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95화 (95/345)

# 95

터무니없는 속도로 거리를 좁힌 호영은 가장 먼저 인간을 우습게 여기던 전사 한 명을 침묵하게 만들어 주었다.

서로 간의 거리 차이가 20미터는 되었지만 호영은 단 다섯 번의 도약으로 그 거리를 좁혀서는 상대를 공격하였다.

“인간이 어떻게!”

“바보들아, 어서 부락에…… 어억!”

멍청한 얼굴을 하던 두 전사의 최후도 마찬가지였다. 호영은 공평하게 복부에다 한 대씩 때려 주었다. 그러자 두 전사 역시 무릎을 꿇은 채 침묵에 빠져들었다.

이제 남은 전사는 단 하나.

“히익!”

가장 어리고 겁이 많은 막내 전사만이 남아 있었다.

“우두머리는 어디에 있지?”

“마, 말할 수 없다!”

겁에 질렸지만 우두머리에게 해가 되는 짓은 절대 하지 않는 견인 전사. 역시 우두머리에 대한 충성심이 상당한 견인족 다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호영은 그가 대답하지 않아도 이미 정답을 알아 버렸다. 두려움에 질린 전사의 시선이 계속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너도 일단 자고 있어라.”

“꾸엑!”

요란하게 비명을 지르는 전사를 뒤로 하고 호영은 부락의 중심부로 향하였다.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가 들리니 정작 경계병의 비명은 듣지 못하는군.’

누가 발정기 아니랄까 봐 난리도 그냥 난리가 아니었다. 호영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고는 부락 중심부에 있는 목조건물을 발로 부쉈다.

콰아앙!

제법 큰 건물이었지만 호영의 발길질만큼은 버틸 수가 없었다. 호영의 발길질에는 마력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제기랄! 이게 뭔 개 같은 일이야!”

무너진 잔해 속에서 사람으로 보이는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호랑이 귀에 거대한 손톱을 가진 존재였다.

“이 부락의 우두머리는 호인족이었네?”

“뭐냐, 네놈은? 설마 인간인가?”

“그래, 이곳을 지배하러 온 인간이다.”

웅성웅성!

갑작스러운 소란에 열심히 교미하고 있던 견인 전사들이 구경을 나왔다.

그들은 잠시 동안 어리둥절한 얼굴로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호영을 포위하기 시작하였다.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진 않았지만 호영이 습격자임은 분명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호영은 그런 견인 전사들의 모습을 힐끔 바라보다가 시선을 다시 정면으로 돌렸다.

“웃기는 인간이군. 내 땅을 지배하러 왔다니, 그게 뭔 개소리야?”

호인 우두머리는 그저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속으로 ‘인간 따위가.’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하였다.

“시끄럽고. 죽기 싫으면 나에게 항복해라.”

“하! 개새끼들이 지랄하는 것은 자주 보았지만 설마 인간이 지랄을 떠는 일을 보게 될 줄이야. 어이, 개새끼들! 네놈들은 그냥 구경이나 해라. 어차피 한 놈뿐인 것 같으니.”

의문의 침입을 당한 상황임에도 상대가 인간이라는 이유로 방심하는 호인 우두머리. 오만하고 호전적인 호인족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차라리 잘되었군.’

하나하나를 다 때려잡을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무대를 만들어 준다면 호영도 굳이 번거로운 작업을 할 필요가 없었다.

오직 눈앞에 있는 건방진 호인족만 때려죽이면 될 것 같았다.

우두둑우두둑! 마치 동네 양아치처럼 뼈소리를 내며 건들거리는 발걸음으로 다가오는 호인 우두머리.

잠시 무표정한 얼굴로 호인 우두머리를 바라보던 호영은 돌연 창을 내질렀다.

“뭐, 뭐야?”

실력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는지 호영의 창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낸 호인 우두머리는 식겁한 표정을 지었다.

