이 자리에서 죽여 주십시오.”
“내가 왜 네놈을 죽여야 한다는 말이냐?”
“역적이지 않습니까?”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고개만 들고서는 자신을 죽이라고 외치는 명회. 그런 명회를 보며 호영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제 그는 선택을 해야 했다.
명회를 죽일지, 살릴지를 말이다.
‘죽일 필요는 없다. 만약 이 모든 게 연기라면 그때 가서 응징하면 되니까.’
잠시 고민하던 그는 결국 창을 거두어들였다.
“일어나라.”
“소신을 받아 주시는 것입니까?”
“지금까지 능력을 감추었겠지? 이제부터 숨김없이 보여 봐라, 능력에 따라 어찌 쓸 것인지를 결정할 것이니.”
“……가, 감사합니다. 충심을 다하겠습니다, 저하!”
쿵!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그렇게 외치는 명회였다.
* * *
1월 18일.
회의실
호영은 회의실이라 적혀 있는 곳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호영이 처음 느낀 것은 엄청난 적막감이었다. 분명 사람들이 있는데도 마치 도서관처럼 조용한 분위기였다.
“오셨습니까, 사장님!”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호영의 등장에 자리하고 있던 사람들이 벌떡 일어서서 인사를 건넸다는 점이었다. 호영은 사람들의 인사를 받아 주고는 상석에 마련된 자신의 자리에 가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