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98화 (98/345)

# 98

#시작된 전쟁

“호영아, 너는 저런 거 하지 마라.”

어머니가 TV를 가리키며 하는 말에 호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많은 게 바뀌었는데 이것만큼은 바뀌지 않은 것 같네.’

TV에서는 센추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그것도 무려 9시 뉴스였는데 얼핏 봐도 심각한 내용처럼 보였다.

-물론 게임이 아무리 폭력적이고 선정적이라 하더라도 이를 선택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소비자의 몫입니다. 미리부터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 수입을 금지하는 것은 문화 검열에 해당하죠. 하지만 이 게임의 문제점은 가상현실이라는 점입니다. 살인을 강요하고 온갖 범죄가 허용되는 가상현실 게임. 안전성의 여부도 불확실한 이 게임을 과연 이대로 내버려 둬도 괜찮을까요? 참고로 게임위에서는 이 게임의 이용 등급을 18세 이상의 성인 남성만 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올해 설립된 ‘건전게임심의위원회’의 위원장이라는 사람이 게스트로 나와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대체로 센추리가 얼마나 위험한 게임인지, 또 얼마나 선정적이고 폭력적인지를 이야기하였다. 물론 이야기의 마무리는 ‘규제의 필요성’에 대한 것이었다.

자신의 입으로 문화 검열에 해당한다고 말했으면서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규제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이러니 한국이 뒤처졌지. 중국이나 미국은 벌써 국가가 나서려 하고 있는데.’

그런 생각이 들자 호영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어머니 앞이었기에 태연한 목소리로 대꾸하였다.

“안 해, 그런 거.”

“다행이다.”

“엄마는 요즘 산책하고 있어?”

“네가 그렇게까지 말했는데 안 하겠어? 당연히 하고 있지.”

“잘했어. 앞으로도 귀찮아하지 말고 꼭 해. 건강검진도 계속 받고. 아니다. 나랑 같이 가자. 다음 주에 시간 돼지?”

“된다.”

“그때 같이 가. 돈 걱정하지 말고.”

“알았어, 알았어.”

호영의 잔소리 아닌 잔소리에 어머니는 피식 웃음을 지으며 대답하였다. 2년 전까지만 해도 호영의 잔소리를 어색하게 받아들였는데 이제는 나름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근데 누나는 그 사람이랑 잘되어 간데?”

“그러니까 집에도 안 들어오고 있지.”

“맨날 싸우고 화해하고를 반복하더니 오래도 가네.”

“곧 결혼할 것 같아. 요즘 결혼 얘기를 자주 하고 있거든.”

어머니의 말에 호영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호영의 누나인 송효주는 반년이 지나지 않아 결혼식을 올린다. 나이도 있고 혼전 임신을 하여 급하게 결혼한 것이었다.

“솔직히 엄마는 마음에 안 드는데……. 직업도 별로고. 에휴.”

“뭐, 어떻게 하겠어. 누나의 선택인데.”

“그래도 네 누나가 아깝잖아.”

“괜찮을 거야. 돈은 못 벌어도 성격은 좋으니까.”

호영은 매형이 될 사람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의 성정이 어떤지는 호영이 제일 잘 알고 있으니까.

회귀 전에도 호영만 아니었으면 그리 나쁘지 않은 결혼 생활을 하였을 것이다. 호영이 사업한다느니 스킬 산다느니 누나의 돈을 빌려 가면서 부부 관계가 서먹해진 경우였으니 말이다.

‘이번에는 내가 갚아야지. 평생 동안 돈 걱정할 필요 없도록.’

속으로 그렇게 다짐하는 호영이었다.

* * *

본가에서 이틀 휴가를 보낸 호영은 마지막으로 친구들을 만나 원 없이 즐기고는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벌써 5월인가.”

달력을 보니 어느덧 5월이었다. 2분기가 절반 가까이 지나간 것이다.

호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금 체감했다.

시간은 언제나 빠르게 흘러간다는 사실을 말이다.

‘지금쯤이면 중국에서 한창 무림이라는 것이 만들어지고 있겠네. 미국에서는 마법사들이 등장하고 있으려나?’

