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
아무래도 유저들의 입장에서는 ‘전하’라는 호칭이 어색하게 느껴져 대왕이라 부르는 것인데, 호영의 아바타 이름이 대왕이니 마치 반말을 부르는 것 같아 덜 어색하였던 것이었다.
물론 원재 같은 경우는 ‘대왕 전하’라는 식으로 깍듯하게 부르고 있었다.
“둘이 있을 때는 평소처럼 부르라니까.”
“저도 그러고 싶기는 한데…… 군사가 그랬습니다, 승계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준기가 말하는 승계라는 것은 아바타가 본연의 인격체로 되돌아가는 과정을 말한다.
이제 2회 차가 끝나기까지 두 달도 채 남지 않은 상황.
슬슬 2회 차가 끝난 이후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는 시기였다.
그리고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유저들이 사용하던 아바타들의 변심이었다.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는다면 회귀 전에 몇몇 나라에서 그랬던 것처럼 2회 차가 끝나기 무섭게 멸망할 수도 있지. 유저의 성향과 아바타의 성향은 모두 다르니 말이야.’
유저는 충성하는데 아바타는 배신할 생각을 하고 있다면?
대한국의 경우는 정복 전쟁으로 급격히 영토를 넓힌 나라였기에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준기가 말하는 승계 작업이라는 것이 꼭 필요하였다. 유저의 신념이나 생각을 아바타에게 승계해야지만 혼란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네 아바타의 지력이 몇인데?”
“19입니다.”
“그렇다면 주의해야겠군.”
이 승계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력 스텟이었다. 호영의 아바타처럼 지력 스텟이 낮은 편이라면 승계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20 이상이라면 어지간히 철저하게 작업하지 않는 이상 변수가 생길 가능성이 있고, 30이 넘는다면 그 누구도 확신할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사실상 현기가 가장 위험하지.’
현기의 아바타는 지력 수치도 높았고 무엇보다 기사라는 작위까지 가졌다. 만약 현기의 설계가 통하지 않는다면 추후 현기의 아바타는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을 터.
이씨 가문까지 거느렸으니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친위대의 경우는 하나같이 지력 수치가 낮다는 것이었다. 현기의 아바타가 반란을 일으켜도 친위대만 대왕을 따른다면 문제 될 것은 없으리라.
뭐, 애초에 현기의 아바타 정도로 지력이 뛰어난다면 반란 같은 것은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지만 말이다.
“예, 그래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초연이 비록 현리에 대해 애증의 감정을 가졌다고 해도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컸으니 말입니다.”
“그래? 그건 다행이네. 사실 초연에게 작위를 주지 못한 것이 영 마음에 걸렸거든. 물론 너에게도 미안했고.”
“에이, 저는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이미 많은 것을 받지 않았습니까? 아 참, 이제는 현실 이야기도 자제해야 된다고 했죠?”
“뭐, 적당히만 하면 돼. 1회 차에서도 그 정도로는 큰 문제가 없었잖아.”
“하하, 그건 그러네요.”
잠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호영은 돌연 대련을 요구하였다.
“저야 좋습니다만, 갑자기 대련은 왜?”
“네 실력 좀 파악하려고. 얼마나 성장했나.”
호영은 먼저 준기와 대련을 하였다. 대창심법과 대창창법을 배우지 못한 준기가 어느 정도로 성장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련이 시작되자 호영은 감탄하였다.
‘창법이 언제 이렇게 발전했지? 나 말고는 준기를 도와줄 사람도 없을 텐데. 창 다루는 솜씨도 무척이나 상승했군.’
호영은 준기에게 제대로 된 창법을 가르쳐 준 적이 없었다. 그가 가르쳐 준 것은 창술의 기본적인 개념과 병사 시절 사용하던 창술뿐이었다.
그런데도 준기는 그 빈약한 가르침을 토대로 창술의 고수가 되었다. 자신만의 무공을 창조해 내는 그런 고수 말이다.
“저는 언제쯤 형님을 따라잡을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는 있는데 전하의 1회 차 때 실력도 따라잡지 못할 것 같습니다.”
자책하듯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준기를 보며 호영은 황망한 얼굴을 하였다.
준기의 한탄이 호영으로선 황당하게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의 입장에서는 준기의 성장이 지나치게 빠르다고 생각되는데 정작 준기는 자기 재능에 한탄하고 있으니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이럴 때 보면 조금 재수 없다니까.’
현기도 가끔씩 재수 없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천재 특유의 ‘적당히’를 모르는 모습이 평범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재수 없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준기는 확실히 천재 특유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사람을 재수 없게 만드는 것을 보면 말이다.
사실 준기는 겉으로 봐서는 ‘천재’랑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였다. 천재라기보다는 순박한 시골 청년에 어울리는 이미지였으니까.
하지만 무공을 익히는 모습을 보면 천재라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었다. 어떤 무공이든 아무렇지 않게 소화하는 재능!
심지어 필요한 무공을 만들어 내기까지 하는 재능을 보면 천재 그 이상으로 보였다.
‘무공만 받쳐 주면 언제든지 B급이 될 수 있겠는데? 하. 2년도 안 되어 회귀 전의 내 실력을 따라잡다니. 만약 처음부터 나의 무공을 가르쳐 주었다면 진즉에 내 실력을 뛰어넘었겠군. 정말, 천재의 재능은 언제 봐도 두려울 정도야.’
잠시 그런 생각을 하였지만 준기는 다행히 호영의 편이었다. 준기의 재능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호영에게는 도움이 될 터. 무공을 배워야 하는 입장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부러움과 질투심을 애써 털어 낸 호영은 준기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더 강해지고 싶으냐?”
