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호영의 무미건조한 대답에 원재가 경악하듯 외쳤다.
현리의 지배자이자 가장 존귀한 몸이 바로 호영이었다.
위험을 무릅쓸 일도 없었고 무릅써서도 안 되었다. 존귀한 몸이기 때문이다.
당연하겠지만 다른 부족을 상대하기 위해 혼자 움직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위험 같은 것은 걱정할 필요 없어. 친위대 전체가 덤벼도 나를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너도 알고 있잖아?”
그는 괜히 자만을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효율을 생각하였을 뿐이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을 굳이 친위대까지 동원할 필요가 어디에 있겠는가.
자칫하다가 친위대의 피해가 발생하기라도 한다면? 손해는 그야말로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되고 말 것이었다.
애초에 1회 차의 거인도 상대하였던 호영이기에 2회 차에서 그를 어찌할 수 있는 존재란 거의 없었다.
“물론 저 역시 추장님을 위협할 존재가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추장님. 유저들도 그렇고 추장님이 처리해야 할 문제가 수두룩하지 않습니까?”
원재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무려 서른에 가까운 유저가 호영의 휘하에 들어오기를 희망하는 상태였다. 호영이 지금 수하로 두고 있는 유저 숫자만큼이나 새로운 유저가 들어오기 직전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현기가 있다고는 하나 호영의 업무량도 결코 작지만은 않았다. 절대 혼자서 어디로 떠나 있을 상황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고작해야 며칠이야. 내가 며칠 없다고 무슨 일이 생기겠어? 네가 있고, 현기가 있는데?”
“하지만…….”
“사실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다른 지역을 정찰할 생각은 있었어. 내가 정찰하는 것만큼 확실한 것이 없으니까. 그러니 걱정 말고 날 믿어라, 영등포구 연합을 견제하고 준기까지 구해 올 테니. 덤으로 양천구와 영등포구 지역까지 정찰하고 말이야.”
“후우,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대신 조심해서 행동하십시오. 추장님은 아직 1회 차의 무력을 회복하시지 못하셨지 않습니까?”
원재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보는 호영의 저돌적인 추진력에 당황하긴 하였지만 그가 생각하기에도 호영의 행동이 틀리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애초에 호영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그로선 이 이상 이견을 내세울 수도 없는 입장이었고 말이다.
그렇게 호영은 부족의 정복 전쟁이 시작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혼자 외부로 진출하기로 결정하였다.
* * *
영등포구 연합의 서진 소식은 당연히 준기에게도 전해졌다. 준기는 곧바로 아바타의 아내이자 부족의 이인자인 봉영을 찾았다.
“봉영 씨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보다는 추장님이 생각하셔야 할 문제 아닌가요?”
“……하하하! 그, 그렇긴 하죠.”
차갑게까지 느껴지는 봉영의 대답에 준기는 어색하게 웃었다. 나름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럴 때는 또 어색해진다.
준기는 잠시 크게 웃다가 낮은 목소리로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싸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싸울 필요가 없다고요? 설마 투항하실 생각인가요?”
“예, 굳이 피해를 자처할 이유는 없습니다.”
“실망이군요, 서른 명도 아무 피해 없이 무찔렀으면서 고작 조금 늘어났다고 항복하겠다니.”
“물론 저들에게 투항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제가 항복하려는 대상은 현리 부족입니다.”
“현리라고요? 또 그들인가요?”
봉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뜬금없이 튀어나온 현리 부족을 향해 의구심을 보이는 것이었다. 이미 준기는 현리 부족에게 항복하려 했던 전적이 있었기에 더욱 의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시다시피 현리는 무척이나 강한 부족입니다. 거기에 내년이면 정복 전쟁을 시작할 테죠. 우리가 이번 전쟁에 승리해도 언젠가 현리의 군대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어차피 항복하게 될 거, 기회가 생긴 지금 현리의 휘하로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호영과의 인연을 차치하더라도 현리에 합류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준기의 부족 ‘목동’은 현리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두 부족 사이에 수인족과 마물들이 자리 잡고 있어 이동하는 시간이 제법 소요되겠지만 그래 봤자 하루 이틀이었다. 그리고 하루 이틀 거리의 부족들은 내년이면 모두 현리 부족에게 합병될 것이었다. 현리의 공세를 막아 낼 리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목동 부족도 똑같은 결말을 맞이하게 될 터.
물론 투항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내가 있어야 될 곳은 목동이 아닌 현리다.’
얼떨결에 ‘초연’이라는 아바타를 갖게 되면서 반쯤 독립하게 된 준기지만 그는 본래 현리 사람이었다.
현리에는 그가 형님으로 모시는 호영이 있었고, 친구라 할 수 있는 원재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몰락하였지만 한때 그의 일족이었던 상씨 일족도 현리에 근거하였었다.
준기에게 있어 현리란 고향과도 같다는 말이었다.
그렇다 보니 추장이 된 지금도 굳이 독립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애초에 추장이라는 자리에 부담감을 가졌던 준기였고 호영을 배신해 봤자 성공할 가능성도 없었다.
그렇기에 호영이 지원해 준다고 전화했을 때 곧바로 응하였었다. 즉, 이미 그는 현리에 투항하는 걸로 결정지은 것이었다.
“현리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가 보군요. 그렇다면 이것만 물어보죠. 저들에게 항복하나, 현리에게 항복하나 우리에게 무슨 차이가 있나요?”
“현리는 자발적으로 투항한 이들에겐 무척이나 관대합니다.”
“관대하다고요? 하지만 그것만이라면 이해가 안 가네요.”