호인족 특유의 반사 신경이 아니었으면 피하기는커녕 반응하지도 못했을 공격이었다.

“히, 힘을 숨기고 있었나! 이 비겁한!”

“개소리하네.”

푹!

운으로 첫 공격은 피했지만 두 번째, 세 번째 공격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두 번째 공격에 허벅지를 베이고 세 번째 공격에 가슴이 꿰뚫린 호인 우두머리는 결국 절명하였다.

생존력이 뛰어난 호인족이라 해도 가슴이 꿰뚫린 상태에서 살아날 수는 없었다.

“너희들의 우두머리는 죽었다.”

호영이 그렇게 말하자 견인 전사들은 입을 꾹 다문 채 침묵하였다. 서로 눈치를 살피는 것이 호영을 공격해야 할지, 아니면 투항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너희들의 우두머리가 되고자 한다. 인정하기 싫다면 지금 당장 앞으로 나와라.”

“…….”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나를 우두머리로 인정한다고 보면 되는 것이겠지?”

이번에도 침묵을 유지하는 견인 전사들. 약육강식에 순종하는 견인족답게 호영을 우두머리로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호영은 종지부를 찍기 위해 전사 한 명을 불렀다.

“거기 너!”

“나, 나 말인가?”

“이름이 뭐지?”

“덕규. 덕규다.”

“앞으로 견인족은 네가 통솔한다.”

그 말은 이인자가 되라는 말과 다를 게 없었다. 덕규라는 이름의 사내는 잠시 순진한 미소를 짓다가 이내 정색한 얼굴로 물었다.

“통솔을 왜 내가 하나? 우두머리는 너다.”

“나는 수인들 전체를 통솔해야 한다. 그리고 인간까지도 통솔해야 하지.”

호영의 말에 덕규는 환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우두머리로 모시겠다.”

그러자 다른 견인 전사들도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우두머리로 모시겠다!”

열여덟 명의 견인 전사는 그렇게 호영의 수하가 되었다. 호영이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순조로운 출발이었다.

‘덕규가 제법 인정받는 전사였나 보네. 저 호인 놈은 별로 리더십이 없던 모양이고.’

힘 좀 쓸 것 같은 전사 한 명을 대충 골랐는데 아무래도 운이 따른 것 같았다. 물론 그런 것보다 호영이 보여 준 무력이 워낙 압도적이어서 쉽게 굴복한 것이겠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건 이렇게까지 나를 따라 준다면 굳이 노예로 둘 필요는 없겠어.’

아직 일면만 보았을 뿐이지만 호영은 적어도 덕규가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견인족 특유의 충성심을 믿기 때문은 아니었다.

준기조차 100퍼센트 신뢰하지 않는 호영이 오늘 처음 본 견인 전사의 충성을 믿을 리는 없었다. 다만 그는 견인족의 충성심보다는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하다.’라는 견인족의 또 다른 특성을 신뢰하였다.

거인이 아직 남아 있을 북방 지역이 아닌 이상 호영을 ‘약자’로 부를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한마디로 호영은 언제나 강자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기에 호영은 견인들의 반란을 우려하지 않았다. 자신이 존재하는 한, 견인들은 저항 같은 것은 꿈도 꾸지 않으리라.

* * *

“황당하네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뭐가?”

“견인족이 왜 이렇게 쉽게 항복하느냐고요.”

제대로 된 전투 한번 없이 모든 게 끝나자 봉영이 허탈한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그녀는 여전사들과 함께 전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물론 전투 자체는 호영이 책임질 것이지만 예상외의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었기에 부락을 점거한 이후 점령군으로서 전투를 준비한 것이었다.

하지만 견인족은 별다른 저항 없이 호영에게 굴복하였고 그에 따라 봉영이 할 일은 사라졌다. 긴장하면서 대기하고 있던 그녀로선 허탈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말했잖아, 이 세상은 약육강식의 세계라고.”

“그래도 종족이 다른데…….”

