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
현리는 어디까지나 인간이 주축으로 있는 부족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사내는 바로 그 인간을 대규모로 학살하였다. 호영으로선 골치 아픈 것을 넘어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내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콜록콜록! 그런데 나는 나의 부족민을 죽이는 것으로 끝내지 않았어. 나에겐 동맹이 있거든. 돼지 새끼들이 지금 어디로 갔을까?”
“돼지 새끼? 설마 오크를 말하는 것인가.”
“크크크, 그래. 내 전사들이 지금 돼지 새끼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지. 그들은 네가 앞으로 지배할 땅의 부족민들을 죽이러 갔어. 남으로, 동으로! 크하하하! 돼지 새끼들이 강을 건너지는 못하겠지만 강 근처에 사는 인간들은 다 죽어 나가겠지. 강동에 있는 것들도 당연히 죽을 것이고. 너는 땅을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사람은 얻지 못할 거야! 흐흐흐.”
사내는 미친 듯이 웃으며 호영을 비웃어 댔다. 마치 자신이 승리자인 것처럼 말이다.
‘학살이 아직도 자행되고 있다니.’
웃음소리를 듣는 호영의 얼굴이 더욱 심각하게 굳어졌다. 근처의 부족민만 학살한 줄 알았더니 원정까지 나가서 인간을 학살하고 있었다.
실로 지독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지만 호영에게는 이보다 치명적일 수 없었다.
“이름이 이상엽이지?”
“……네, 네가 그걸 어떻게?”
빈정거리던 사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호영이 자신의 이름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센추리를 하면서 단 한 번도 자신의 실제 이름을 밝힌 적이 없었던 사내였기에 더욱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이상엽, 이 사이코패스 새끼야. 다음 회 차에 나를 죽이겠다고? 웃기는 소리 하네. 네가 내년에 센추리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어떻게 알았어? 시발! 어떻게 알았냐고!”
“닥치고 죽어라. 네 목소리 듣는 것만으로도 짜증 나니까.”
푸욱!
호영은 더 이상 사내의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손에 쥐고 있는 뼈창을 그대로 사내의 가슴팍에 내지른 것이다.
“말해! 어떻게 알았어! 내 이름 어떻게 알았냐고……! 쿨럭!”
죽어 가는 그 순간까지도 사내는 질문을 던졌다. 호영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충격적이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호영은 사내의 의문을 해결해 주지 않은 채 사내의 숨통을 끊어 내고는 그대로 로그아웃 하였다. 인터넷을 통해 사내의 말이 거짓인지 진실인지를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호영은 사내의 말이 진실임을 알 수 있었다. 커뮤니티에서 한창 강동의 유저들과 용산 근처의 유저들이 ‘오크의 침략’을 떠들어 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크족이 인간을 학살하고 있다는 게 사실임을 파악한 호영은 현기에게 문자 하나를 보내고 다시 센추리에 접속하였다.
인간을 학살하는 오크족. 호영이 직접 나서서 응징할 것이었다.
* * *
‘지독하군.’
가는 길목마다 시체들밖에 없었다.
사이코패스가 불러들인 오크족이 인간 학살이라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었다.
호영은 학살의 흔적들을 보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타격이 컸다. 한 명 한 명이 귀중한 시대에서 이 정도의 숫자가 학살을 당하다니.
물론 어떻게 보면 호영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볼 수 있었다. 같은 인간일지는 몰라도 같은 세력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이야 현리의 부족민이 아니라 해도 머지않아 같은 부족이 될 사람들이었다. 호영은 이번 원정에 강북 전체를 지배할 생각이었으니까.
그놈의 사이코패스 때문에 호영은 자신의 부족민이 될 인구 수천 명을 허무하게 잃은 것이었다.
‘후우, 문제는 사람만 못 얻는 것이 아니야. 이곳의 땅도 지배하기가 힘들어질 거다.’
땅을 얻으려면 일단 사람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강북은 오크족의 학살로 이미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이 아니게 되었다.
