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천재에도 종류가 있나? 나는 그냥 천재면 천재라고 생각했는데.”
“당연히 종류가 있죠. 쓸데없이 기억력만 좋은 천재도 있고, 신은규라는 사람처럼 계산의 천재라고 해야 되나. 아무튼 수에 밝은 천재도 있죠.”
“너는?”
“저는 솔직히 말해 가장 흔한 종류의 천재입니다. 그냥 사고력이 남들보다 빠른 천재라고 해야 할까요? 쉽게 말해서 누구나 찾을 수 있는 정답을 누구보다 빠르게 찾는 천재? 대충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렇군.”
고개를 주억거리는 호영이지만 눈썹이 살짝 찌푸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가지가지하네, 누가 천재 아니랄까 봐, 천재 안에서도 등급을 나누었어.’
은근히 천재에 대한 자격지심을 가진 호영이기에 가끔씩 현기의 머리에 꿀밤을 날리고 싶을 때가 있었다.
지금처럼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자랑할 때면 특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호영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억누르며 전방을 바라보았다.
“그새 전투가 끝났군.”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덧 전투가 끝나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아군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예, 이번에도 제가 생각해 놓은 대비책들이 전부 쓸모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사용하지 않은 게 좋은 거지. 너의 대비책이란 결국 위기를 가정한 것이니까.”
투덜거리는 현기를 향해 호영이 그렇게 말하니 현기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렇긴 한데, 이럴 거면 제가 군사로서 있을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정복 전쟁을 시작한 지도 어느덧 40일이 지났다. 평범한 군대였으면 위기도 만나고 한창 고생하고 있었을 시점.
하지만 친위대는 달랐다. 너무 강하기 때문일까?
40일 동안 단 한 번도 위기를 겪지 않고 승승장구하였다. 수인족, 고블린 그리고 소수의 마물들까지.
그 누구도 친위대를 막아 낼 수 없었다.
처음에는 호영이 앞장서서 친위대를 진두지휘하였지만 다음 날이 되자 그럴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호영이 없어도 친위대는 이미 완벽했던 것이다. 당연하겠지만 현기의 책략들도 크게 쓸모가 없었다.
정공법으로 이미 피해 하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데 굳이 기책을 사용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너무 섭섭해하지는 마. 지금이야 적들이 분산되어 있으니 싱겁게 느껴지는 것이지만 1~2년만 지나도 적들이 뭉치기 시작할 거야. 그때쯤이면 네가 활약할 일도 많아질 테지.”
“그 말을 들으니 장비가 더욱 날뛰어 줬으면 좋겠군요. 적들이 더욱 두려움을 느끼게끔 말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방심하지는 말고.”
나무라듯 말했지만 사실 호영은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언제나 만전을 기하는 것이 이현기라는 인물이었다.
지금처럼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대비할 정도니까.
“전투가 모두 끝난 것 같으니 우리도 슬슬 가 보자.”
호영은 현기에게 그리 말하며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의 말처럼 전투는 이미 끝나 있는 상황이었다.
견인 전사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고 나머지 견인들은 무릎을 꿇은 채 항복을 하고 있었다. 친위대 병사들은 부락 곳곳을 장악하는 중이었다.
전투가 시작되고 고작 10분도 안 되어 이같은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었다.
“추장님! 저의 활약을 보셨습니까!”
화통하게 대소를 지으며 호영에게 다가오는 거한. 호영은 거한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선봉장다운 활약을 했더군.”
“제가 누굽니까? 바로 김성근입니다. 앞으로도 선봉은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지금처럼만 한다면 굳이 다른 이에게 선봉을 맡길 이유는 없겠지.”
“하하하! 선봉은 영원히 제 것이겠군요!”
호영의 대답에 만족한 것인지 요란한 웃음을 지으며 물러나는 김성근이었다.
“정말 시끄러운 녀석이군요. 성격이 달라진 거 맞습니까?”
“조금은 공손해졌지 않나?”
“저게 공손해진 겁니까?”
