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
#왕자, 대진
‘이게 좋겠군. 도박이 될 수도 있겠지만.’
신중하게 아바타를 고르던 호영은 마침내 선택을 끝마쳤다. 그리고 그가 선택을 끝마치기가 무섭게 본 게임이 시작되었다.
갑자기 순간 이동을 하여 전혀 다른 장소에서 눈을 뜨게 된 호영!
신체조자 달라진 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채 1회 차, 2회 차에서 그랬듯이 자연스럽게 정보부터 파악하였다.
아바타의 지위는 어떠한지, 가진 스킬은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대한국은 어떻게 변했는지……. 필요하다 싶은 정보는 모조리 수집하였다.
‘생각 이상으로 발달했는데? 충구가 세운 백년대계가 통한 것인가.’
유저가 간섭할 수 없는 100여 년의 시간.
오직 NPC들에 의해 사회의 변천이나 흥망이 정해지기 때문에 변수가 많았다. 100년이라는 시간도 결코 짧지 않았고 말이다.
그래서 호영은 겉으로 태연한 척하였지만 걱정이 없지는 않았다. 회귀 전에 이미 ‘역사’에 배신당한 경험이 있는 그였기에 더욱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대한국’의 역사를 확인하니 걱정은 사라지고 웃음만 나왔다.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발전했기 때문이다.
호영의 아바타였던 대왕부터 시작하여 4대째인 지금의 국왕에 이르기까지, 대한국은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인구부터 영토, 군사력까지 모든 게 순조로이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미소를 짓던 호영의 얼굴이 ‘개인 정보’를 읽기 시작한 순간, 급격하게 썩어 들어갔다.
‘내가 왠지 아바타를 잘못 선택한 것 같다는 거다.’
* * *
“대한국의 발전은 정말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섬을 제외하면 경기도 전역을 차지한 것과 마찬가지고 충청도, 강원도 일부와 북한 지역인 개성까지 세력을 확장했더군요.”
“우리 후손들이 생각보다 잘해 주었어. 영토도 영토지만 그 외의 발전도 엄청나니.”
충구가 감탄하는 목소리로 대한국의 발전에 대해 이야기하자 호영도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확실히 3회 차의 대한국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발전해 있었다. 일단 외형, 즉 영토나 인구부터가 엄청나게 확장된 상태였다.
2회 차의 현리 시절과 비교하면 영토든 인구든 최소 10배 이상으로 성장했다고 봐도 좋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고작 100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대한국에 철기 문화가 보급되어 철제 농기구와 철제 무기를 만들며 철제를 자체 생산, 보급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청동기시대를 건너뛴 것과 마찬가지였다. 고작해야 100년 사이에 말이다.
그리고 시대를 뛰어넘은 것은 또 하나 있었다. 바로 종이였다. 비록 나무로 만드는 종이가 아니라 마물의 배변으로 만드는 종이라 질이 좋다고 말하기는 힘들었지만 어쨌든 종이는 종이였다.
양피지나 죽간보다는 훨씬 장점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대한국의 학문과 문화가 급격하게 발전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종이 덕분이었다.
철제와 종이 이외에도 의식주 면에서 큰 변화를 보였다. 의식주의 변화를 보면 2회 차처럼 극히 일부만 중세로 돌입한 것이 아닌, 거의 모든 면에서 중세 시대로 돌입한 것 같았다.
“무엇보다 마법사들이 늘어났더군요. 제가 생각하는 마법사들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충구는 감탄을 멈추지 않으며 말했다.
“네가 생각하던 마법사는 뭐였는데?”
“음, 전투 마법사라고 해야 될까요? 전장에서 마법을 뿌리며 활약하는 그런 마법사들 말입니다. 물론 전투 마법사가 아닌, 연구에만 집중하는 마법사라도 장족의 발전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겠지만.”
2회 차에 극소수만 살아남았던 마법사들은 3회 차에 이르러 숫자가 상당히 늘어났다. 그리고 마법사들은 호영이 기대했던 ‘아티팩트’를 조금씩 만들어 가고 있었다.