이 땅을 차지하려면 최소 몇 년은 지나야 할 터. 강북에 수도를 둘 생각을 했던 호영으로선 극심한 손해가 아닐 수 없었다.
“한숨은 그만 쉬자. 지금은 일단 오크들을 족치는 게 먼저니까.”
허탈한 한숨을 내쉬던 호영은 이내 고개를 가로젓고는 주먹을 쥐었다.
이미 죽어 버린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지만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최대한 살려야 하지 않겠는가.
호영은 이동속도를 크게 높이고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참에 오크란 오크들은 모두 북쪽으로 쫓아내야겠어, 북한의 김씨 놈들이나 방해하게끔.’
처음 계획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크족과 계속 충돌하게 되자 한 가지 획기적인 생각을 하였다.
그것은 바로 이이제이였다.
3회 차부터 경기도 지역의 한국 유저들을 귀찮게 할 북한 유저들과 끊임없이 인간과 부딪칠 오크족을 이이제이하게 만들 생각이었던 것이다.
#건국
허영만. 그는 한때 개천에서 용 난 사람의 전형으로 손꼽혔다. 강원도 산골에서 태어난 그는 공부 하나로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에 들어갔고, 대학에서 졸업한 이후에도 승승장구하여 건실한 사업체를 일구어 냈다.
거기에다 어여쁜 여인을 만나 결혼에 성공하여 아이 둘까지 가졌으니 개천에서 용이 났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전성기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끝났다. 작년 겨울, 단 한 번의 실수로 그는 추락을 거듭하였던 것이다.
10년 이내 중견 기업이 될 것이라 전망되던 그의 사업체는 6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분해되었고, 화목한 줄만 알았던 가정은 순식간에 해체되었다.
대학에서 얻었던 황금 인맥은 그가 어려워지자마자 가장 먼저 등을 돌렸다. 그는 그렇게 모든 것을 잃었다.
남은 것이라고는 현금 약간뿐이었다.
허영만은 절망에 허우적거리며 ‘자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뉴스에서 ‘센추리’라는 가상현실 게임을 보게 되었다.
잔인하고 선정적이며 위험하기까지 한 가상현실 게임!
뉴스에서는 이 게임의 폐해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였지만 허영만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현실감 넘치는 가상현실 게임이라는 이야기만 귀에 들어왔다.
그는 즉흥적으로 센추리 기기를 구입하고 곧장 센추리에 접속하였다. 그리고 접속하는 순간 그는 직감하였다.
이 게임은 앞으로 무조건 뜰 것이라는 사실을!
허영만은 다시 일어났다. 이것은 재기의 기회였다. 센추리를 이용하여 다시 한 번 보란 듯이 성공해 주리라!
마침 천운이 따라 주었다. 말 그대로 하늘에서 내려 준 행운이었는데, 그의 부족으로 운석이 떨어진 것이었다.
운석은 현실에서도 엄청난 가치를 지녔지만 센추리 안에서도 무시하지 못할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그가 주목한 것은 ‘운철’이었다.
인류가 최초로 사용한 철기, 운철. 청동기도 없는 지금 시대에 운철은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가치를 지녔다고 볼 수 있었다.
그는 곧바로 운철을 이용해 무기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물론 풀무도 없고 마땅한 제련 시설도 없었기에 그는 다소 무식한 방법을 선택하였다.
때리고 갈아서 제련 과정 없이 만드는 것이었다. 당연히 시간이 오래 걸리고 노동력도 많이 들었지만 그래도 근력이 30에 가깝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손재주가 좋았던 까닭인지 나름 만족스러운 단검을 만들 수 있었다.
물론 제련 과정이 없었기에 불순물이 많았고 강도도 약했다. 하지만 허영만은 처음부터 이 단검을 무기로 쓸 생각이 없었었다. 운철 단검은 어디까지나 상징적으로 쓰일 도구였다.
