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
최진수는 현리의 추장에게 압도적인 패배를 당한 뒤 강동으로 도망쳤다. 영등포구에서 강동으로 거의 20킬로미터에 가까운 거리를 이동한 것이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마물들이 도처에 출몰하는 센추리 세상에서 장거리 이동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최진수를 따르던 유저들은 마재광을 제외하고 모두 죽었다. 마물들의 습격에 단 두 명만이 살아남은 것이었다.
솔직히 최진수가 살아남은 것도 운이 좋아서였다. 도망치던 도중, 이상한 종교를 만들어 거대 세력을 일구어 낸 유저를 만나지만 않았으면 그 역시 죽음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터.
어찌 되었건 그는 20킬로미터의 거리를 이동하여 강동에 정착하였고 돈 밝히는 사이비 교주 유저와 함께 부족의 규모를 조금씩 확장하였었다.
그렇게 1년 6개월 정도가 지나자 최진수는 영등포구 연합 이상의 세력을 일구어 낼 수 있었다. 최진수의 새로운 전성기가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얼마 전, 최진수는 갑작스러운 오크족의 침입으로 치명적인 피해를 입고 말았다. 보유하고 있던 쉰 명의 전사 중 열 명이 사망하고 스무 명이 부상을 입은 것이었다.
남은 시간 동안 피해를 복구하는 것만으로도 온 힘을 다해야 할 터. 그런데 최진수의 위기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최진수를 강동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원인, 현리 부족이 강동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래도 훗날을 도모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뿌드득!
마재광에게서 또다시 터전을 옮겨야 될 것 같다는 조언을 들은 최진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갈았다.
“나를 쫓아낸 그 새끼들이 벌써 강북까지 집어삼켰어! 내가 이딴 곳에서 쥐 죽은 듯 처박혀 있을 때!”
“…….”
“그런데 또다시 도망쳐야 한다고? 비루한 개새끼처럼 또다시?”
“죄송합니다.”
“내가 돈을 얼마나 썼는데! 내 돈 가지고 네놈은 도대체 무엇을 한 거야!”
최진수는 격노를 참을 수 없었다.
사실상 올해가 마지막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 이제 한국에서 센추리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당연하겠지만 센추리가 이만큼이나 주목받는 상황에서 재벌들이 가만히 있을 리는 없었다. 재벌들은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센추리에 순차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재벌들이 아직까지는 초보자의 섬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지만 그것도 올해까지였다.
내년이 되면 너 나 할 것 없이 트루 세계, 즉 본 게임에 진출할 것이었다.
그렇기에 최진수로선 올해가 마지막 기회라고 볼 수 있었다. 올해에는 반드시 성과를 내 3회 차에 건실한 세력으로 유지되게끔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봤을 때 그의 계획은 실패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현리 부족 때문에 또다시 부족의 터전을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터전을 옮기고서도 세력을 유지하는 게 가능할 수도 있었다. 한 번 성공했던 일이니 두 번 성공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테니까.
그러나 문제는 더 이상 시간도, 돈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어느덧 3분기도 절반 이상이 지나간 상황.
2회 차가 끝나기까지 4개월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센추리 시간으로야 1년이지만 세력을 일으키는 것에 1년은 너무 적은 시간이었다.
더군다나 최진수가 다시 세력을 일으킬 수 있었던 배경에는 돈이 큰 역할을 하였다. 즉, 거금을 들여 만들어 낸 세력이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돈도 없고 시간도 없으니 터전을 옮긴다고 3회 차를 기대하는 것도 무리가 있었다.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라는 것이다.
인내심이 그리 좋다고 볼 수 없는 최진수로선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마재광.”
하지만 그렇다 해서 언제까지 분노만을 토해 낼 수는 없는 일. 최진수는 가까스로 분노를 다스리고는 마재광의 이름을 불렀다.
“말씀하십시오.”
