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90화 (90/345)

# 90

“제 의견에 동의해 주시는 겁니까?”

목책 외각을 둘러보며 부족을 탐색하던 도중,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인 남자와 성인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런데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현리 부족에 투항한다니? 타이밍이 뭐 이래.’

흥미로운 눈으로 이야기를 엿듣기 시작하자 남녀 중 여자가 아주 의미심장한 말을 꺼내 들었다.

“대신 우리는 따로 독립하겠어요.”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리 봉씨 일족은 현리 부족에 소속될 생각이 없어요. 현리로 가려거든 추장을 따르는 부족민만 데리고 떠나세요.”

봉씨 일족!

호영은 그 한마디를 듣고 남녀의 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사실 간단한 문제였다. 여자의 정체가 봉씨 일족의 일원이라는 것만 알면 쉽게 유추할 수 있는 문제니까.

‘저 남자가 준기고, 저 여자는 준기와 함께 전쟁을 하였다는 그 여전사겠네.’

그리고 어쩌면 회귀 전 여 왕국을 건설한 여왕일지도 모른다. 호영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자신이 나서야 할 시점임을 감각적으로 느꼈다.

“나는 봉씨 일족의 독립을 허락할 생각이 없다.”

준기와 이름 모를 여인에게 있어선 느닷없는 출현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두 명 모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준기는 의외로 상황 판단이 빠른지 호영을 곧장 알아보았다.

“혀, 형님이십니까?”

“바로 알아보는군. 처음 보는 얼굴일 텐데 말이야.”

호영조차 준기를 뒤늦게 알아보았는데 말이다.

“이렇게 등장할 사람은 형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하.”

그 말에 희미한 웃음을 지은 호영은 고개를 돌려 봉씨 성을 가진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경계심으로 가득한 눈으로 호영을 노려보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죠?”

“지금까지 우리 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나?”

“엿들은 건가요? 그보다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당신이 현리 부족의 추장인가 보죠.”

“그래, 내가 현리의 추장 대왕이다.”

“근데 현리의 추장이면 추장인 거지 저에게 왜 반말을 하시는 거죠? 처음 본 사이잖아요. 그리고 아까 하셨던 말은 또 뭐죠?”

사나운 눈빛에 까칠한 말투. 아무리 눈치 없는 사람이라도 그녀가 호영을 불쾌하게 여기는 것은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호영은 거침없는 행동을 이어 나갔다. 마치 그녀의 표정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는 태도로 말이다.

“말 그대로다. 나는 봉씨 일족의 독립을 허락할 생각이 없어.”

“어이가 없네요. 당신이 뭔데 우리 일족에 관여한다는 거죠?”

“현리의 추장으로서 봉씨 일족에 관여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게 왜 당연하다는 거죠? 설마 봉씨 일족이 한때 현리 부족에 있었다는 이유를 들먹이려는 건 아니겠죠?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면 황당하네요. 저는 현리 부족에 소속될 마음이 없습니다. 물론 봉씨 일족도 마찬가지고요.”

“너야말로 황당하군. 네가 감히 독립하고 싶다 해서 내가 허락할 것 같으냐?”

“가, 감히라고요? 미쳤군요, 정말.”

그녀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다가 싸늘한 눈으로 활을 들어 올렸다. 화살 한 대를 뽑아 활시위를 힘껏 당긴 그녀는 사납게 외쳤다.

“돌아가세요! 나는 당신의 허락 따위는 필요치 않으니까!”

살기까지 느껴지는 그녀의 눈빛은 지금 당장 호영에게 화살을 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였다.

그런 눈빛을 받으며 호영은 고개를 돌려 준기에게 말했다.

“너는 가만히 있어. 아무래도 이 여자에게는 교육이라는 것이 필요한 것 같으니까.”

“……예.”

준기는 복잡한 얼굴을 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호영이 말하는 ‘교육’의 의미를 알고 있는 것이었다.