봉영은 늘어지는 목소리를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준기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음을 던졌다.
“어떤 점이 이해가 안 되십니까? 혹시 싸우지 않고 항복하는 게 마음에 안 드십니까? 하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현리가 가진 군사력은 우리 부족의 인구보다 몇 배는 많습니다. 또한 병사 한 명 한 명이 정예하죠. 언젠가는 현리와 마주하게 될 것인데, 패배가 명백한 싸움을 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 것보다, 저는 이게 이해가 안 가네요. 추장님 정도의 남자가 왜 굳이 누군가의 아래에 있으려는 거죠?”
“쿨럭!”
순간 준기는 헛기침을 하였다. 봉영이 자신을 이렇게나 높이 평가하고 있을 줄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누군가의 밑으로 들어가려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니. 인구가 고작 예순 명 정도밖에 안 되는 부족의 추장을 너무 높이 평가하는 것 같았다.
헛기침을 멈춘 준기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현리의 추장을 보지 못하셔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저의 무력이나 다른 능력들은 현리의 추장과 비교했을 때 보잘것없는 수준입니다.”
“마치 현리의 추장을 알고 있는 것 같네요?”
“예, 아주 잘 압니다. 1회 차 때 함께했었고 현실에서도 알고 지내는 사이입니다.”
“……그런가요?”
준기의 대답에 봉영은 얼굴을 굳혔다. 준기에게 ‘실망’했다는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알겠어요. 현리 부족에게 투항하세요.”
“제 의견에 동의해 주시는 겁니까?”
“대신 우리는 따로 독립하겠어요.”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정색하는 얼굴로 차갑게 대답하는 봉영을 보며 준기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어졌다. 봉영의 말은 준기로선 상상도 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독립이라니? 목동 같이 조그만 부족에서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둘로 분열한단 말인가. 뭉쳐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말이다.
물론 부족에서 그녀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생각하면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남녀의 성비를 보는 것처럼 그녀를 지지하는 부족민도 절반에 가까웠으니까.
하지만 절반이라고 해 봤자 서른 명 정도밖에 안 되는 인원수였다. 더군다나 그들 대부분이 여인이었으니 독립한다고 득 될 것이 하나도 없었다.
“저희 봉씨 일족은 현리 부족에 소속될 생각이 없어요. 현리로 가려거든 추장을 따르는 부족민만 데리고 떠나세요.”
“…….”
말문이 막힌 준기는 멍청한 얼굴로 봉영의 얼굴을 그저 바라만 보았다. 그래도 같이 전쟁까지 치르며 동료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같은 배신이라니…….
그때였다.
“나는 봉씨 일족의 독립을 허락할 생각이 없다.”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 그러나 왠지 모르게 누군가가 떠오르는 목소리였다.
“혀, 형님이십니까?”
“바로 알아보는군. 처음 보는 얼굴일 텐데 말이야.”
준기가 형님이라고 부르는 유일한 사람. 바로 호영의 등장이었다.
* * *
‘너무 강한 모습만 보여 주었기 때문인가. 추장이 혼자 출장을 다녀오겠다는데 완강하게 반대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네.’
호영은 속으로 피식 웃음을 지었다.
질척거리며 반대하는 사람이 한두 명은 있을 줄 알았는데, 유저들이나 간부들이나 태연한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물론 현기 같은 경우는 원재와 비슷한 이유를 거론하며 반대하기도 하였었다. 하지만 내년을 대비해 안전한 길을 확보하겠다는 설명을 덧붙이자 되려 호영의 뜻에 동조하였다. 그는 웃는 얼굴로 ‘이왕이면 강가 근처의 지도를 확보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며 호영을 떠나보냈다.
봉성이나 장훈 같은 경우는 처음부터 일관된 반응이었다. 그들은 호영의 무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였고 걱정하는 기색을 조금도 내비치지 않았다.
친위대 같은 경우는 오히려 호영이 중간에 마주하게 될 마물이나 수인들을 불쌍하게 여겼다.
그렇게 호영은 ‘존귀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방해 없이 혼자서 부족을 나섰다.
“저기가 준기의 부족인가? 부디 맞았으면 좋겠군. 아니라면 최소한 인간의 부족이어라. 수인들은 이제 지긋지긋하다.”
현리를 떠난 뒤 호영은 거의 달리는 속도로 동남 방향을 향해 이동하였다. 마치 열대우림처럼 가는 곳마다 수풀이 무성하였고 언제 야생 동물이나 마물이 등장할지 몰랐지만 호영의 이동속도는 단 한 번도 늦춰지지 않았다.
아마 2회 차에서 호영처럼 대책 없이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세계 전체를 뒤져 봐도 거의 없을 것이었다. 지금의 센추리 세상은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영은 거인이라는 최강의 적도 이겨 낸 사람이었다.
물론 1회 차 때에 비해 터무니없이 약한 아바타를 가지고 있었고 마력 수치도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낮았지만 야생 동물이나 마물을 걱정해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장거리 이동이라면 야숙 문제 때문에 조금 곤란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건 호영은 5시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엄청난 거리를 이동하였다. 현실에서라면 열 정거장 정도밖에 안 되는 거리였지만 온갖 마물이 득실거리는 센추리 세상에선 그조차도 엄청난 거리라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호영은 5시간 동안 무려 세 개의 부족을 발견하였다. 이번에 발견한 것이 세 번째로, 두 번째까지는 모두 수인들의 부락이었다.
호영으로선 야숙하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기에 눈앞의 부족이 준기의 부족이길 바랐다.
“알겠어요. 현리 부족에게 투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