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
‘하기야 한국에서의 센추리는 3회 차부터가 진짜라고 할 수 있으니 늦었다고 볼 수도 없겠지.’
호영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이왕이면 매형이나 다른 지인들에게도 센추리를 권유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미래를 생각하면 센추리는 하루라도 빨리 시작하는 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 * *
다음 날이 되자 호영은 약속했던 대로 현기를 만났다.
이현기, 그는 현실에서 강충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외모도 많이 달랐다. 센추리에서는 훤칠하고 잘생긴 얼굴이었다면 현실에서는 체구도 작고 뭔가 음침한 얼굴이었다.
“전에 만났을 때보다 다크서클이 훨씬 진해졌군.”
호영이 충구를 보자마자 그렇게 말하니 충구가 퉁명스럽게 답하였다.
“맡기신 일이 너무 많아서 어쩔 수가 없었네요.”
“흠흠!”
역시 강적이었다. 호영은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친목 도모회를 여느라고 어제오늘 접속을 못 했는데 왕국에는 별다른 일이 없었나?”
“예, 뭐,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 언제나처럼 평화로웠습니다.”
4분기에 복속했던 마을들도 이제는 안정을 찾았고 친위대의 활약으로 주변에서 왕국을 위협할 세력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더군다나 올해에는 풍년이 들어 식량이 남아돌게 되었는데 대한국은 이 식량들을 왕국 외각에 위치한 부족들에게 뿌렸다.
그들의 환심을 사는 데 이용한 것이다.
그 덕분에 부족들에 대한 영향력은 크게 상승하였고 몇몇 부족은 아예 왕국의 지배 아래로 들어왔다.
왕국의 영토가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수인족 역시 왕국의 통치에 절대적으로 복종하였는데 말썽을 부리거나 반란을 일으키려는 행위는 일절 없었다.
그야말로 모든 게 안정적으로 돌아가는 상황이었다.
“다만 대왕 때문에 골치가 아팠습니다.”
충구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왜?”
“대왕이 너무 무식하지 않습니까? 어떻게든 행정 업무를 보려고 노력하는 것 같은데, 가만히 있는 것만 못합니다.”
“예상했던 일 아닌가?”
“그렇긴 한데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뭐, 그에 대한 대비는 충분히 했으니 괜찮을 거야. 우리가 만든 왕국을 믿어 보라고. 그리고 애초에 우리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도 없잖아?”
불안해하는 충구였지만 호영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지금은 1회 차 때보다 훨씬 좋은 상황이었다.
그때는 추장이 사라진 상태에서 부족을 위협하는 세력도 많이 남아 있었으니까. 내부적으로도 안정적이라고 보기는 힘들었었고 말이다.
반면 지금은 대왕의 자질만 부족할 뿐, 나머지는 문제 될 게 없었다. 대왕의 부족한 지능을 보완해 줄 참모들도 많이 있었고 말이다.
‘무엇보다 대공의 자질이 뛰어나서 안심이 돼.’
대공은 대왕의 아들로서 현재는 왕세자라 불리는 인물이었다. 대왕이 열세 살쯤에 낳았고 지금은 성인이 되었는데, 여러모로 비범하기 그지없는 청년이었다.
호영 역시 그의 자질에 감탄하여 개국식이 있던 날, 그를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자신의 후계자로 삼은 것이었다.
‘솔직히 육체 능력을 제외하면 대왕보다 훨씬 왕의 자리에 어울리는 인물이지. 물론 무공에 대한 재능이 없는 것도 아니고.’
얼마나 자질이 뛰어난지, 호영은 대공에게 모든 걸 맡기고 1회 차 때처럼 홀연히 사라질까도 생각했었다. 대왕의 무력이 아니었다면 진짜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호영은 왕국의 미래가 걱정되지 않았다. 대왕이 무슨 실수를 저지른다고 해도 그의 자식인 대공이라면 어떻게든 만회해 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휴우,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괜히 후환을 남겨 두어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것은 정말 질색인데 말입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쩔 때는 호영보다 독하다고 느껴지는 것이 충구였다.
일말의 여지를 남겨 두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충구였기에 자신이 간섭할 수 없는 100년이라는 시간이 꺼림칙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알겠습니다. 하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이상 없긴 하죠.”
“그보다 오늘은 뭐 때문에 보자고 한 거야?”
자신감 넘치는 충구답지 않게 우울한 분위기만 계속해서 풍겨 대자 호영은 화제를 전환하였다. 그러자 충구는 웅크렸던 어깨를 펴며 말했다.
“이제 2회 차도 끝나가겠다, 한 해를 정리하자는 차원에서 상의할 것이 있었습니다. 뭐, 그 외에도 조용히 할 이야기가 있고요.”
“센추리에서 했어도 되지 않나?”
“사장님이 그러셨잖습니까, 센추리에서 현실의 이야기는 되도록 자제하는 게 좋다고. 저처럼 아바타의 지력이 높은 경우에는 특히 주의하라고 말입니다.”
“현실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군.”
호영은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호영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아바타에게 위화감을 줄 수 있는 행위는 자제하라는 식으로 말이다.
물론 호영의 아바타처럼 지력이 낮은 경우에는 크게 상관이 없었지만. 호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충구가 뜬금없이 물었다.
“그런데 어제는 어떻게 됐습니까?”
“친목 도모회?”
“예.”
“별로 특별할 것은 없었어. 대부분이 내 건물에 사는 유저들이거든. 평소에도 자주 만났던 이들이니 친목 도모회라고 해서 거창할 것은 없지.”