“이들의 우두머리는 애초에 호인족이었어. 그리고 견인족의 입장에서는 우두머리가 호인족이건 인간이건 큰 차이는 없겠지. 강하기만 하다면 말이야.”

나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하기야 인간의 입장에서는 쉽게 이해하기 힘들 것이었다. 문화 자체가 전혀 다르니 말이다.

‘1회 차를 경험했다면 그리 이상하게 볼 일도 아닐 텐데.’

그때의 인간은 마물을 경배하고 거인의 지배를 받았었다. 지금의 견인족보다 훨씬 심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호영으로선 딱히 수인들의 문화가 이질적이라거나 혐오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티를 내지는 마라. 일단 쟤들도 우리의 동료니까.”

“근데 처음에는 노예로 받아들인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현리에 있는 수인들도 전부 노예라면서요.”

봉영이 살짝 찝찝하다는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아무래도 그녀는 수인들이 동료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원래는 그러려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굳이 노예를 만들 필요가 없겠더라고.”

수인들을 노예로 만들려고 했던 것은 그들을 통치하기가 힘에 겨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타고난 육체에 야수성까지 갖춘 수인들은 인간들과 비교했을 때 무수히 많은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차이점은 대개 통치자의 입장에서 해로운 것들이었다.

실제 수인들을 노예로 다룰 때 문제가 생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도망치는 것은 예사였고, 반란도 수시로 일으켰다. 그러니 통치자의 입장에서는 노예로 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노예제를 유지할 수는 없어. 아직 수인들을 어찌 다스릴지는 결정하지 않았지만 지금부터 노예제를 철폐할 준비를 해야 해.’

본래 호영은 노예제를 만들 생각이 없었다. 단지 대씨 일족의 기반이 너무 미약하였기에 노예제를 이용하였을 뿐이다.

그는 본래 노예제를 혐오하는 사람으로서 기회가 되면 언제든 노예제를 폐지할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노예제란 통치자의 입장에서나 국가의 입장에서나 폐단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이 어떻게 보면 노예제를 폐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야. 대씨 일족의 기반이 확고해진 반면 귀족이라 할 수 있는 일족들의 힘은 무척이나 약해졌으니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수인들을 노예로 만들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정복 전쟁에서 최소 수백의 수인들이 새로 합류하게 될 것인데, 그들 전부를 노예로 만들면 앞으로 노예제를 폐지하기가 더욱 요원해질 것이었다.

“뭐, 추장님의 생각이 그렇다면 저는 상관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견인 전사들을 쓰게 되면 제가 할 일이 없어지지 않나요?”

“아직 100퍼센트 믿는 것은 아니니까, 네가 어느 정도 감시나 견제를 해 줘야지. 게다가 수인들만 정복할 것은 아니라서.”

“참 욕심이 많으시네요. 현리의 인구만 해도 엄청난데 혼자서 정복 전쟁을 일으켜 수인이건 인간이건 다 잡아들이겠다니. 도대체 어디까지 세력을 키우려고 그러시는 거죠?”

“최소 한반도는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

“지나친 욕심 아닌가요? 아직 서울에서 벗어나지도 못했는데 한국도 아니고 한반도라니. 욕심이 많으면 끝이 안 좋다는 말을 들어 본 적 없나요?”

“내가 욕심을 부려야 부하들에게 많은 것을 줄 수 있지. 그리고 욕심이 많은 게 욕심이 없는 것보다 끝이 훨씬 좋을 거야.”

“……그런가요?”

호영의 뻔뻔한 대답에 봉영은 어리송한 얼굴을 하였다. 그의 말을 믿어야 할지, 아니면 비겁한 변명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긴가민가하였던 것이다.

‘뭐,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 나는 타인의 평가에 일희일비하는 사람이 아니고 내 욕심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도 않으니까.’

솔직히 ‘한반도’ 정도는 욕심의 축에도 끼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내심 한반도를 넘어 만주와 일본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까지 노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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