“물론입니다! 개국식 때 전하께서 만들었던 그 검기를 저도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호영의 물음에 준기는 당연하다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하기야 당연히 누구든지 강해지고 싶은 열망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준기처럼 재능이 넘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인간이라면 욕망이 있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
“방법이 없지는 않다.”
“무슨 방법입니까?”
“내 무공을 배우면 된다.”
“……무공을요?”
무공을 가르쳐 주겠다는 호영의 말에 준기는 눈을 크게 떴다. 호영이 가진 무공. 솔직히 말해 준기라고 탐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1회 차 때야 그 정도로 뛰어난 무공이 필요치가 않았다. 기초적인 무공을 소화하는 것도 버거웠을 때니까.
하지만 2회 차가 끝나가는 지금은 달랐다. 타고난 천재성으로 자신이 만든 무공들을 계속 발전시키고 개선해 왔지만 준기 혼자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호영 같은 선구자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준기로선 호영에게 무공을 가르쳐 달라는 부탁을 할 수도 없었다. 이미 많은 것을 받았는데 천문학적인 가치를 지닌 무공을 가르쳐 달라는 것은 너무 양심이 없는 행동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지금 호영이 자신의 입으로 준기에게 무공을 가르쳐 준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준기로선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제가 어찌……. 앞으로는 무공을 국가 기밀보다 중요하게 다루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게다가 대왕의 무공은 대씨 가문의 가전 무공입니다. 그런데 어찌 저에게 가르친다는 말씀을 하십니까?”
그러나 준기는 억지로 자신의 욕망을 억눌렀다. 그는 염치를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왕이야. 그리고 왕이다 보니 무공 수련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짧을 수밖에 없지.”
“…….”
“나의 실력은 지금 정체하고 있어. 앞으로도 계속 정체할 것이고 말이야.”
“무공을 창시하신 분이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대왕께서는 앞으로도 계속 강해지실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무공을 창시한 건 운이었어. 지금의 실력도 창시자의 혜택으로 얻게 된 것과 마찬가지지……. 아무튼 지금 나의 실력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시간이라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해. 수련 시간이 필요하다는 거지. 하지만 왕으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하는 나에게 시간이 주어질 리가 없잖아? 그렇다고 왕의 자리를 포기할 수도 없고.”
“당연합니다. 대왕만큼 왕에 어울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너의 조력이 필요해. 내가 누누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너는 무공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거든.”
준기는 그제야 호영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의 의도란 다름 아닌 무공을 대신 연구해 달라는 것.
마냥 베푸는 것이 아니라면 준기의 입장에서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우려스러운 것이 한 가지 남아 있었다.
“대왕의 뜻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대왕의 무공을 발전시키는 게 가능하겠습니까, 대왕님도 하지 못한 일을?”
“말했잖아, 너에게는 재능이 있고 나보다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다고. 그러니 할 수 있다, 할 수 없다는 고민 하지 마. 하겠다, 말겠다만 결정해, 한다면 내가 남은 시간 동안 철저하게 가르쳐 줄 테니.”
“……그렇다면 하겠습니다. 꼭 가르쳐 주십시오, 대왕!”
격앙된 얼굴로 주저 없이 대답하는 준기. 호영은 그런 준기를 보며 싱긋 웃다가 말했다.
“단, 누구에게도 알려 주면 안 돼.”
“물론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누구란, 네 아바타도 포함된다.”
“2회 차가 끝나기 일주일 전에 모조리 지우겠습니다.”
그렇게 간단히 주의를 준 호영은 곧바로 자신의 밑천을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한 번 결정을 내린 이상 주저하거나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 * *
12월 29일.
호영은 얼마 전에 산 프리미엄 코트를 입고 자신의 애마에 탔다. 그의 애마 역시 얼마 전에 산 것으로 벤츠의 신형 모델이었다.
그는 자신의 애마를 타고 부천으로 향하였다. 30분도 안 되어 목적지인 부천의 고강 사거리에 도착하자 호영은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저기 있군.’
너무도 익숙한 외형의 사내가 시야에 잡히자 호영은 곧장 사내가 있는 곳으로 차를 몰았다. 키는 175 정도이나 무척이나 다부진 체격을 가진 사내였다.
“경호야, 타라.”
“어, 형? 형이 왜 거기서 나와?”
갑작스러운 호영의 등장에, 다부진 체격의 사내가 눈을 끔벅거리며 의아해하였다. 사내의 이름은 조경호로, 호영의 군대 후임이었던 인물이었다.
비록 소대는 달랐지만 호영과 무척이나 마음이 잘 통하여 전역 이후에도 연락을 끊지 않고 친구 이상으로 자주 만났었는데, 회귀 전, 호영을 끝까지 따라 주었던 인물이기도 하였다.
“일단 타.”
“아, 알았어.”
여전히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조수석에 탑승한 조경호.
호영은 피식 웃고는 운전대를 잡았다. 아직 데리러 가야 할 사람이 한 명 남아 있었다.
그 사람 역시 군대 후임으로, 회귀 전 호영을 끝까지 따라 주었던 인물이었다.
“형, 그, 마카오 반점인가? 중국집에서 일한다며?”
“내가 말했잖아, 2년 전부터 게임 하나 시작했다고. 이 차도 그 게임에서 번 거야.”
“게임으로 차를 샀다고? 에이.”
“뭐가 에이야? 진짜라니까.”
“솔직히 말이 안 되잖아. 이 차가 1~2천 하지는 않을 텐데. 최소 억대 아니야? 형이 BJ나 스트리머라면 모를까, 어떻게 돈을 그리 잘 벌어?”
“요즘은 게임 잘하면 월 10억도 어렵지 않게 번다.”
“연봉 10억도 아니고 월 10억이라고? 헐, 형 안 본 사이에 허세가 심해졌어.”
본래 경호는 호영의 말을 의심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아무래도 이번만큼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