“나에게 훗날을 도모하라고 하였었지?”
“그렇습니다. 지금 저희의 군사력으로는 현리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일단 남쪽으로 부족을 옮긴 뒤, 다음 회 차를 노리는 게 최선입니다.”
“다음 회 차를 노린다? 그렇다면 네가 이곳에 있을 필요는 없겠네?”
“예?”
갑작스러운 최진수의 말에 마재광이 얼떨떨한 얼굴을 하였다. 왠지 모르게 자신을 내친다는 말처럼 들렸기에 더욱 얼떨떨할 수밖에 없었다.
최진수는 그런 마재광을 바라보며 명령조로 말했다.
“너는 현리로 가라.”
“현리로 가시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스파이가 되라고! 왜 말길을 못 알아들어?”
“……!”
그제야 최진수의 의도를 알아차린 마재광은 눈을 크게 떴다. 최진수가 설마 이런 지시를 내릴 줄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비정하다느니, 몰인정하다느니 그런 문제가 아니라 뜻밖의 묘책이었기 때문이다. 추진력은 상당하지만 그 이외의 능력은 전부 평균 이하로만 느껴졌던 최진수였기에 더욱 의외일 수밖에 없었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과연 저를 받아 주겠습니까?”
“네 얼굴이 알려진 것도 아니고 뭐가 문제야?”
“연합 소속이었던 부족민들이 있지 않습니까? 유저들도 몇 명 살아남아서 지금은 현리에 소속되어 있다는데…….”
마재광의 말에 최진수는 와락 인상을 찡그렸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현리에는 아직 최진수나 마재광의 얼굴을 알아볼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최진수는 자신이 생각한 묘안을 포기하지 않았다.
“썅! 현리가 저렇게 큰데 들키겠어? 네 얼굴이 특이한 것도 아닌데? 어차피 2회 차가 끝나기까지 1년도 안 남았으니 알아서 잘 숨겨! 어떻게든 3회 차까지 살아남으란 말이야!”
“…….”
“무조건 살아남아라. 네놈의 효용은 3회 차 때 현리에서 얼마나 높은 자리에 있느냐로 정해질 것이니까.”
“……알겠습니다.”
결국 마재광은 최진수의 뜻에 따르기로 하였다.
난데없는 현리행. 불안하기도 하였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나쁘지 않은 전략이었다. 적지 한복판에 첩자를 심어 놓는 셈이었으니 말이다.
‘안 그래도 현리의 강함에 대한 비결이 궁금하였는데, 이참에 알아내야겠네.’
마재광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어떻게 현리의 세력권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였다.
* * *
시간은 언제나 유수처럼 흘러간다. 어느덧 센추리 2회 차가 끝나기까지 3개월도 남지 않은 시점이 되었다.
센추리 시간으로 따져도 1년이 채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저들은 머지않아 다가올 3회 차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부족을 키워 낸 유저들은 후계자를 키워 냈고, 이제 막 부족의 권력자가 된 유저들은 조금이라도 세력을 넓히겠다고 발버둥 쳤다.
그에 따라 유저 수가 가장 많은 서울뿐만이 아니라 다른 지방에서도 매일같이 전쟁이 벌어지며 대대적인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현리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었다. 유저들이 이제 막 시작하고 있는 것들을 현리는 진즉에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현리는 한반도 제일의 세력을 형성한 지금도 정복 전쟁을 한창 진행 중에 있었다.
강북에서 제일가는 세력가인 ‘혈맹’을 3분기 때 멸망시키고 강남과 강동 일부 지역을 차지하였다면 4분기가 된 지금은 서울 전역을 차지하고 김포와 파주 지역에 진출하고 있었다.
‘드디어.’
파주에 위치한 이름 모를 부족을 정복한 호영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시스템 문구를 보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어떤 일에 직면해도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그가 몸을 부르르 떨 정도로 격동에 휩싸인 것이었다.
