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
하지만 문제는 지금 당장이었다. 안 그래도 갈 길이 먼데 눈치 없는 유저들이 계속 발목을 잡을 게 뻔했다. 길드 반란처럼 또다시 반란을 일으키거나 파업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호영으로선 골치 아플 수밖에 없었다.
‘역시 하루빨리 나에게 충성하는 유저를 늘리는 수밖에 없겠어.’
모든 유저들이 원재처럼만 행동한다면 더 이상 유저들 문제로 골머리를 앓을 일은 없을 터. 그렇기에 호영은 현실에서 했던 생각을 이어서하였다.
‘빌라를 사서 합숙 생활하는 것만으론 부족해. 현실과 센추리 여기에 초보자의 섬까지, 조금씩 교집합을 늘려 가야겠어.’
돈은 제법 들겠지만 충성심을 얻을 수 있다면 싸게 먹히는 셈이었다.
#사이코패스
민건우는 마포현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당하였다. 자신이 의형처럼 따르는 김성근과 함께 선두에서 움직이다가 조폭들에게 둘러싸인 채 죽음을 당한 것이었다.
‘너무 오버했어! 젠장. 보신주의자면 보신주의자답게 행동했어야 하는데.’
스스로에게 원망스러웠다. 왜 그렇게 무리하게 행동하였을까? 어차피 이기는 전쟁, 티 안 나게 적당히 했어도 되었을 것인데 말이다.
퍼스트 유저이자 친위대원으로서 탄탄대로를 걷던 건우였기에 더욱 후회가 되었다.
‘그런데 우원재 이 사람은 갑자기 왜 나를 보자고 하는 거지? 이제 와서 위로라도 해 주려는 건가?’
약속 장소로 향하던 도중 건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우원재라는 사람이 평소에 얼마나 바쁜지를 알고 있었다.
한시도 쉬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고나 할까. 건우는 친위대의 훈련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편이지만 그런 그조차 우원재의 일과보다는 낫다고 생각하였다.
그만큼 우원재라는 사람의 업무량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센추리에서만 바쁜 것이 아니었다.
친위대의 동료들 이야기를 들어 보면 우원재는 현실에서도 홍길동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한다고 하였다.
옥석을 가리겠다는 목적으로 영등포구니 마포구니 강서구니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유저들을 만나러 바쁘게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건우로선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의 그는 일개 백수에 지나지 않았다.
아바타가 죽어 버린 터라 센추리에 접속해 봤자 초보자의 섬에서밖에 활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건우 스스로도 부족에 어떤 이바지도 할 수 없음을 알고 있으니 우원재와의 만남이 이해가 안 갈 수밖에 없었다.
“반갑습니다.”
“여기 앉아.”
“예.”
센추리에서도 그랬지만 현실의 우원재도 무뚝뚝하기 그지없었다. 아랫사람처럼 대하는 태도도 여전하였고 말이다.
하지만 건우로선 이미 익숙하였기에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저기,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는지요?”
“너의 도움이 필요로 한 일이 있다.”
“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요? 1회 차 때처럼 홍보라도 시키려는 건가요?”
“그보다,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지?”
갑작스러운 질문에 건우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일단 대답부터 하였다.
“트루 세계에 갈 수 없어서 심심하기는 한데, 그래도 계속 센추리를 하고 있습니다. 초보자의 섬도 나름 나쁘지만은 않아서요.”
“본 게임을 트루 세계라고 부르는 건가?”
“요즘은 본 게임이라고 안 부르고 리얼 세계니 트루 세계니, 여러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어찌 되었건 초보자의 섬에서 활동한다는 거지?”
“예, 그런데 그건 왜?”
건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냥 안부라도 묻는 것인 줄 알았지만 의외로 집요한 것이 따로 시킬 일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런 건우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초보자의 섬에서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어떤 일요?”
“길드를 만들어라.”
길드!
본 게임에서야 어색한 단어일 수 있지만 초보자의 섬에서는 지금도 우후죽순 세워지고 있는 것이 바로 길드라는 조직이었다.
당연히 건우도 길드에 대해서 모르지 않았다. 그의 창술을 탐내며 접근하던 길드도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길드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해도 길드를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길드를 만들려면 일단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초보자의 섬에 있는 그의 인맥이라곤 친위대 동료들밖에 없었던 것이다.
“제가 어떻게 길드를 만들어요?”
“추장님께서 지원해 주실 거다. 코인이든 정보든, 필요한 것은 전부.”
“하지만 사람이 없잖아요. 누가 저를 따라 길드에 들어오겠어요?”
“정복 전쟁에서 전사한 친위대원들이 있잖아. 그리고 홍준기 알지? 훈련을 담당하는. 아무튼 준기에게 여동생이 있는데 그 여자가 제법 큰 길드를 운영하고 있어. 준기의 여동생이라 그런지 재능이 있어서 따르는 이들이 많아.”
“……제법 본격적이네요?”
건우는 새삼스럽게 감탄하였다. 허무맹랑한 소리인 줄 알았더니 나름 계획이라는 것이 있어 보였다.
‘확실히 가능성은 있는 것 같다. 추장님이 코인이랑 스킬을 지원해 준다면 길드원을 모집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니까.’
역시 추장의 최측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건우가 새삼스레 감탄하는 사이 우원재가 말문을 열었다.
“추장님이 시키신 일이야. 본격적일 수밖에 없지. 그러니 너도 꼭 해내야만 해. 이건 추장님의 지시니까.”
“…….”
“왜 말이 없지? 할 수 있어, 없어?”
대답을 강요하는 우원재의 태도에 건우는 속으로 ‘완전 답정너네.’라고 구시렁거렸다.
하지만 상대는 추장의 최측근이었다.