하기야 호영의 제자로서 가장 많은 ‘교육’을 당해 본 준기였기에 의미를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앞으로 있을 ‘폭력’을 걱정하였다.

“지금 한 말, 무슨 뜻으로 한 거죠? 교육이라고요?”

그녀는 발끈한 기색이었다. 준기와 호영의 대화를 그녀라고 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호영은 그녀의 말에 대답할 필요도 없다는 듯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당연히 그녀 역시 호영이 다가오는 만큼 뒤로 물러났다. 다만 입으로는 ‘더 이상 다가오면 쏠 거야!’라고 외치고 있었다.

“쏠 테면 쏴.”

“이익! 그러면 내가 못 쏠 줄 알아?”

마침내 그녀는 활시위를 놓았다.

휘이익!

호영에게로 날아오는 그녀의 화살! 10미터도 안 되는 거리였기에 아무리 조잡한 목궁이어도 살상력은 충분하였다.

더군다나 화살이 날아가는 방향은 호영의 머리였다. 부상을 입는 수준을 넘어 호영의 목숨을 앗아 갈 수 있는 공격이었다.

덥석.

하지만 호영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목궁이 아닌, 복합궁으로 쏜다고 해도 그는 반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목궁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호영에게 날아오던 화살은 파리를 잡는 것 같은 무덤덤한 호영의 손짓에 싱겁게 무위로 돌아갔다.

“어, 어떻게?”

“센추리는 약육강식의 세계다. 네가 튜토리얼을 깨고 이 자리에 섰다면 약육강식이 무엇인지 정도는 알고 있을 터.”

다시 한 번 화살을 쏜 그녀지만 이번에도 어김없이 호영의 손짓에 무위로 돌아갔다. 그녀의 공격이 호영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게 다시 한 번 증명된 것이다.

“오, 오지 마!”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활 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의 공격 수단은 오직 활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휙휙!

엄청난 연사 속도. 평범한 사람이라면 뒤늦게 반응하는 것이 고작일 공격들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확실히 활솜씨만 보면 그녀의 자부심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호영 역시 내심으로는 감탄했을 정도니까.

하지만 그뿐이었다. 지금 시대에서 호영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물며 조잡한 목궁으로 쏘아 대는 화살쯤이야.

결국 호영은 그녀의 마지막 화살까지 무위로 돌리고는 그녀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어느덧 둘의 거리는 손을 뻗으면 잡힐 정도로 가까워진 상태였다.

“힘이 없다면 강자의 뜻에 거스르려 들지 마라. 내 뜻을 거스르지 말라는 뜻이다. 그게 마음에 안 들면 초보자의 섬으로 돌아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던 호영은 돌연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순식간에 그녀의 활을 빼앗은 호영은 그녀의 멱살을 잡았다.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호영의 행사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보았다.

목소리를 높이는 일도, 반격하려는 움직임도 없었다.

마치 약육강식에 길들여진 초식 동물처럼 가녀린 얼굴로 몸을 떨 뿐이었다.

“강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만, 교육의 가치도 못 느끼겠군.”

“…….”

호영은 두려움에 젖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는 혀를 차며 멱살을 풀어 주었다. 겁에 질린 그녀의 모습을 보니 주먹을 쓸 필요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준기, 아니 여기서는 초연이라고 했지?

“예, 초연입니다.”

“연합이라는 것들이 언제쯤 쳐들어올 것 같아?”

“오늘 밤이나 내일 아침쯤에 침공이 시작될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늦는데?”

“평지로 우회해서 진격하고 있기 때문에 늦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네가 많이 두려웠나 보네.”

준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형님이 올 줄 알았다면 아마 그들도 더 빨리 움직였을 겁니다. 진짜 두려워해야 할 존재는 제가 아니라 형님이시니까요.”

“오버하기는. 아무튼 그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밤에는 공격하지 않을 테니 내일 아침에 쳐들어온다고 생각하면 되겠어.”

