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
그리고 이런 짐작이 틀리지 않았는지 정면으로 일단의 무리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대략 여든 명 정도로 보였는데 하나같이 험악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이 개새끼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쳐들어와! 뒈지고 싶냐!”
험악한 것은 인상뿐만이 아닌지, 말투도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말싸움을 한다면 백 번 싸워도 백 번 질 분위기였다.
‘숫자든 분위기든 모든 게 현기의 예상대로군. 전투도 예상했던 대로 돌아가겠어. 그렇다면 나는 여유롭게 구경이나 해 볼까?’
기세등등한 강북제패 부족의 전사들을 보았지만 호영의 표정은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수백 명을 데리고 왔어도 승리할 수 있을 텐데 고작해야 80도 안 되는 숫자였다. 어떤 기적이 일어나더라도 승패를 바꾸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그렇기에 호영은 친위대와 함께 움직이지 않고 혼자서 움직였다. 전장에서 살짝 벗어나서는 전투가 가장 잘 보일만한 위치로 움직인 것이었다. 이왕 구경할 거, 기가 막힌 위치를 확보하여 제대로 구경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누구에게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같은 호영의 움직임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친위대의 입장에서야 추장의 무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었지만, 조폭들의 입장에서는 이백 명에 가까운 적군을 눈앞에 두고 고작 한 명을 신경 쓸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호영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관전하기 좋은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도 잠시였다.
“나 말고도 다른 관전자가 있네?”
자리를 잡고 전투를 지켜보려는데 정체 모를 인간들이 그의 신경을 자극하였다. 호영 말고도 전투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네놈은 누구지?”
“내가 할 소리다. 강북제패의 부족민으로는 안 보이는데, 너희들은 여기에 무슨 일로 왔지?”
“우리는 혈맹 소속이다!”
자부심으로 가득한 목소리로 ‘혈맹 소속’이라고 외치는 대머리 거한.
호영은 그런 대머리 거한을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유명한 사이코패스의 세력이로군.’
강북제패 같은 경우는 호영이 활동하기 직전에 몰락하였기에 자세히 아는 바가 없었다. 구성원들이 조폭 출신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4회 차에 몰락하여 그 이상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나마 최근 들어 다음 정복 대상이라는 사실에 조금 관심을 두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혈맹이라고 불리는 세력은 호영도 알고 있는 게 꽤나 많았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센추리 유저라면 누구나 알 정도로 유명한 사건이 있었다.
바로 혈맹을 다스리는 유저가 연쇄살인을 저지른 사건이었다.
강북의 패자 중 한 명이 사실은 사이코패스에 연쇄살인범이었다니! 센추리를 막 시작했던 5회 차의 호영으로서도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사이코패스의 부하가 왜 여기로 온 거지? 설마 정찰인가? 하. 추진력이 대단하다고는 들었지만 지금 같은 시기에 정찰을 보낼 줄이야. 무공도 익히지 않았으면서 먼 거리는 또 어떻게 오가는 거지?’
아무래도 눈앞의 대머리들이 이곳에 온 이유는 강북제패 부족을 정찰하기 위함인 것 같았다. 강북의 경쟁자니 나중을 위해 미리 정찰하려는 것일 터.
하지만 아무리 나중을 위해서라지만 혈맹의 행동력은 놀랍게 느껴졌다. 도처에 마물이 들끓는 상황에서는 정찰을 보내는 것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시 무시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라는 건가.’
왠지 지금 친위대가 상대하고 있는 강북제패 부족보다 사이코패스가 이끄는 혈맹이라는 곳을 더욱 경계해야 할 것 같았다.
호영이 속으로 경계심을 품고 있는 사이, 대머리가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우리는 누구인지 밝혔는데 왜 네놈은 밝히지 않냐? 네놈은 도대체 누구냐!”
대머리의 물음에 호영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나는 현리 부족의 추장이다.”
“추장이라고? 그것도 현리 부족의 추장?”
“말도 안 돼! 추장이라는 자가 어떻게 혼자 움직일 수 있지?”
강하게 부정하는 혈맹 소속의 대머리들.
그들로선 현리처럼 거대한 부족을 이끄는 수장이 위험한 전장에서 혼자 움직인다는 게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기야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마물들이 들끓는 지금 시대에서 홀로 움직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테니 당연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호영은 조소를 지을 따름이었다.
“나를 알고 있나 보군. 그렇다면 혹시 너희들은 우리 부족을 적대하고 있나?”
“……!”
흠칫하는 대머리들을 보며 호영은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당연히 적대하고 있겠지. 안 그래도 위협적인 세력인데 강 너머로까지 진출했으니.’
그리고 호영으로서도 혈맹 부족은 언젠가 정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즉, 서로가 적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
“표정을 보니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겠네?”
“무슨 자신감이지? 우리는 세 명이다.”
“유저라면 알 텐데, 나의 자신감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유저?”
“아니었나? 제법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기에 유저인 줄 알았더니. 뭐, 상관은 없다.”
호영은 그 말을 내뱉고선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본래의 그라면 싸우기 전에 항복부터 요구하겠지만 상대는 자신의 소속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자들이었다.
이럴 때는 일단 때리고 보는 게 좋았다.
“모두 저놈을 죽여라!”
셋이서 동시에 달려들었지만 결과는 너무도 뻔했다.
“으억!”
“컥.”
짧은 비명을 내지른 채 쓰러지는 대머리들.
그중 한 명은 단말마를 지르며 경련을 하는 것이, 뇌진탕이라도 온 것 같았다.
이것이 마력을 담은 주먹의 위력이었다.
호영은 자신이 쓰러뜨린 사내들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보채지 않아도 내년이 되면 어련히 정복해 줄 텐데 말이야.”
