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이런 배틀 로열에서는 자신을 숨기고 상대를 먼저 발견하는 게 가장 중요하였는데 기감이 있으니 호영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게임이었다.
‘벌써 적이라니. 숲이 생각보다 작은가 보네.’
갑자기 발걸음을 멈춘 호영은 기감을 한 곳으로 집중시켰다. 기감으로 느껴지는 것은 분명 사람이었다. 튜토리얼이 시작되고 5분도 안 되어 적을 발견한 것이었다.
호영은 잠시 긴장하였지만 이내 자신감 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는 사냥꾼의 입장이었지 사냥당하는 입장은 결코 아니었다.
몸을 낮추고는 기감으로 느껴지는 상대에게 조금씩 접근하기 시작했다.
50미터, 40미터.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중간에 나무들만 없었다면 상대도 호영의 존재를 눈치챘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보인다.’
30미터 거리에 도착하자 상대방의 모습이 어렴풋 보였다. 장신의 동양인이었다. 그리고 손에는 활을 쥐고 있었다.
‘궁수라면 상대하기 쉽지.’
호영은 상대의 무기를 확인하고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상대하기는 가장 쉽고 얻는 것은 가장 많은 것이 궁수였다.
그로서는 때마침 궁수를 만난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되었다.
휘익!
호영은 갑자기 땅바닥에 있는 돌멩이를 손에 쥐고서는 궁수의 오른편을 향해 던졌다. 그러자 긴장감으로 가득한 궁수의 얼굴이 돌멩이가 날아간 방향으로 향하였다.
돌멩이를 던져 시선을 분산시키기!
고전적인 수법이었지만 효과는 확실하였다.
호영은 궁수의 고개가 돌아간 틈을 이용해 빠르게 거리를 좁혀 궁수의 허를 찔렀다.
“으아악!”
궁수는 비명을 질렀지만 활밖에 가지지 못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호영에게 화살을 빼앗긴 궁수는 자신의 화살에 꿰뚫려 죽음을 맞이하였다.
‘비명을 막지 못한 게 아쉽지만, 뭐 이 정도면 괜찮겠지.’
어쨌든 적을 죽였고 또 활이라는 무기를 약탈하였다. 이 정도면 그로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성과였다.
“이제 남은 적은 몇 명이려나.”
최대 백 명이 참여하는 배틀 로열이었다. 4분기쯤 되면 백 명은커녕 여든 명도 잘 안 모이는 경우가 많았지만 호영은 3회 차가 시작되자마자 접속하였다.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는 시간대이니 적이 아흔아홉 명이라는 가정하에 움직이는 것이 마음 편할 것이었다.
물론 지금 한 명이 죽어 많아도 아흔여덟 명뿐이겠지만 말이다.
호영은 궁수를 죽이고 난 이후로도 기척을 죽인 채 은밀하게 움직였다. 비록 활을 얻긴 하였지만 여전히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서너 명이야 손쉽게 쓰러뜨릴 수 있다고 해도 체력의 손실 없이 쓰러뜨리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1등이 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움직여야 한다.’
조급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다시 기감을 넓게 퍼뜨렸다. 궁수가 비명을 질렀기 때문일까? 한 방향도 아니고 세 방향에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주변에 적이 세 명이나 있다는 뜻이었다.
그중 두 방향에서의 기척은 궁수가 죽었던 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비명의 진원지를 파악하기 위함인 것 같았다.
‘둘이서 싸우겠군.’
호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궁수가 죽었던 장소에서 두 기척이 거의 동시에 만날 것이라 예상되니 그로선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둘 중 하나는 죽을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살아남은 한 명도 상처를 입을 가능성이 높을 터. 호영으로선 경쟁자가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이득이니 여러모로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잠시 두 기척에 집중하던 호영은 다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멀리서 안개가 다가오는 게 보이기 시작했고 또 웬만하면 사람이 없는 곳으로 향하는 것이 좋았다. 튜토리얼의 목적은 많이 죽이는 것이 아니라 오래 살아남는 것이니 말이다.