어제 호영이 만났던 사람들은 경호나 병진을 제외하면 전부 빌라 단지에 거주하는 유저들이었다. 한마디로 호영과 가장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회식이라고 대단할 것은 없었다. 백 명에 가까운 숫자가 모인 것은 처음이었지만 서른 명 정도씩은 꾸준히 모임을 가졌었으니 말이다.
“사장님의 빌라 단지에 사는 유저들은 대부분이 충성심을 증명받은 이들이겠죠?”
“당연한 거 아닌가? 신뢰할 수 없는 이들을 내 건물에다 입주시킬 수는 없으니까. 근데 그건 왜?”
“충성심을 갖춘 이들이니 더욱 좋군요. 그렇다면 혹시 그들의 직업 중에 경호원이나 매니지먼트 같은 곳에서 일했던 분들이 있습니까?”
계속해서 앞뒤를 자르고 말하는 충구의 모습에 호영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거지?’
뭔가 대화를 하면 할수록 이야기가 산으로 가는 기분이었다. 역시 천재는 괴팍하다는 것인가? 센추리에서는 그래도 합리적이고 말뜻을 이해하기도 어렵지 않았는데 현실에서는 오히려 대화 몇 마디 나누는 것도 까다롭게 느껴졌다.
천재의 입장에서 범인의 이해력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거침없이 던진다고나 할까.
“갑자기 그건 또 왜?”
‘왜?’라는 되물음만 계속 반복하는 느낌. 호영의 목소리가 퉁명스러워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충구는 호영의 반응을 개의치 않는 것인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계속하였다.
“제가 이번에 생각해 봤는데 사장님께서 현실에서도 어느 정도 영향력을 키울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현실에서의 영향력?”
“예, 저는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우선 매니지먼트부터 인수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다음에는 경호 업체를 인수하는 거죠. 제가 유저들의 직업에 대해 물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잠시만.”
호영은 손을 들어 충구의 말을 끊고서는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이마를 쓰다듬었다.
‘진짜 뜬금없네.’
난데없이 매니지먼트를 인수하라니? 센추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업계를 뭐 때문에 진출하란 말인가?
물론 경호 업체에 진출하는 것도 조금 뜬금없게 느껴지긴 했지만 그것만큼은 이해할 수 있었다. 보안에 대해서는 호영도 중요시 여기고 있었으니 말이다.
“천천히 좀 설명해 봐. 갑자기 매니지먼트는 뭐고, 경호 업체는 뭐야?”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현실에서의 영향력을 높여야 한다고?”
“……현실에서의 영향력은 왜 높여야 하는데?”
“사장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힘이 없다면 당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센추리만 약육강식인 것이 아닙니다. 현실 또한 약육강식의 세계입니다.”
호영도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도 믿는 것이 있었다.
“내가 왜 힘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지? 재벌들보다 돈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현금을 가지고 있어. 자본주의사회에서 돈이 많다는 것은 아주 큰 힘이 되지. 그리고 빌라 단지에 입주한 유저들의 인맥을 생각하면 더욱 무시하지 못해. 초선이지만 어쨌든 국회의원의 장남도 있고 장관의 손자도 있어.”
“저 역시 사장님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장님이 보유하신 것들은 모두 한계가 있죠. 센추리에서 많은 돈을 벌어들이셨겠지만 그 돈은 세금이 어떻게 부과될지 모르니 위험부담이 큽니다. 지금도 비트 코인처럼 세금을 부과해야 한다는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어떤 의원은 독일처럼 소득세는 물론이고 거래세까지 부과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곧 있으면 세금 폭탄이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리고 인맥 역시 형체가 없어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하죠. 만약 사장님이 위기에 처한다면 누가 나서려 하겠습니까? 대관 팀이라도 만들지 않는 이상엔 말입니다. 한마디로 지금의 사장님은 배경 없는 졸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언제나 그랬듯 직설적인 말이었다. 이미 그의 말투에 익숙해진 호영조차도 순간적으로 눈썹이 꿈틀거렸을 정도로 직설적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호영이 회귀하기 전, 그러니까 8회 차나 8회 차 바로 직전에는 센추리에서의 신분이 곧 현실의 신분이라고 볼 수 있었다.
센추리에서 귀족의 신분을 가졌다면 신용 등급이 올라가고 결혼 중매가 쏟아질 정도였다. 돈이나 명예는 기본적으로 따라오는 것이고 말이다.
그러나 이제 막 3회 차에 들어서려는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센추리에서의 신분이 아무리 높다고 해도 현실에서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졸부라……. 확실히 지금의 나는 돈 많은 졸부에 지나지 않지. 그리고 한국에서 나 같은 졸부는 재벌들의 먹잇감이야. 우리나라의 재벌들은 정치권과 법조계 그리고 언론까지 포함하는 아주 거대한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으니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호영은 충구의 말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다. 문제점을 지적하였으니 해결 방안도 모색해 놓았을 것이라는 기대에서였다.
그리고 충구는 이같은 호영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해 주었다.
가장 먼저 충구는 ‘매니지먼트’를 인수하거나 설립해야 하는 이유를 알려 주었는데 이게 상당히 설득력 있게 느껴졌다.
“지금 대한 길드 수뇌부의 인기는 A급 연예인 못지않습니다. 그리고 이 인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높아질 것입니다. 이들의 인기를 이용한다면 우리는 여론을 등에 업을 수 있습니다.”
충구는 서론을 꺼낼 때 초보자의 섬에서 연예인급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친위대 출신의 유저들을 예로 들었다.
대한 길드의 수뇌부는 일종의 다단계 형식으로 각각 수백에 가까운 제자를 두었는데, 어느덧 그들은 센추리를 넘어 현실에서까지 유명해지고 있었다. 한국 최고의 무술 고수라는 이유로 여론이 주목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