‘드디어 왕이 되었다.’
주먹을 불끈 쥔 호영은 심호흡을 하여 가까스로 흥분한 감정을 진정시키며 시스템 문구를 다시금 읽어 보았다.
-자격 조건을 갖추어 스킬 ‘왕의 권한’을 획득하였습니다!
언제나 그랬지만 시스템 문구는 불친절하기 그지없었다. 고작해야 문장 하나, 스킬을 획득했다는 문구밖에 적혀 있지 않았다.
심지어 자격 조건이 무엇인지 왕의 권한이 어떤 스킬인지도 알려 주지 않았다. 상세한 설명 없이 문장 한 줄이 전부라는 것이다.
하지만 호영은 저 문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호영이 그토록 염원하던 스킬이었으니까!
왕의 권한 F-.
이 스킬은 시스템이 공식적으로 왕이 되었음을 증명해 주는 스킬이라고 볼 수 있었다. 회귀 전, ‘남작의 권한 D-’가 최고였던 호영이 공식적으로 왕이 된 것이었다.
처음부터 왕이 되기를 갈구하였던 호영으로선 기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물론 이 왕의 권한이라는 스킬의 효용이 고작 시스템적으로 인정받는 것이 끝이라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이야 F-다 보니 딱 하나의 용도밖에 없었지만 등급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스킬의 효용이 압도적으로 증가한다.
이 스킬 하나로 전쟁 억제력과 반란 억제력이 엄청나게 상승할 정도였다.
참고로 지금 존재하는 딱 하나의 기능은 바로 ‘기사 임명’이었다. 총 다섯 명의 기사를 임명할 수 있는 기능이었는데, 여기서 임명된 기사 역시 시스템적으로 인정받는다.
즉, ‘기사의 권한’이라는 스킬을 획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기사의 권한이라는 스킬 역시 왕의 권한처럼 등급이 상승하면 상승할수록 무형적으로 엄청난 이득을 가져다주었는데, 왕은 그런 스킬을 마음대로 내려 줄 수 있으니 권위가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벌써 왕이 되다니. 2회 차라서 자격 조건이 제법 쉬운가 보네? 아니면 주변에 왕이 없기 때문인가?’
호영은 본래 이번 회 차에서 왕의 권한을 획득할 생각이 없었다. 물론 획득한다고 나쁠 것은 없었지만 2회 차 때 자격 조건을 갖추는 게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가 생각하기에 왕의 권한을 획득하려면 인구가 최소 10만 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울을 점령하고 김포, 파주에 진출한 현리 부족의 인구수는 고작해야 5만 8천 정도에 불과하였다. 물론 강서구 변두리에 있는 부족들처럼 현리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부족들의 인구가 3만 정도 된다지만 그래 봤자 다 합해도 9만 명이었다.
마을수로 따지자면 28개 마을이었고 말이다.
그렇다 보니 나중을 위해서 영토를 확장하고 있으면서도 왕의 권한에 대해서는 미련을 가지지 않았었다.
3회 차는 되어야 왕의 권한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파주의 이름 모를 부족을 점령하고 스물아홉 개 마을이 된 시점에서 예상치도 못한 왕의 권한을 획득하였다.
호영의 입장에서는 뜻밖의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뭐, 어쨌든 좋은 일이야. 우리도 2회 차 때 진정한 왕국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니까.’
회귀 전,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왕의 권한을 획득한 유저가 나온 것은 3회 차 때였다. 미국이나 중국 같은 경우는 1회 차 때부터 왕의 권한을 가진 유저가 등장하였는데 한국은 무려 2년이나 뒤처진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호영이 왕의 권한을 획득한 것은 굉장히 뜻깊은 일이라 볼 수 있었다. 최소 1년은 앞지른 셈이었으니 말이다.
‘다음 회 차에서는 더욱 앞질러 줘야지.’
호영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병사들에게 회군하라 지시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