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하지만 임재황은 철구라는 인물이 이상하게 믿음이 안 갔다. 허세가 심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고항에게 들었던 초연이라는 유저와 너무도 비교됐기 때문이다.
‘과연 돈값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초연이라는 유저는 마치 전쟁 영화에서 나오는 특수 부대원을 보는 것 같다고 하던데……. 철구는 기껏해 봐야 동네에서 힘 좀 쓰는 일반인 같단 말이지.’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초연이라는 유저의 위용은 무시무시한 수준이었다. 숙련된 사냥꾼이었던 NPC 전사도, 뛰어난 지휘관이었던 고항이라는 유저도 초연의 손에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고항의 경우 어떻게 죽었는지 아직까지도 알지 못할 정도였다.
다른 전사들의 죽음도 비슷하였다. 기척도 없이 나타나서는 순식간에 목표한 전사를 제거하는 전장의 사신!
초연의 손에 죽어 나간 전사들의 숫자만 아홉 명이었다. 여기에 화살까지 날아오니 그들로선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서른 명의 전사는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패주하였다. 단 한 명, 아니 화살을 날리는 여자까지 총 두 명에게 그들은 패배한 것이었다.
그렇다 보니 임재황으로선 철구를 신뢰하기 어려웠다. 그가 보기에 철구는 일반인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후우, 그래도 일단 믿어 봐야겠지.’
임재황은 한숨을 내쉬며 철구에게 말했다.
“맞을 거다. 이 주변에 남아 있는 인간들은 그들뿐이니까.”
“크크큭, 그렇다면 숫자가 는 거네? 저번에는 겨우 두 명이었다는데. 열 명이 넘잖아. 이거, 우리가 불리한 거 아니야? 저기는 5배 늘었는데 우리는 겨우 2배 늘었잖아?”
“방심하지 마라. 혼자서 아홉 명을 죽였다. 여자는 세 명을 죽였고.”
“엥? 내가 언제 방심했다는 거지. 그리고 말이야, 나라고 그 정도도 못 죽일 것 같아?”
“…….”
“표정을 보니 못 믿는 것 같은데, 지금 한번 시험해 봐. 내가 죽일 수 있나, 죽일 수 없나. 왜, 쫄려서 못 하겠냐?”
적을 바로 앞에 두고 아군을 도발하는 철구의 모습에 임재황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완전 미친개로군.’
다른 이들의 표정도 그리 좋지 못하였다. 철구는 그들에게 있어 굴러온 돌이었고 최진수가 심어 놓은 감시인 같은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철구의 자신 있는 목소리를 들으니 전투에 자신감이 생기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어쨌든 겉으로 보면 역전의 장수처럼 보이는 철구였으니 말이다.
“초연이라고 했지? 그놈은 내가 잡아 두겠어.”
“너 혼자 잡아 두겠다고? 그건 곤란해. 웬만하면 사전에 정해 둔 대로 움직이지?”
“너만 돋보이려고? 나도 그건 곤란해. 재벌 도련님의 눈에 들고 싶은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거든.”
“공 때문이 아니야.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다.”
“웃기는 소리! 어차피 초연만 잡으면 이기는 전쟁이잖아? 그러니 나에게 맡기라고. 내 체근민 수치가 100이 넘어. 유저들 중에 나보다 능력치 좋은 사람 있어? 초연? 그놈도 나보다는 낮을걸.”
철구의 황당한 주장에 임재황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명령을 내려 철구의 행동을 강제하고 싶었다.
쉰 명을 책임지는 사람은 그였고 어찌 되었건 철구의 상급자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가 지휘관인 것은 맞지만 주어진 권한이 턱없이 제한적이라는 사실이었다.
노예 징집병과 다를 바 없는 NPC들에겐 절대적이지만 같은 유저들에게는 제한적인 명령권만 가지고 있는 것.
그렇기에 임재황은 철구의 황당한 주장을 그대로 따라 줄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철구에 대해서는 일말의 기대도 하지 않았기에 버리는 패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았다.
