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날카롭게 쏘아붙이며 말하자 임재황은 입술을 질끈 깨문 채 고개를 깊이 숙였다. 하지만 그는 시작에 불과하였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최진수의 꼬장은 간부 전체를 향한 비난으로 이어졌다.
“네놈들도 마찬가지야. 센추리가 게임이라서 게임 전문가들을 데려왔더니만 사내 한 놈과 계집 한 년을 어쩌지 못해? 상대가 무슨 전설의 프로 게이머라도 돼?”
임재황이 그랬던 것처럼 연합의 간부이자 전직 프로 게이머인 그들은 죄라도 지은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실제로 죄를 지은 사람은 없었지만 그들이 최진수를 상대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만은 공격하지 않기를 말없이 기도하는 방법밖엔.
사실 그들 대부분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준은 결코 아니었다. 누군가는 프로 게이머를 단순히 게임 폐인이라 평가할 수 있겠지만 인지도로 보나 연봉으로 보나 사회적 지위가 낮다고 볼 수 없는 직군이었다.
만약 이곳이 현실이었다면 누군가는 분명 불만을 토로했을 것이다. 위약금을 줘서라도 최진수와의 계약을 파기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을 터.
하지만 이곳은 센추리 세계였다. 워낙에 현실감이 뛰어난 게임이다 보니 센추리를 하는 유저들은 저도 모르게 필요 이상으로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시간 비율이 무려 일 대 사다. 현실의 하루가 센추리의 나흘이란 것이다.
그렇다 보니 프로 게이머들의 가치관은 조금씩 시대를 역행하고 있었다. 최진수의 막 돼먹은 행동에 아무도 제동을 걸지 않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마치 군대에 가면 사회에선 말도 안 되는 행동들이 당연시 여겨지는 것처럼, 이들 역시 비슷하게 변해 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 내가 잘못했지. 내가 바보 같았어. 이렇게 리얼리티가 뛰어난 게임에 프로 게이머들을 데리고 왔다니. 고졸들이 아니라 명문대 나온 엘리트들을 데려왔어야 했는데. 그렇지?”
“…….”
“모두 똑바로 들어! 이번이 마지막이야. 만약 이번에도 그놈에게 당한다면…… 네놈들 중 한 명은 무조건 죽어.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처형시킬 거야. 알아듣겠어?”
최진수는 무서운 눈을 한 채 으름장을 놓았다. 그것은 협박이었다. 무려 목숨을 담보로 한 협박. 그 살벌한 협박에 프로 게이머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공갈에 불과하다?
절대 그럴 리 없었다. 그들이 지금껏 보았던 최진수라는 인물의 성정은 한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하는 쪽이었다.
공개적으로 으름장을 놓았다면 무조건 한 명은 죽는다고 봐야 했다. 당연하겠지만 게임이라 해서 죽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죽음 그 자체가 두렵기도 하였지만 그들은 자신의 아바타를 분신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 누구도 자신의 분신이 죽는 것을 원치 않았다.
프로 게이머들은 하나같이 결연한 얼굴로 ‘연놈’을 이겨 내겠다고 다짐하였다.
#단독 행동
어느덧 1분기의 끝이 다가왔다. 그리고 1분기가 끝나 간다는 것은 센추리에서 1년이 지나간다는 사실을 의미하였다.
“센추리에서는 지금쯤 한창 눈이 내리고 있겠지?”
“아마 그러겠죠? 거기는 한겨울이니까.”
“시간이 참 빨라.”
“그러게요. 정복 전쟁을 시작하기까지 엄청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벌써 다음 달이라니. 시간을 4배나 쓰는데도 오히려 4배 빨리 가는 것 같습니다.”
원재가 웃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호영은 진심으로 시간이 4배 속도로 지나가는 기분이었다.
회귀한 지도 벌써 2년.
하지만 체감상으로는 반년도 안 지난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빠르게만 느껴졌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단 하루조차 의미 없이 보낸 날이 없다는 거다.’
자칫 게을러지거나 나태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회귀라는 말도 안 되는 어드밴티지를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호영은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았다. 조금은 여유를 부려도 될 법한 상황에서도 언제나 최선을 다하였다.
그렇기에 쏜살같이 지나간 시간 속에서도 그는 안심할 수 있었다.
“요즘 군사와는 어때? 사이 괜찮아?”
잠시 아련한 표정으로 지나간 시간들을 회상하던 호영이 갑자기 민감한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알겠는데,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
“예전에야 쓸데없이 저를 견제하는 것 같고 업무도 은근히 방해하여 조금 귀찮았지만 군사가 많이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아주 많이 달라졌지.”
“그러니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견제도 하지 않고 자신이 하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어서 사이가 나빠질 일도 없거든요.”
“다행이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요즘 친해진 것 같기도 합니다. 서로가 업무량이 워낙 많기 때문인지 동질감이라고 해야 되나? 그런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설마 나를 뒷담 하는 것은 아니겠지?”
“……하하하, 글쎄요.”
호영이 농담 삼아 그렇게 물으니 원재가 어색하게 웃었다. 농담이었는데 아무래도 진짜 그런 것 같았다.
‘뭐,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인가?’
잠시 눈을 찡긋거렸던 호영은 이내 피식 웃음을 지었다.
호영은 전형적인, 일 많이 시키는 주제에 칭찬에는 인색한 상사였다. 원재나 현기가 무척이나 잘해 주고 있음에도 칭찬 한 번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을 정도.
칭찬은커녕 언제나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는 하였다.