야생의 밤은 무시무시하였다. 특히 야행성 마물들이 적지 않기 때문에 친위대라고 해도 밤에 움직이는 것은 조심해야 했다. 물론 호영의 경우는 예외라고 볼 수 있겠지만 말이다.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일 아침까지 전사들을 준비시키도록. 설마 전사가 아예 없지는 않겠지?”

“전사들을요? 물론 없지는 않습니다. 마법사들의 갑작스러운 습격에 많이 줄었지만 말이죠.”

“최대한 동원해. 전사들이 있어야 그 연합이라는 것들을 역습할 수 있으니까.”

“……형님,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저희 부족의 전사라고 해 봤자 열 명도 안 되는데.”

“충분해. 어차피 전사들에게 바라는 것은 포로 관리나 물자 수송 같은 것밖에 없으니까. 전투력으로서의 기대는 전혀 없어.”

“그 말씀은 연합의 전사들과 혼자서 맞서겠다는 것입니까?”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닐 텐데? 1회 차에는 이보다 더한 일도 많았는데 말이야. 그리고 너도 지난 전쟁에서 거의 혼자 싸웠다며?”

“그때야 봉영 씨도 있었고, 숫자도 이번보다 훨씬 적었습니다. 산에서 게릴라전을 한 것도 있었고요. 하지만 이번에는…….”

“나에게는 똑같아. 숫자가 조금 더 많거나 장비가 조금 더 좋았다면 모를까, 연합 정도의 전력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니 너는 아무 걱정 하지 말고 전사들과 함께 이삭 주울 준비나 해.”

당당함을 넘어 오만하게까지 비쳐지는 호영의 말.

그의 말대로라면 전쟁은 벌써 승리한 것과 다름없었고 영등포구 연합에게 역습을 가할 준비만 하면 될 것 같았다. 실로 엄청난 자신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호영의 무력을 생각하면 결코 오만한 것이 아니었다. 마력은 비록 100이 채 안 되었지만, 주력 스킬의 랭크가 무려 A급이었다. 현 시대에 A급이라면 과히 신화적인 무력이라고 볼 수 있을 터.

이같은 무력을 가졌으니 자신감을 보여도 이상할 게 없었다.

“전사들에게 지시를 내려놓겠습니다.”

준기도 결국 납득하였다. 그 역시 호영의 수준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니 납득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둘은 전쟁 준비를 서둘렀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봉영은 그런 둘의 모습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 * *

연합에서 주로 전략을 담당하는 임재황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마침내 그날이 왔다.

게릴라전으로 무려 서른 명의 전사를 패퇴시킨 초연과의 승부!

최진수의 협박도 협박이지만 프로 게이머로서 절대 질 수 없는 승부였다.

“이번에는 이겨야 해, 무조건.”

평범한 게임이라면 한번 져도 다음 기회가 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센추리는 패배자에게 관대한 게임이 아니었다.

지는 순간 모든 것을 잃고 마리라.

부족도, 명성도 그리고 하나뿐인 목숨도.

임재황으로선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음? 설마 평지에서 대놓고 싸우겠다는 건가? 엄청난 자신감이네.’

주먹을 불끈 쥐며 결연한 다짐을 하던 도중 전방에서 일단의 무리가 등장하였다. 고작해야 열 명 정도로 보이는 작은 무리였다.

당연하겠지만 이곳에서 나타날 인간 군대는 하나뿐이었다.

초연! 바로 그의 군대가 나타난 것이었다.

“저놈들이 너희들을 패퇴시킨 놈들이겠지?”

우락부락한 체형을 가진 거한의 사내. 철구라는 이름을 가진 사내가 입가에 조소를 지은 채 임재황에게 물었다.

임재황은 그런 철구의 모습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현실에서 유도 선수였던 철구는 최진수가 어렵게 섭외한 유저였다. 오직 초연을 상대하기 위해 비싼 돈을 주고 영입한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