“네 뜻대로 해. 대신, 우리를 방해하지는 마라.”
“어차피 내가 초연을 죽이면 끝나는 전투인데 방해는 무슨 방해. 너나 방해하지 마세요.”
마지막까지 비아냥거리듯 말하는 철구를 뒤로 한 임재황은 어느새 눈앞으로 다가온 적군을 바라보았다.
정말 열 명 정도밖에 안 되는 인원수였다.
도대체 무슨 자신감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전사들의 표정이 결연하거나 용기백배한 것도 아니다.
하나같이 죽을상을 한 것이 마치 억지로 끌려온 모양새였다. 오직 두 명. 선두에 서 있는 두 명만이 당당한 기색이었다.
‘활 쏘는 여자는 어디 갔지? 도망쳤나?’
주요 인물 중 한 명이 없다는 사실이 왠지 모르게 찝찝하였다. 변수로 작용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야가 뻥 뚫려 있는 광활한 평야다. 일부러 선택한 전장. 이런 곳에서 기책을 사용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임재황은 애써 평정심을 유지한 채 전사들을 향해 외쳤다.
“모두 돌격해라!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는 적들을 제거해라!”
그가 외치자 쉰 명의 전사들은 함성을 내지르며 돌격하였다.
‘이건 지고 싶어도 질 수 없는 전쟁이다.’
그것은 아마 이 자리에 선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생각일 것이었다. 실제로 적군은 전사들의 돌격에 당황한 채 어쩔 줄 몰라 하였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더니 선두에 서 있던 사내들과 10미터 이상 벌어져 버렸다. 자신들의 우두머리를 버리고 도망치는 모양새였다.
“크하하하! 그야말로 오합지졸들이구나!”
그 모습을 보고 더욱 자신감이 생겼는지 철구가 가장 앞에 선 채 그렇게 외쳤다. 하는 행동만 보면 역사 속에 나오는 명장들을 보는 것 같았다.
“자, 내가 앞장서서 적장과 맞서 싸우겠다! 너희들은 그저 잡졸들만 맡으면…… 크헉!”
하지만 그때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유도 선수 출신의 실력파이자 최진수가 큰돈을 주고 영입한 철구가 허무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었다.
“죽은 거야? 설마?”
임재황이 믿기지 않는 눈으로 철구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창 하나가 철구의 가슴팍에 박혀 있었다.
투창 공격에 반응도 못 하고 즉사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였다. 철구를 투창으로 죽인 의문의 사내가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전사들 사이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지난 전쟁에서 초연이 보여 주었던 움직임보다 훨씬 빨랐는데 그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였다.
전사들은 자신의 곁을 스쳐 가는 의문의 사내를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서걱, 서걱!
당연하겠지만 사내는 아무 이유 없이 전사들 사이를 누비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손은 발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눈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
전사들은 영문도 모른 채 죽음을 맞이하였다.
뒤이어 초연이라는 사내가 움직였다.
초연 역시 뼈창을 든 사내처럼 비정상적인 움직임을 보여 주었다. 그의 근처에 있던 전사들 역시 일체의 저항도 하지 못하고 즉사하였다.
“괴, 괴물들이야!”
“이걸 어떻게 이겨!”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는 비현실적인 광경에 잠시 굳어 있던 전사들은 이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센추리를 게임이라 생각하던 유저들도 마찬가지였다. 일종의 독전대로서 전사들의 퇴주를 막아야 할 그들은 오히려 가장 먼저 달아났다.
쉰 명에 달하는 군대는 그렇게 두 명에 의해 무너졌다.
‘스킬의 힘으로 이런 걸 할 수 있다고? 어이가 없군. 이게 내가 알던 게임이 맞나?’
임재황으로서는 황당하기만 하였다. 나름 자신했던, 아니 거의 확신했던 전투였다.
지형적인 이점도 괜찮았고 싸우는 시간대도 괜찮았다.