아직은 일상에서든 전투에서든 가격 대비 성능이 맞지 않아 연구에만 집중하고 있었지만, 회귀 전이었다면 6회 차까지는 거의 멸종했을 마법사가 3회 차인 지금 멀쩡히 존재한다는 건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충구가 말하는 전투 마법사보다 아티팩트를 생산하는 마법사들이 훨씬 귀중하지. 무공이 절대적인 기준으로 자리 잡는 동양이라면 더욱더 그럴 것이고 말이야.’
어찌 되었건 대한국의 발전은 여러모로 대단하였다. 백년대계를 세웠던 충구조차도 놀라워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호영의 얼굴은 충구와는 다르게 무덤덤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너의 말대로 모든 게 기대 이상이기는 해. 외향도 무척이나 커졌고, 문명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발전했으니까.”
“…….”
충구는 무언가 직감한 듯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런 충구를 보며 호영은 한참이나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다만 문제는 내가 왕이 아니라는 거지.”
“……하아.”
호영의 한마디에 훈훈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깨져 버렸다.
“정말, 사장님이 왕이었다면 모든 게 완벽했을 텐데요…….”
“말했잖아, 어쩔 수 없었다고.”
“하아, 그렇기는 하지만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네요. 최소한 왕세자라도 되었다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아직까지도 아쉬움을 떨쳐 내지 못하는 충구였다. 하지만 충구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호영이 대한국의 지도자가 아니라면 유저로서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NPC에 불과한 이에게 충성을 바칠 수도 없고 말이다.
“나 역시 그 정도로 선택에 실패할 줄은 몰랐다. 아니 애초에 지금 같은 시대에 체력적으로 나약한 아바타들이 왕과 왕세자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
호영은 변명 아닌 변명을 하였다. 자신이 왕이나 왕세자를 선택하지 못했던 이유를 설명한 것이다.
3회 차의 튜토리얼에서 1등을 하여 모든 아바타의 선택권을 획득한 호영은 2회 차 때 그랬던 것처럼 우월한 스텟을 가진 아바타를 선택하였다.
왕국이 세워진 이상 스텟보다는 직위나 신분 같은 사회적 요소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아쉽게도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스텟뿐이다. 그렇기에 그는 스텟을 보고 아바타를 고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1등의 혜택으로 왕만이 가질 수 있는 ‘왕의 권한’의 유무는 알 수 있었다. 즉, 다른 것은 몰라도 왕을 선택하는 것은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호영은 불가피한 이유로 왕을 선택하지 못하였다.
이유야 간단했다.
이름 : 대척
나이 : 57
근력 : 11
체력 : 6
민첩 : 12
지력 : 38
마력 : 19
57세라는 나이. 제아무리 왕이라 해도 나이는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호영이 ‘대척’을 선택하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는 나이보다 체력 때문이었다.
고작 ‘6’에 불과한 체력. 체력이 6이라는 것은 빈약한 수준을 넘어섰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병자와 다를 바 없는 체력이었다.
호영이 비록 세 개의 특전을 가지고 있다지만 이 정도의 스텟으로는 친위대원 한 명을 상대하는 것도 힘들 것이었다.
그렇기에 호영은 대척이라는 아바타가 왕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선택하지 않았다. 왕세자의 경우는 애초에 표시가 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고 말이다.
“어떻게 보자면 군주의 무력이 더 이상 중요치 않은 시대가 온 것이라 볼 수 있겠죠. 문치의 시대가 열려 가는 과정 중에 있으니까요.”
충구의 말에 호영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동의하지는 않았다.
대한국이 아무리 발전했어도 무력은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센추리는 여전히 약육강식의 세계였으니 말이다.
“아무튼 군주의 무력이 그다지 중요치 않을 정도로 대한국의 사회체제는 안정적입니다. 왕권도 상당히 강해졌고 말입니다.”
“지금 그 말을 꺼내는 이유는 반란을 성공시키기가 힘들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인가?”