나머지 한 명도 호영과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비명이 울렸던 장소에서 정반대로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제법 영리한 사람인 것 같았다.
호영은 힐끔, 그 사람이 도망친 방향을 바라보다가 본래 가려던 길을 걸어갔다.
그로부터 3분이 지났을까?
아까 궁수가 죽었던 장소에서 또다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아까 감지했던 기척 중 한 명이 치명상을 입은 것 같았다.
‘저곳은 이번 튜토리얼의 핫 플레이스가 되겠는데?’
연달아 비명이 울려 퍼졌으니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유저들 중에는 튜토리얼의 결과에 관계없이 싸움 그 자체를 좋아하는 이들도 많았기에 안개가 닿기 전까지 저곳은 계속 시끄러울 것이었다.
물론 호영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로선 안개가 마지막에 닿을 장소를 미리 선점하는 게 더 중요하였다.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는 것도 중요하였고 말이다.
* * *
다행히 한동안은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기감으로 느끼고 피한 것이 아니라 아예 감지된 사람이 없었다.
‘생각보다 싱겁게 끝날 수도 있겠어.’
잠시 그런 생각을 하였지만 그렇다고 방심하지는 않았다. 유저들도 지금쯤이면 튜토리얼에 어느 정도 적응하였을 것이다.
이전부터 비슷한 형식의 게임이 많았으니만큼 어떻게 해야 오래 생존할 수 있는가를 이미 알고 있을지 모른다.
아까 감지했던 두 기척처럼 경솔하게 행동할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없을 거라는 뜻이었다.
그렇기에 호영은 방심할 수 없었다.
‘정면 50미터, 그쯤에 누군가 있군.’
마침 기척 하나를 발견하였다. 호영만큼은 아니지만 무척이나 은밀한 기척이었다.
‘매복인가? 아니, 그냥 움직일 생각이 없는 것 같네.’
호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기척을 내던 사람이 갑자기 이동을 멈추었다. 하필 호영이 가야 할 길목에서 말이다.
물론 거리가 떨어져 있으니만큼 지금이라도 우회하면 그만이기는 하다. 기척을 미리 감지한 이상 우회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다른 방향으로 우회하기에는 장소가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가 원하는 장소란 몸을 엄폐하기에 최적화된 장소. 그런데 다른 방향으로 우회하면 몸을 엄폐하기가 어려워진다.
개활지에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다.
‘결국 싸워야 한다는 건가.’
처음 궁수를 죽일 때야 무기를 얻어야 하니 무리해서 싸운 것이지만 지금은 굳이 무리할 필요가 없었다.
활이라는 아주 유용한 무기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저렇게 앞길을 막아 자신을 방해한다면 호영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싸우는 수밖에.
호영은 활을 움켜쥔 채 나무 위로 올라갔다.
아무래도 나무 위는 잘 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호영의 생각이 맞았는지 검을 든 백인 사내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도 나무 위에는 시선을 두지 않았다.
호영은 사내의 얼굴이 정반대로 향할 때, 활시위를 힘껏 잡아당겼다. 백인의 뒤통수를 제법 정밀하게 조준하고는 그대로 화살을 쏘아 냈다.
휘이이익!
결과가 궁금했지만 호영은 재차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만약 화살을 피한다면 재빠르게 공격을 이어 가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두 번째 화살은 쏠 필요가 없었다.
“끄르르.”
상대가 목을 움켜지고는 그대로 쓰러졌기 때문이다.
“젠장.”
손쉽게 상대를 죽였으니 쾌재를 부를 만도 하였지만 호영은 오히려 미간을 찌푸렸다.
‘동료들인가? 왜 갑자기 두 방향에서 동시에 오는 거야?’
왜냐하면 또 다른 기척이 호영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호영은 땅으로 내려갈까 고민하다가 결국 나무 위에서 승부를 보기로 결심하였다. 싸움을 피할 수 없다면 유리한 위치에서 싸우는 게 좋았다.
대략 20초 정도 지났을까? 우측과 좌측에서 동시에 백인 두 명이 튀어나왔다.