현기가 황당한 목소리로 되묻자 호영은 그저 피식 웃음만 지었다. 다른 사람은 변화를 못 느꼈겠지만 이전부터 김성근에게 관심이 많았던 호영은 김성근이 꽤나 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변화가 자신에게 무척이나 이로운 것이라는 사실도 말이다.
‘뭐, 자신감이 지나친 것은 여전해 보이지만.’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어느덧 전장 정리가 끝났다. 이제 슬슬 다음 행보를 정해야 할 때.
호영은 고개를 돌려 현기에게 물었다.
“계속 진격할까, 아니면 방향을 돌릴까?”
“여기서 서쪽으로 더 가 봐야 유저를 보기는 힘들 겁니다. 아직 강서구를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여기서부터는 너무 외곽이라 인구가 적어요.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이미 강서구 전부를 정복했다고 봐도 좋을 것입니다.”
정복 전쟁을 시작한 지 고작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현리의 외형은 이미 어마어마하게 커져 있었다.
인구만 해도 1만 6천을 넘었고 교역을 통해 동맹 또는 우호적인 세력이 된 부족들의 인구도 다 합하면 1만에 가까웠다.
현기의 말처럼 현리는 이미 강서구 전체를 정복한 것과 다름이 없는 상황이었다.
“하기야 지금 정복하지 않은 땅도 100년이 지나지 않아 결국 현리의 세력권 안에 편입될 수밖에 없겠지.”
“물론 중간에 변수가 생길 수도 있겠지만 웬만해서는 그렇게 될 것입니다. 현리는 지금도 우리가 없는 미래에도 계속 강성할 것이니까요.”
현기의 자신감 넘치는 대답에 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동의하는 바였다.
이미 첫 번째 목표였던 ‘교역에 거부하는 부족들을 응징하기’를 달성한 상황.
힘의 우위를 명확하게 보여 주었으니 앞으로 수인들이건 인간들이건 현리에게 감히 반항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현리 부족은 이들과의 교역을 통해 그 성세를 계속해서 유지할 터.
현기의 말처럼 중간에 변수가 발생할 수 있겠지만 그 변수는 2회 차가 끝나기 전에 모두 제거하면 그만이었다.
‘더 이상 1회 차 같은 실수는 하지 않는다.’
마족들에게 왕좌를 뺏기는 일 따윈 다시는 없을 것이었다.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호영은 다시 현기에게 물었다.
“어쨌든 그렇다면 부족으로 회군하는 게 낫다는 거지?”
“지금 당장은 회군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견인들을 부족으로 끌고 가야 되니까요.”
“회군한 이후에는?”
“그때야 뭐…… 강을 건너 마포구나 덕양구 쪽으로 진출해야죠. 아직 목표했던 인구를 다 채우지 못했으니 정복을 멈출 수도 없지 않습니까?
현재 비축된 식량으로 감당할 수 있는 인구를 계산해 볼 때, 최대 2만까지는 수용이 가능하였다. 즉, 4천 정도의 인구를 추가로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4천이라면 현리라고 해도 적다고 볼 수 없는 숫자. 그렇기에 현리의 입장에서는 정복 전쟁을 이대로 멈출 수는 없었다.
“강남 쪽이 아닌 강북 쪽을?”
“저도 처음에는 유저 수가 많은 강남으로 가는 게 좋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세력 자체는 강북이 크더라고요. 강남의 경우는 아직 분산되어 있어서 인구가 백이 넘는 부족이 거의 없는데, 강북에는 벌써 칠백에서 팔백 정도 되는 규모의 부족이 두 개나 생겼을 정도입니다.”
“그 정도면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규모로군.”
호영은 조금 딱딱해진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확실히 유저들의 성장이 빠른 것 같다. 강북의 두 세력이 2회 차의 패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벌써부터 그같은 규모를 가지다니. 이것도 나비효과라고 봐야 되나.’
2회 차는 그도 경험해 본 적이 없었기에 확실히는 모르지만 진도가 대략 1~2개월은 빠른 것 같았다.
유저 수도 호영이 회귀하기 전보다 조금 더 많은 것 같았고 말이다.