결론은 그거였다. 애초에 두 사람이 현실에서 만난 이유도 바로 ‘반란’을 계획하기 위함이었으니까.
“예, 어려움이 많을 겁니다. 정통성도 정통성이지만 왕과 왕세자의 능력이 너무 뛰어나요. 마치 세종 대왕과 문종 대왕을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대한국의 국왕과 왕세자는 체력적으로야 형편없을지 몰라도 지력 수치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왕국을 다스리는 능력은 상당히 뛰어났다.
조선 시대에 가장 뛰어난 군왕이었던 ‘세종 대왕’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만 국왕 ‘대척’이 성군 내지는 명군의 자질을 가진 것은 분명하였다.
왕세자 역시 그런 대척을 쏙 빼닮은 인물이었고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세조 대왕이겠군.”
“뭐, 사장님의 포지션이 수양대군에 가깝기는 하죠.”
충구의 말에 호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수양대군이라?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왕은 아니었다. 그가 눈앞의 강충구처럼 해박한 역사 지식을 갖춘 것은 아니었으나 널리 알려진 이야기만으로도 수양대군을 긍정적으로 보기는 어려웠으니까.
하지만 호영으로선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수양대군이라고 못 될 것도 없었다. 일단 왕이 되어야 했고, 무엇보다 자신은 수양대군보다 통치를 잘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아집이란 건가?’
아집이든 자신감이든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어차피 호영으로선 왕이 되지 않는 이상 무의미하였다.
그가 비록 NPC를 차별하지 않는다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운명을 NPC에게 맡길 사람은 결코 아니었으니 말이다.
“제가 외국의 사례들을 조사해 봤습니다. 물론 왕국이 있는 나라들입니다. 그들의 사례를 종합해 보니 2회 차 때 반란에 성공한 이들은 고작 50% 정도더군요.”
“절반이라면 생각보다 성공률이 높은데?”
“다만 이 50% 안에는 무리한 반란으로 인해 왕국이 멸망한 경우가 30% 정도 있습니다.”
“……그렇군.”
호영은 표정을 굳혔다.
그 멸망했다는 30% 경우의 수가 마치 자신을 의미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애써 표정을 풀고 충구에게 말했다.
“나에게는 군사력이 있다, 유저들도 있고. 이 정도면 승산이 높을 것 같은데?”
아바타 선택을 잘못했다고 말했지만 사실 왕세자만 아닐 뿐이지 그의 아바타가 가진 권력은 결코 낮은 것이 아니었다. 일단 수도에 군사력을 두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시 못 할 권력이었으니까.
무엇보다 그에게는 유저들이 있었다. 그를 따르는 유저들은 대부분 왕국의 명문 가문으로 자리 잡은 상태였다. 일종의 귀족이라 할 수 있는 자들이 그의 뜻을 따른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그들은 호영만큼이나 튜토리얼에서 좋은 성과를 보아서 개개인이 가진 무력도 상당히 우수하였다.
호영처럼 스텟이 높은 아바타를 선택한 결과였다.
아무튼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면 호영이 가진 힘은 결코 작지 않았다. 애초에 호영의 무력부터가 능히 천 명 이상의 군사력을 감당할 수준이었고 말이다.
“물론 승산이야 높죠. 아닌 말로 사장님의 무력이라면 혼자서도 왕국을 평정할 수 있지 않습니까?”
“무공을 제대로 키운다면 어렵지 않은 일이지.”
“예, 하지만 문제는 반란의 성공 여부가 아니라 왕국을 평정한 이후지요. 안 그렇습니까?”
맞는 말이었다. 반란, 그것도 자신의 아버지나 형을 상대로 저지른 반란은 정통성에 크나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무력이나 정치력이 아닌, 바로 명분이라는 것이었다.
‘차라리 1회 차나 2회 차 때처럼 공공의 적이 존재했다면 좋았으련만…….’
1회 차 때는 ‘폭군’이라는 이름의 절대악이 존재하였고, 2회 차 때는 마족들이 절대악으로서 존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