그는 잠시 미래의 경쟁자가 될 나라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았다. 한국과 다르게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있는 그들은 지금도 착실하게 강해지고 있었다.

중국에선 무공이, 미국에선 마법이 그리고 일본에서는 두 가지 모두가 조금씩 발전하고 있을 터.

비록 터무니없는 이점을 가지고 있는 호영이지만 미래의 강적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여유 부릴 상황이 아니었다.

‘솔직히 지금은 다른 나라들을 걱정할 처지도 아니지. 아직 서울조차 정복하지 못했으니까.’

미래의 강적도 강적이지만 현재의 경쟁자들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지금이야 최진수 외에 이름을 날리고 있는 유저가 별로 없다지만 머지않아 호영의 위협이 될 자들이 한국에서만 열 명이 넘었으니까.

“경쟁자들을 걱정하지 않으려면 하루빨리 일인자 자리를 확고하게 차지할 필요가 있어. 내일부터 있을 정복 전쟁, 난 거기서 절대적인 우위를 확보한다.”

호영은 주먹을 강하게 쥐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 * *

호영은 언덕 위에서 팔짱을 낀 채 전장을 내려다보았다. 이백여 명의 친위대원들이 조그만 목책 하나를 둘러싼 채 공격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현리 부족의 친위대 김성근이다! 너희는 지금 당장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우리 부족은 항복한 사람에겐 절대 공격하지 않는다!”

공격이 시작되기 전, 거대한 체구에 온몸이 근육으로 뒤덮여 있는 사내가 우렁차게 외쳤다. 투항을 권유하는 김성근의 외침이었다.

그러자 목책 뒤에 숨어 있던 견인족 전사들이 몸을 떨었다.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김성근의 외침이었으니 용맹한 견인족조차 두려움에 떨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역시 만인적 장비답습니다. 수인들조차 두려움에 떨게 만들다니.”

군사, 현기의 말에 호영은 희미한 웃음을 흘렸다. 최근 들어 현기는 부족의 주요 간부들을 역사적 인물들과 비유하고는 하였다.

김성근은 위연 또는 장비, 원재는 간옹, 봉성은 전위, 봉하는 만총 등등.

원재 같은 경우는 성격이 간옹과 전혀 달랐지만, 아무래도 유저들을 섭외하는 모습과 어려운 시절을 함께했다는 사실을 보고 간옹이라 평가한 것 같았다.

‘홍준기는 관우라고 했던가. 내가 봤을 땐 전혀 안 어울리는데 말이야.’

참고로 호영의 경우는 조조라고 할 때도 있었고 이방원이라고 할 때도 있었다. 호영만큼은 현기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웃긴 것이 있다. 남들은 그렇게 역사적 인물들과 비유하면서 정작 자신은 역사의 인물과 비유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역사에 없었던 새로운 영웅이 되고 싶다나?

호영은 웃음을 머금은 채 현기에게 말했다.

“아직도 김성근을 장비라고 부르는 건가? 요즘 이미지가 조금 달라졌던데?”

“뭐, 말투가 조금 바뀌었다고 해도 무식한 것은 여전하지 않습니까? 저기 저 모습을 보십시오. 투항하지 않는다고 혼자 적진으로 달려들다니. 《삼국지연의》의 장비도 저 정도로 무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목책을 향해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김성근을 내려다보며 현기는 이죽거리듯 말하였다. 그의 말처럼 지금 김성근의 모습은 삼국지연의의 장비보다 무식해 보였다.

물론 호영의 눈으로는 누구보다 용맹스럽고 선봉장다운 모습처럼 보였지만 말이다.

콰지직!

김성근이 목책을 향해 달려들자 나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순식간에 목책이 무너졌다. 정말 터무니없는 파괴력이 아닐 수 없었다.

당연하겠지만 목책에 의지하고 있던 견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패닉에 휩싸였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견인 전사조차 입을 떡 벌린 채 멍하니 서 있는 상황.

마치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을 목격한 얼굴들이었다.

“뭐, 저 정도로 실력이 뛰어나다면 조금 무식해도 상관없지 않겠어?”