그리고 초보자의 섬에서 길드를 만드는 것도 제법 흥미로운 일이었다.
건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해 보겠습니다.”
“잘 선택했어. 필요한 것이 있으면 연락하고.”
“알겠습니다.”
“그런데 너, 어디에 산다고 했지?”
“역 근처에 삽니다.”
“혹시 이사할 생각은 없어?”
“이사는 왜요?”
“추장님께서 빌라를 구입하셨거든.”
“그런데요?”
“유저들 중에서 희망하는 인원이 있다면 공짜로 입주하게 해 주시겠대. 물론 모든 희망자가 다 입주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너처럼 추장님과 오래 함께할 인원들만.”
그 말에 건우는 눈을 크게 떴다. 집을 공짜로 주겠다니! 추장이 부자라는 사실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오오, 정말요?”
“혹시 생각 있으면 나중에 연락 줘. 자리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건우는 공짜로 입주할 수 있다면 당연히 입주할 생각이었다. 그가 제아무리 부잣집 아들이라고 해도 공짜를 싫어하지는 않으니까.
더군다나 건우가 좋아하는 ‘동료’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김성근 형이 만약 입주한다면 나도 무조건 입주해야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집으로 향하였다.
동료들과 같은 빌라에서 생활한다는 생각에 들뜬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추장의 명령을 이행하려면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었다.
* * *
“크아아아아악!”
전신에 피를 뒤집어쓴 사내가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지옥에서나 들을 법한 비명이었다. 사내의 양옆에는 비명을 지를 힘도 없는지 축 늘어진 두 명의 사내가 의자에 묶여 있었다.
두 사내의 전신에도 징그러운 상처들이 가득하였다. 마치 혹독한 고문이라도 당한 모습들이었다.
“괜찮아?”
그때 비명을 지르던 사내의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이 기괴함으로 가득한 장소와는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
하지만 그 목소리를 들은 사내는 더욱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마치 목소리의 주인을 두려워하는 기색이었다.
“괜찮아?”
목소리의 다시금 물으니 사내는 애써 비명을 억누르며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저도 제가 왜 그랬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제가 그런 짓을 하다니 죄송할 따름입니다, 크윽. 그러니 부디……!”
“…….”
“죽여 주십시오!”
사내는 애절하게 말했다. 자신이 잘못했다고. 그러니 이만 자신을 죽여 달라고 말이다.
“아니, 왜 계속 사과하고 그래? 나는 정말 괜찮다니까. 반란? 뭐, 할 수도 있지. 나도 아버지를 죽이고 이 자리에 올라왔잖아.”
“주, 죽여 주십시오! 제가 잘못했습니다!”
“에이, 이렇게 끝내기는 아쉽잖아? 고문당하는 것도 처음이니, 조금 더 즐겨 봐. 어차피 게임이잖아.”
“게임이란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부탁드립니다. 이제 그만 저를 죽여…….”
말을 하던 사내는 갑자기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 기절한 것이었다.
그러자 사내를 위로하던 목소리의 주인공이 아쉽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재미없게, 또 기절하네.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같이 재미있게 놀면 얼마나 좋을까.”
여전히 나긋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목소리만 들으면 친한 친구와 놀지 못해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목소리의 주인공이 하던 행동은 농담으로도 ‘놀이’라고 표현할 수 없었다.
고문! 그것도 아주 잔인한 고문이었다. 마치 호기심이 많은 어린아이가 곤충의 몸을 자르거나 불을 붙이는, 그런 장난기로 가득한 고문 말이다.
“역시 새로운 놀이 대상이 필요한 걸까?”
“…….”
부드러운 목소리의 주인공이자 혈맹의 맹주가 하는 말에 맨머리를 한 사내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혈맹의 맹주, 김진우! 그는 적뿐만 아니라 아군조차 두려워하는 잔인한 지배자였다. 마치 살인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매일 살인을 저지르는 광기의 소유자이기도 하였다.
“아, 생각해 보니 여기서 찾을 필요가 없겠구나. 현리라는 것들이 올해 쳐들어올 것이라고 했지?”
김진우, 그는 현실에서 이상엽이라는 이름을 가진 유저였다. 당연하겠지만 그 역시 현리를 모르지 않았다.
모르기는커녕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 현리라고 생각하며 아주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현리는 강하다는데……. 현리에 대해 아는 사람 있어?”
그의 물음에 잠시 침묵하던 대머리 사내들이 한 명씩 돌아가면서 대답하였다.
“전사의 숫자가 저희보다 훨씬 많습니다.”
“현리 부족의 추장이 무척 강하다고 들었습니다.”
“삼백이 넘는 수인들이 현리의 추장에게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강북제패라는 부족이 순식간에 정복당하였습니다.”
하나같이 충격적인 이야기들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대로라면 현리와 싸워서 이길 가능성은 1퍼센트도 없을 것 같았다.
김진우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요즘 커뮤니티에서 한창 시끄러운 게 ‘현리 부족이 언제쯤 한국을 통일할 수 있을 것인가?’였으니까.
하지만 김진우는 현리의 강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같은 질문을 던졌다.
“우리가 현리와 싸우면 어떻게 될까?”
“…….”
“왜 아무도 대답을 안 해? 괜찮으니까, 아무나 말해 봐.”
그러자 서열이 가장 낮은 대머리 사내가 힘겹게 대답하였다.
“아마 질 것입니다.”
“……그래?”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김진우의 얼굴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그것은 분노였다.
“왜 기분이 나쁠까?”
고개를 갸웃거리던 김진우는 고개를 돌려 ‘질 것입니다.’라고 대답한 자신의 수하를 바라보았다. 수하의 얼굴을 보는 순간 김진우는 이상하게 피를 보고 싶어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김진우는 느닷없이 수하의 얼굴을 마구 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