각각 창과 손도끼를 쥔 백인들이었다. 그들은 서로 경계의 자세를 취하면서도 적대하지는 않은 채 정중앙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검사의 시체를 발견하였다.
“Ugh!”
“Shit!”
두 백인이 검사의 시체를 보고 경악하였을 때 호영은 이미 활시위를 당긴 상태였다.
휘이익!
“Watch out!”
연달아 네 발의 화살을 쏜 호영은 결과를 보고서 안색을 굳혔다.
‘이걸 피해?’
완전히 빗나간 것은 아니지만 죽이는 것엔 실패하였다. 두 사람 모두 치명상을 피한 것이었다. 그리고 화살을 피해 낸 두 백인은 곧장 호영이 있는 곳으로 달려오기 시작하였다.
반격하기 위함이었다.
2회 차에서 전쟁을 경험했던 유저인 것일까? 반응 속도가 기민하기 그지없었다. 전장을 한두 번 겪은 게 아닌 것 같았다.
아마 그들의 나라에서는 제법 명성을 떨치는 전사였을 것이다. 역전의 용사라 불렸을 수도 있고 말이다. 그만큼 무시할 수 없는 실력의 소유자들이었다.
하지만…….
‘센추리에서 전쟁을 경험했다고 현실의 육체까지 강해지는 것은 아니지.’
호영은 침착하게 화살 한 대를 더 쏘았다. 거리가 훨씬 가까워진 상태였기에 화살을 피하기는 쉽지 않았다.
푸욱! 결국 두 백인 중에 창을 든 백인이 이마에 화살을 맞은 채 즉사하였다. 조금 허무한 죽음이었다.
그러자 손도끼를 든 백인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자신의 손도끼를 호영에게 던졌다.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한결 쉬워졌군.”
가뿐하게 손도끼를 피해 낸 호영은 곧바로 나무에서 내려왔다.
백인은 흉신 악귀와도 같은 얼굴로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맨손이지만 거침없는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호영은 무술의 달인이었다.
활을 쏠 필요도 없이 맨손으로 상대해 주었다. 물론 정정당당함을 위해서가 아니라 활보다는 맨손이 편해서 그런 것이지만 말이다.
퍽, 퍽!
피하고 때리고, 피하고 때리고.
단 두 방에 전투는 끝났다. 호영의 승리였다. 허무한 결말이었지만 맨손으로 겨룬 순간부터 이미 예정된 결말이기도 하였다.
아니, 자세하게 따진다면 백인들의 최후는 호영을 만난 순간부터 예정된 것이었다. 무공도 모르는 이들이 어찌 호영을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호영이 싸움을 최대한 피하려는 것은 체력 소모를 최소한으로 하기 위함이지, 싸움을 두려워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만약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할 상황이 온다면 언제든지 지금처럼 압도적으로 싸워 이길 자신이 있는 호영이었다.
‘거기에다 이제는 창까지 생겼군.’
이제는 여포가 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리라.
호영은 자신의 주먹에 맞고 쓰러진 백인을 창으로 확인사살하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기척을 죽인 채였지만 왠지 모르게 그의 발걸음에서는 당당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 * *
안개의 확장으로 발을 디딜 수 있는 공간이 무척이나 협소해졌다. 숲 중심부에 있는 평평한 땅. 그 비좁은 땅으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모여 있었다.
생존자는 모두 네 명으로 그들의 주변에는 이미 시체로 가득하였다.
1등을 가리는 최후의 승부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2등이지. 내가 있으니까.’
호영은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사투를 벌이고 있는 생존자들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이번 튜토리얼의 주인공은 그들이 아니었다.
나무 위에서 싸움을 관전하고 있는 호영. 그가 바로 이번 튜토리얼의 주인공이었다.
“그나저나 무슨 여포를 보는 것 같네.”
네 사람은 개인전을 펼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세 명이서 힘을 합쳐 한 명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세 명이 서로 안면이 있는 사이로 보이지는 않았다. 동양인과 백인 그리고 흑인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