호영의 속마음이야 필요 이상으로 신임하는 모습을 보이면 나태해지거나 수하들 간의 분란이 생길 것을 우려했던 것이지만 어찌 됐건 지나치게 인색한 모습을 보인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니 자신을 뒤에서 욕하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뭐, 안 보이는 곳에선 나라님도 욕한다는데, 군사라면 나를 욕할 자격이 충분하지.”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마치 군사의 잘못을 고자질 한 것처럼 되지 않습니까?”
“아니었어? 난 또 군사에게 아직도 감정이 남아 있는 줄 알았지.”
“절대 아닙니다.”
호영의 너스레에 원재는 손사래를 쳤다. 평소에 무표정하기만 하던 얼굴이 붉게 물들어진 것이 당황하긴 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원재는 본래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서는 호영에게 물음을 던졌다.
“팀장님, 그런데 그 영등포구 연합에 대해 들으신 거 있으십니까?”
“갑자기 걔네는 왜?”
준기에게서 들어 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준기가 아니더라도 관심을 갖고 지켜봤을 세력이었다. 왜냐하면 회귀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세력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호영이 2회 차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다지만 서울 중심부에 ‘연합’이라 불릴 정도의 세력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리 없었다.
영등포구 연합이라는 곳은 분명 나비효과에 의해 탄생한 세력일 터.
회귀라는 경험이 있는 호영으로선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놈들이 서울 전체를 정복하겠다고 요란을 피우지 않았습니까? 그러다가 준기에게 개박살 났고요.”
“만약 준기한테 박살 나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박살 났을 부족이었지.”
“예, 그만큼 우리와 아주 가까운 위치에 있는 부족이죠. 규모도 제법 크고요. 그런데 제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들이 또다시 서진을 준비하고 있다는 겁니다.”
“준기에게 당했는데도?”
“이미 피해는 완전히 복구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이번에는 저번보다 훨씬 많은 전사를 동원한다던데요?”
원재의 말이 끝나자 호영은 턱을 괸 채 상념에 잠겼다.
‘지금 같은 시기에 이만한 세력을 갖추다니. 역시 허영만, 그자인가? 영등포구라면 그자가 맞을 것 같기는 한데……. 하지만 이건 너무 빨라.’
회귀 전 호영이 마지막에 따랐던 군주가 허영만이라는 사람이었다. 2회 차에 왕국을 건설하여 왕이 되었던 사람 중 한 명이었는데 8회 차까지 왕위를 유지하였던 아주 대단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유능하다고 해도 1분기가 이제 막 끝나 가는 상황에서 이 정도의 확장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다른 것은 몰라도 허영만이 언제쯤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는지는 분명하게 기억하기 때문이다.
허영만이 일개 부족민에서 추장이 된 배경에는 ‘어떤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그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까지는 아직 몇 달은 족히 남아 있었다.
즉, 지금은 세력을 확장하기는커녕 부족을 장악하지도 못한 상태라는 것이다.
‘그 사람인지, 아닌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이 정도의 군사력을 벌써부터 동원할 정도라면 나중에 위협이 될 게 분명해. 무엇보다 양천구 쪽에 준기가 있으니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 지난번에는 운이 좋아 막은 것 같지만, 또다시 운을 기대하기는 힘들 테니까.’
안 그래도 준기의 조력이 절실하게 필요하던 상황이었다. 호영 대신 김성근에게 참교육을 시켜 줄 교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참에 영등포구 연합이라는 곳이 더 이상 확장하지 못하게 견제하고 준기의 부족을 합병시키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마음의 결정을 내린 호영은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원재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그들을 막아야 할 것 같다.”
“예? 아, 그놈들이 위협적이라 판단하신 겁니까? 하긴, 다른 부족들은 자신의 부족을 지키는 것도 버거워하는 상황에서 혼자 너무 날뛰는 것 같기는 합니다. 물론 우리 부족만큼은 아니지만 말이죠. 아무튼 그들을 어떻게 막으실 생각입니까?”
“내가 가야겠지. 그것만큼 확실한 것은 없으니까.”
“팀장님이 직접 가신다고요?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을까요? 그냥 김성근이랑 친위대 몇 명만 보내죠. 김성근도 이제 심법을 배워 제법 쓸 만해지지 않았습니까?”
겨울이 막 시작될 때쯤, 김성근은 결국 호영에게 충성을 바쳤다. 본인 입으로 호영에게 충성한다고 맹세한 것이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겠지만 호영 역시 김성근과의 약속을 지켰다. 심법을 가르쳐 준 것이었다.
현재 김성근은 호영의 일대일 가르침으로 ‘마나 사용자’가 된 상태. 한마디로 진정한 무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안 그래도 든든하였던 김성근이 마나 사용자가 되어 더욱 강해졌으니 호영을 대신하기에도 나쁘지 않을 것이었다.
“아니, 김성근은 아직 일러.”
하지만 호영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그는 김성근의 무력을 1퍼센트도 신뢰하지 않았다. 호영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막 마나를 느낀 김성근을 어떻게 믿으란 말인가.
지금은 김성근이 보유한 마력이라고 해 봐야 2나 3이었다. 이 정도의 마력은 없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뭐, 방어만 하는 것이라면 그것만으로 충분할 수 있겠지만.’
준기가 있으니 김성근과 친위대 몇 명이 지원하는 입장을 한다면 영등포구 연합의 공격을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호영은 그것만으로 만족하고 싶지 않았다. 웬만하면 연합이라고 부를 정도로 거창하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영등포구 연합의 본거지에 타격을 주고 싶었다.
“그러면 친위대원이라도 많이 데려가세요. 영등포구 연합, 절대 무시해서는 안 될 놈들입니다.”
“아니, 나 혼자 갈 거다.”
“예? 혼자 가신다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