하늘이 자신을 선택했다는 상징성으로 쓴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같은 선택은 무척이나 적절하였다. 부족에서 일개 장로에 지나지 않았던 그는 대번에 제사장 취급을 받으며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던 것이다.
“모두 들어라! 하늘이 내게 계시를 내려 주었다!”
허영만은 운철 단검을 번쩍 들며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추장을 비롯한 이백여 명의 부족민이 바닥에 엎드리며 허영만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북쪽에서 재앙이 내려오고 있다. 우리 부족의 근간을 뒤흔들 엄청난 재앙이다!”
“허억!”
“하늘이시어!”
단 한마디에 부족민들은 두려움에 휩싸이며 하늘을 향해 절규하였다. 이미 부족에서 허영만의 말은 절대적인 진리처럼 통용되었다.
운철 단검 때문만은 아니었다.
유식한 편이었던 허영만은 그동안 의료 상식이나 기본적인 천문학을 이용해 부족민들에게서 신뢰를 얻었었다.
진짜 제사장이라도 된 것처럼 미래를 예견하고 병자를 치료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그는 유저답게 인터넷을 이용하였다.
로그아웃 하고서 인터넷을 통해 외부의 정보를 알아낸 이후 그 정보들을 마치 ‘하늘의 계시’인 거처럼 흉내 낸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하늘에서 내려 준 ‘운철 단검’까지 그의 손에 들리니 부족민들은 그를 정신적인 지주이자 실질적인 우두머리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허영만의 ‘재앙이 내려온다.’라는 믿기 어려운 말에 이렇게나 절규하며 두려움에 휩싸이는 것도 그만큼 허영만의 부족에 대한 장악력이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을 의미하였다.
“하지만 이 재앙은 피할 수 있다. 나를 따라라! 비록 우리의 터전을 버려야 하겠지만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
“두려워하지 마라! 이것은 하늘의 뜻이다. 하늘께서 너희들을 지켜 주실 것이다.”
그러자 추장이 가장 먼저 대답했다.
“하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부디 우리를 보살펴 주시옵소서!”
“보살펴 주시옵소서!”
추장의 말에 부족민들도 추장을 따라 말했다. 자신들을 보살펴 달라고 말이다.
‘반발이 조금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법 잘 따라 주는군.’
허영만은 흐뭇한 얼굴로 부족민들을 내려다보았다.
처음 시작했을 때는 일개 장로였었는데, 어느덧 절대적인 권력자가 되었다. 부족의 터전을 옮기는 것조차 그의 뜻대로 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현실에서 절망의 나날을 보내던 그였기에 더욱 만족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입가에 미소를 짓는 것도 잠시였다.
‘현리라……. 추장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제법 대단해. 세력을 이렇게나 빠르게 넓히다니. 하지만 3회 차부터는 나도 진지하게 할 것이니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재앙이라는 것은 단순히 부족을 옮기기 위해 지어 낸 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재앙이라 부를 만한 것이 내려오고 있었다.
현리 부족! 강북에서 정복 전쟁을 시작한 현리 부족은 언제가 되었건 그의 부족이 있는 곳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애초에 허영만이 위치한 곳은 신길동 부근이었다. 그리고 현리 부족은 허영만과 같은 영등포구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한 상태였다.
올해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쳐들어올 수밖에 없다는 것. 그렇기에 허영만은 부족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물론 다른 유저들처럼 이참에 외부의 위협도 없고 앞날도 창창한 현리의 세력으로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허영만은 현실에서 대기업에게 험한 꼴을 당한 이후로 일종에 반골 기질이 생겨났다.
그러니 아무리 어려워도 혼자 행동하면 행동했지, 다른 세력에 의탁하고 싶지는 않았다.
허영만은 그렇게 다음 회 차를 기약하며 어려운 길을 택하였다.
* * *
“강동까지 진출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듯싶습니다.”
“오크를 막았더니 이제는 현리가 쳐들어온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