병력의 우위나 전술의 우위는 말할 것도 없었다.
적군은 통솔도 되지 않는 오합지졸에 열 명 밖에 되지 않았고, 아군은 잘 훈련되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사기를 갖춘 군대였다. 숫자도 훨씬 많았고 말이다.
만약 그가 하던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었다면 ‘핵’을 쓰지 않는 이상, 지고 싶어도 질 수 없는 전투였다.
아니, 굳이 게임과 비교할 필요 없이 현실에서 이같은 전투가 일어났다면 99퍼센트, 그들이 이겨야 했다.
하지만 이 세상은 비합리적이고 비현실적인 세계였다.
두 명의 절대적인 무력. ‘핵’보다 월등한 그 무력 앞에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 * *
“패배했다고? 쉰 명을 데리고 또다시 두 명에게 패배해? 그게 말이 되는 이야기야!”
최진수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패배였다. 아무리 그래도 두 명에게 패배하였다니.
차라리 귀신같은 책략에 당했다는 것이 현실성 있게 느껴졌다. 아니면 프로 게이머들이 단체로 배신을 때렸다거나.
그 정도로 최진수는 자신에게 전해진 패전 소식을 믿기 어려워하였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그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측근 마재광이 로그아웃과 로그인을 반복하며 전황에 대해 전해 준 결과, 철구와 임재황 그리고 대부분의 유저들이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패전을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게 되자 최진수에게 남은 것은 분노였다. 자신의 야망이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는 절망감!
최진수는 바로 그 절망감을 분노로 표출하였다.
“멍청한 것들! 내가 이런 것을 믿고 대업을 이루려 했다니!”
“도련님, 이러고 있으실 때가 아닙니다.”
실성한 사람처럼 고함을 지르며 분노를 표출하는 최진수를 보고 그의 비서라 할 수 있는 마재광이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뭐야? 너는 또 왜!”
“마지막에 죽은 유저의 말에 따르면 적군의 위치는 이곳에서 고작 2킬로미터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고 합니다.”
“뭐? 2킬로미터! 그럼 바로 근처잖아!”
“그러니 신속하게 부족을 떠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부족민들은?”
“아무래도 버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어차피 끌고 가 봤자 중간에 다 죽을 것입니다.”
“젠장 할! 전사들을 잃은 것도 모자라서 부족까지 포기해야 된다고? 이 개 같은 임재황! 병신 같은 철구! 그놈들은 앞으로 계속 처형시킬 거다. 3회 차에서도 4회 차에서도! 센추리를 절대 못하게 만들어 주겠어!”
자신의 수하라 할 수 있는 자들에게 온갖 저주의 말을 퍼부은 최진수는 마재광의 권고대로 다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전사들을 잃고 부족도 잃게 되겠지만 그래도 목숨까지는 잃고 싶지 않은 최진수였다.
부족이야 다시 일으켜 세우면 되는 일.
그러나 목숨은 하나였다.
‘지력 30에 마법까지 배우기 시작한 아바타를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
전투에 직접 참여한 적은 없었지만 그 역시 스텟의 중요성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중에 최진수는 지력 스텟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지배자로서 머리가 뛰어난 것만큼 이득을 볼 만한 스텟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 그의 아바타는 지력 수치가 30이 넘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상위권이라고 볼 수 있는 수치였다.
여기에 최진수는 사용할 줄 모르지만 아바타는 어느 정도 마법을 사용할 줄 알았다. 이제 백제 부족에 유일하게 남은 마법사인 것이다. 당연히 아바타의 가치는 더욱 상승할 수밖에 없었다.
최진수로선 구차하더라도 도망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젠장 할 것들! 감히 나에게 이런 수치를 주다니! 운만 좋은 게임 폐인들 주제에! 이번에는 이렇게 도망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아버지에게 무릎을 꿇어서라도 돈을 얻어 와 네놈들을 복수해 주마!’
이를 악물며 최진수는 복수를 다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