“예, 그러니 더 성장하기 전에 싹을 제거해야지요.”
“싹을 제거한다라……. 그렇게 말하니 뭔가 악당을 보는 것 같군.”
“요즘은 악당이 주인공인 경우가 많죠, 흐흐.”
현기의 그 말에 호영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악당이라고 나쁠 게 뭐가 있어. 어차피 8회 차까지 살아남은 귀족이나 왕들도 대부분이 영웅보단 악당에 가까운 자들인데 말이야.’
잔혹하고 비정한 센추리 세계에서 적이 성장할 때까지 기다려 준다?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내 자신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적을 제거할 수 있을 때 제거하는 게 좋았다.
운이 좋으면 수하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말이다.
* * *
스무 명의 남녀가 단체로 정사를 나누는 광란의 현장.
음란하면서 문란한 행위가 광적으로 벌어지는 장소에 한 사내가 발을 디뎠다.
“새끼들, 약도 안 했으면서 더럽게들 노네. 여기가 동물의 왕국인 줄 아나.”
사내, 두식이파의 행동대장 철웅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 역시 여자를 밝히는 것은 매한가지였지만 저 정도로 추잡하게 밝히지는 않았다.
철웅은 나름 건전한 성생활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는 잠시 ‘이놈들을 어떻게 때려야 잘 때렸다고 소문날까?’를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형님이 오셨는데 고추 안 집어넣냐, 이 새끼들아!”
“오, 오셨습니까, 철웅 형님!”
그의 외침에 정사를 벌이던 사내들이 양손으로 자신의 사타구니를 가리며 황급히 일어나서는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나름대로 조폭다운 격식을 갖춘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격식을 갖춘다고 해도 전부 나체 상태라 그런지 흉물스럽게만 보였다.
당연히 철웅의 눈으로도 역겹게 느껴졌다. 그는 구겨진 인상을 펴지 않은 상태로 자신의 부하들에게 말했다.
“누구는 개고생하고 왔는데 아주 즐거웠겠네?”
“죄송합니다!”
“노예들 관리하라고 보냈더니 더럽게 난교나 하고 있고 말이야. 내가 우습다 이거지?”
“아닙니다!”
“참 좋은 곳이야. 현실에서는 쉽게 할 수 없는 난교도 얼마든지 할 수 있고. 그런데 말이지, 여기서는 살인도 가능하다는 거 알지?”
“죄송합니다!”
“적당히 해라. 또 빡치게 하면 그때는 얄짤 없다. 죽을 때까지 맞거나, 맞아서 죽는 거다.”
한참 동안 동생들의 ‘군기’를 잡던 철웅이 그제야 기분이 조금 풀렸는지 자신의 발밑에 엎드려 있는 여자 노예의 등을 의자 삼아 앉고서는 특유의 큰 목소리로 말했다.
“큰형님이 전쟁 준비를 하시란다.”
“예? 전쟁요?”
“그래, 인마. 현리 부족이라고 했던가? 아무튼 그놈들이 며칠 안에 쳐들어올 것 같으니 준비하라고 하시더라.”
철웅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오오!”
“드디어 전쟁입니까!”
“흐흐, 현리 부족이라면 제법 큰 부족 아닙니까? 이기면 먹을 게 참 많을 것 같습니다!”
“언제쯤 쳐들어온답니까? 차라리 우리가 먼저 쳐들어가는 것도…….”
마치 발정 난 짐승들처럼 정신없이 발광하는 조폭 출신의 유저들.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이라는데 두려워하기는커녕 미치도록 즐거워하고 있었다.
조폭들답게 일반 유저와는 차원이 다른 반응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시끄러워, 이 새끼들아!”
발광하는 조폭들을 향해 철웅이 다시금 고함을 지르니 그제야 입술을 다물며 침묵하였다.
“병신 같은 것들이. 싸움은 좆도 못하면서 전쟁은 드럽게 좋아해요.”
“혀, 형님. 그래도 저희들이 식구들 중에선 싸움을 가장 잘하는 편이지 않습니까? 지난 전쟁에서도 저희가 가장 활약하기도 했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