제법 거리가 있어서 올해는 혈맹까지 정복할 수는 없겠지만 내년이 되면 또 다르다. 그때면 다시 여력이 생길 것이기에 혈맹을 비롯하여 강북 대부분을 평정할 수 있는 것이었다.
#강북제패
혈맹 소속의 전사들을 기절시킨 호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한 얼굴로 친위대의 전투를 구경하였다.
가장 재미있다는 싸움 구경. 하지만 호영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강북제패 부족과 친위대의 전투는 호영의 기대에 많이 못 미쳤다. 소규모 부족을 상대할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결과가 나왔던 것이다.
‘자신감 넘치게 덤벼들더니. 결국 허세였나?’
처음에는 기세등등하게 싸움을 걸어오던 강북제패 전사들이었다. 숫자 차이를 보고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기색이라 호영도 제법 감탄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그렇게 용기를 보이는 순간은 무척이나 짧았다. 김성근의 무지막지한 활약이 시작되고 친위대 특유의 일사불란한 공방을 보여 주자 강북제패 부족의 대열은 크게 흔들렸다.
그러다가 ‘형님’이라 불리는 조직의 중간 보스 몇몇이 김성근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강북제패 부족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결정타를 날린 것은 ‘큰형님’이라 불리는 강북제패 부족의 수장이 퇴주한 일이었다. 최측근처럼 보이는 전사 열 명과 함께 등을 보이고 도주하는 강북제패 부족의 수장.
여기서 승패는 정해졌다. 친위대의 압도적인 승리로 말이다.
‘상대가 기대에 못 미쳤다는 점은 아쉽지만 친위대가 어느 정도 성장했는지는 알 것 같다.’
큰 소득이 없는 전투였지만 친위대의 실력을 자세하게 살폈으니 소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첫 실전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같은 인간, 그것도 강북제패처럼 나름 규모 있는 부족과 싸운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최진수도 그러더니, 별거 아닌 것들이 도망치는 실력 하나는 대단하네.”
악착같이 도망치고 있는 강북제패 부족의 수장을 보며 호영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친위대의 추격에서 벗어났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볼 수 있으리라. 전투보다 추격을 더 잘한다는 친위대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친위대의 손에서 벗어났다고 호영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파바박!
혈맹 소속의 정찰병들을 대충 묶어 두고는 곧장 강북제패 부족의 패잔병을 추격하기 시작한 호영.
먼 거리였지만 무공을 익힌 사람답게 엄청난 기동력으로 패잔병들의 뒤를 따라잡았다.
“뭐, 뭐냐, 네놈은!”
당연하겠지만 갑작스러운 호영의 등장에 강북제패 부족의 수장을 비롯하여 최측근 열 명은 크게 당혹해하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등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영은 그들의 경악어린 표정은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말했다.
“미안하지만 도망치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 나중에 복수하겠다고 설치면 귀찮아지거든.”
후환이 두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성가셨다.
물론 지금 죽인다 해도 3회 차에 다시 복수하겠다고 날뛸 것이다. 그러나 3회 차의 현리는 지금보다 훨씬 강해진 이후일 터.
그렇기에 2회 차에만 방해하지 못하게 만들면 성가실 일도 없을 것이었다.
“너지? 이 개새끼야!”
“음?”
“네가 현리 추장이라는 새끼잖아!”
딱히 의미는 없지만 한 조직의 수장답게 어느 정도 판단력이 있는 모양이었다. 느닷없이 등장한 호영의 정체를 순식간에 간파할 정도면 말이다.
“그런데?”
“이 새끼가, 너, 내가 누군 줄 알아?”
“조폭이라는 말은 들었다. 근데 그게 뭐?”
“아는데도 그래? 허! 시발, 네 뒈질래? 어디 사는지는 몰라도 내 조직을 이렇게 망가뜨리고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그 협박에 여유롭기 그지없었던 호영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현피’라는 인터넷 용어가 있다. 온라인 게임이 막 태동하였을 때 만들어진 용어인데 ‘현실’과 ‘PK’의 합성어였다.
즉, 인터넷 게임에서 만난 사람과 실제로 만나 싸우는 행위를 뜻하는 것이다.
한때는 이 현피라는 것이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된 적도 있었다. 게임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실제 살인으로 이어졌던 까닭이었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겠지만 센추리가 등장한 이후로 이 현피라는 것은 온라인 게임 시절보다 훨씬 많이 벌어졌다.
이유야 간단했다. 게임에 목숨 거는 사람이 훨씬 많아졌기 때문이다.
‘완전히 무시할 수만은 없는 협박이군. 기분 나쁜 일이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별다른 안전장치가 없으니까.’
어떻게 보면 이 또한 방심이라고 볼 수 있었다. 지금까지 현실의 위협을 크게 우려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말이다.
하지만 회귀 전의 기억을 되새겨 보면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센추리에서 잘나가던 유저들이 현실에서의 사정으로 고꾸라진 게 한두 명이 아니었으니.
눈앞의 조폭들만 해도 정확한 일은 모르지만 센추리에서 망했다기보다는 현실에서의 사정으로 센추리에 접속을 못 하게 되었다고 들었다.
‘혈맹’의 사이코패스도 마찬가지였다. 연쇄살인마인 게 발각되어 징역살이를 하게 되었다. 교도소로 끌려 간 이후에는 당연히 센추리 접속을 하지 못했고 말이다.
이외에도 싸움이나 살인 그리고 테러 따위로 센추리에 영영 접속을 못하게 되는 경우들이 꽤나 많았다.
‘원래라면 3회 차부터 본격적으로 안전을 꾀하려고 하였지만 지금부터 조금씩 대비라는 것을 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