탱크처럼 돌진하여 적의 진열을 파괴하는 김성근을 보며 호영이 그리 말하니 현기도 부정할 수 없다는 듯 고개만 흔들었다.

하지만 무언가가 아쉬웠는지 이 같은 질문을 던졌다.

“신입들의 재능은 어떤 것 같습니까? 김성근 정도의 자질을 가진 이는 없습니까?”

“김성근? 천재는 그렇게 많지 않아.”

현기의 물음에 호영은 조소를 흘렸다. 겨우 예순 명밖에 안 되는 신입 유저 사이에 김성근 수준의 천재가 있을 리는 없다.

김성근은 유저 수가 급격하게 늘어나는 3회 차 이후에도 항상 천재로 거론되던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네가 추천한 유저들은 괜찮은 것 같다. 친위대의 진영이라는 사람도 그렇고 또 동연이라는 사람도 그렇고. 모두 재능이 있어.”

현기는 호영이 혼자 원정 나가 있는 동안 추장 대행으로서 업무만 본 것이 아니었다. 인재 좀 구해 달라고 호영에게 잔소리를 퍼붓던 현기답게 추장 대행이 되자마자 자신이 직접 인재를 발굴하였다.

마침 호영의 활약으로 강서구의 유저들이 급격하게 유입되던 상황. 현기는 스스로도 만족할 인재를 영입하였다.

진영과 동연이라는 자가 바로 그 인재들이었는데, 각각 참모의 재능과 상인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참모의 재능을 가진 사람은 진영이라는 유저로 본래부터 친위대 소속이었던 인물이었다. 현기가 친위대에서 허송세월을 보냈을 때 눈여겨보았던 유저인데, 확실히 머리도 좋고 군재에도 밝은 것이 참모로서 제격이었다.

지금도 참모로서 친위대장인 장훈 곁을 보좌하고 있었다.

그다음 동연이라는 유저는 상인의 재능을 가진 인물이었는데, 입심도 입심이지만 담력도 대단하였다.

상인으로서 타고났다고 해야 될까? 동연은 호영이 현리로 복귀하자마자 호영에게 수인들과 교역해야 한다고 당돌하게 요구하였는데 호영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본인이 직접 수인들의 부락을 찾아다니며 교역을 하였다.

몇 번의 습격이 있었고 죽을 뻔한 경험도 몇 차례 겪었지만 개의치 않아 했다. 더 많은 이득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떤 것이든 감수할 수 있는 진짜 상인이었다.

‘심지어 남아도는 수인 암컷들도 팔자고 했었지. 어차피 쓸데없는 밥벌레 아니냐면서 말이야. 나중에는 인간도 팔자고 할 것 같아.’

처음에는 훈연한 물고기나 소금 따위를 팔아 육류나 열매 따위를 얻어 오더니 이제는 쓸모없는 인력을 팔아 쓸모 있는 노동력을 얻어오려 하고 있었다.

일종의 노예 상인이 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야말로 비정한 상인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 하지만 호영으로선 그렇기에 더욱더 마음에 드는 인재였다.

“추장님이 구해 온 인재들도 제법이던데요? 제갈량이나 소하만큼은 아니어도 보급관으로서의 자질을 갖춘 인재를 구해 오셨어요.”

“아, 은규? 뭐 은규가 대단하긴 하지. 그런데 봉영이나 덕규도 괜찮지 않나?”

“덕규는 견인족이라 솔직히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봉영이라는 여자 궁수도 나름 괜찮은 것 같기는 한데 궁수를 키우려면 몇 년은 족히 걸리지 않습니까? 이번 회 차에서는 별로 활약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신은규라는 사람이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 정확히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지?”

“일단은 성실하지 않습니까? 꼼꼼한 성격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저랑은 다른 부류의 천재이더군요.”

스스로를 천재라고 표현하는 현기의 모습에는 어색함이 없어 보였다. 무공에 대한 재능이 없음을 깨달았을 때는 위축된 모습만 보여 주더니, 군사로서 익숙해졌다고 천재 특유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호영은 속으로 어이없어 하였지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이같은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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