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85화 (85/345)

# 85

“……추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일단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일단’을 강조하는 현기의 말투에 호영은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피식 웃음을 지었다.

군사가 된 이후의 현기는 왠지 모르게 위태롭게 느껴졌었다. 때로는 공격적으로 행동했고,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자기 과시를 하였었다. 호영의 앞에서는 자신의 활약에 대해 일일이 자랑하기도 하였다.

아무래도 자신이 무공에 재능이 없음을 알게 되자 심리적으로 위축된 것 같았다.

사실 그 때문에 부족 간부들과 어느 정도 마찰이 있었다.

행정관인 봉하와도 가끔씩 말다툼을 하였고 장훈이나 봉성 같은 부대 책임자들과도 신경전을 벌였었다.

특히 감찰관인 원재는 호영의 오른팔이자 유저이기까지 하여 더욱 견제하고 더욱 질투하였었다.

만약에 현기의 능력이 출중하지 않았다면 호영은 진즉에 현기를 제지하였을 것이다. 물론 계속 간부들과 마찰을 일으켰다면 그때도 제지했을 것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현기는 결국 호영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어느덧 자괴감이나 질투심 따위를 훌훌 털어 버리고 이성적이면서 합리적인 사람으로 변해 버린 것이었다.

지금 호영에게 보여 주는 모습도 이전이라면 보지 못했을 모습이었다.

‘볼 때마다 성장하는 것 같군.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내가 기대하는 군사의 모습을 볼 수 있겠는데?’

속으로 그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호영에게 현기가 불현듯 물었다.

“그런데 뜬금없지만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현기의 갑작스러운 말에 호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가 궁금한데?”

“왕국이 세워지면 공신들에게 작위를 하사한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기사라는 작위를 하사할 생각이다. 봉토도 조금씩 쥐여 줄 것이고 말이야.”

“그런데 왜 하필 기사입니까? 기사보다는 한국적인 명칭을 사용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조선이나 고려에서 사용하는 명칭들로 말입니다.”

그런 현기의 의문을 해결해 주기 위해 앞으로 나선 것은 원재였다.

얼마 전까지 현기와 얼굴을 붉히며 지냈던 관계.

하지만 현기의 사과에 웃는 얼굴로 대범하게 받아 주었던 바로 그 원재였다.

“그것은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현재 미국과 중국 그리고 유럽 일부에서 유저들이 왕국을 세우고 있습니다.”

“뭐, 그건 저도 듣기는 했어요. 왕국뿐만이 아니라 공화국이나 연합국, 심지어 일본에는 제국을 표방하는 나라도 생겼다죠? 참 특이한 인간들 많은 것 같아요.”

“예, 하지만 대부분의 나라들은 그저 공식적으로 왕국이나 공화국임을 선언한 것일 뿐, 시스템이 인정한 왕국은 아닙니다.”

“시스템요? 나라를 세우는 데 시스템이 관여한단 말인가요?”

현기가 사뭇 당혹스러워하는 어조로 그렇게 반문하였다. 그의 똑똑한 머리로도 이것만큼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하기야 지금까지 보여 주었던 센추리의 방식을 생각해 봤을 때 시스템이란 왠지 모르게 어울리지 않았다.

특히 현기에게 있어 센추리란 또 하나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현실감이 넘치는 세계였다. 더욱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팀도 나라를 세우는 데 정확히 어떤 기준이 있는지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일정한 인구나 영토를 차지하면 왕국을 세울 수 있습니다. 시스템이 인정하는 왕국을 말입니다.”

“헐, 센추리에 그런 게임적인 요소가 있을 줄이야. 하긴, 생각해 보면 스킬도 있으니. 근데 그래서 시스템이 인정하는 왕국이 되면 무슨 혜택이 있나요? 옛날 도시 발전 게임처럼 건물을 만들고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는 건가요?”

“그것까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작위라는 것을 하사할 수 있습니다. 바로 기사라는 작위를 말입니다.”

나중이 되면 오등작의 작위도 하사할 수 있겠지만 그거야 머나먼 미래의 일.

사실 2회 차에서는 왕국이 될 수 있을지 없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한반도의 특성상 영토 크기로 왕국이 될 수는 없으니 인구로 왕국이 되어야 하는데 호영이라고 해도 그만한 인구를 단기간에 모으는 것은 쉽지 않았던 까닭이다.

“아. 그래서 추장님이 기사를 거론하신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이거, 근데 곤란하게 된 거 아닌가요? 벌써부터 다른 나라에 왕국이 세워졌다니. 시스템이 인정할 정도라면 현리보다 강국이라는 말인데, 그들과 언젠가는 국경을 맞대야 하잖아요? 특히 일본이나 중국은…….”

호영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벌써 거기까지 생각한다는 게 호영으로선 뿌듯하게 느껴졌다. 현기 역시 호영처럼 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네가 식량을 확보해 줘야지. 식량만 확보된다면 인구는 언제든지 늘릴 수 있어. 인구를 늘리면 우리도 왕국이 될 수 있고.”

“이야기가 또 왜 그렇게 되죠? 너무 저를 부려 먹을 생각으로 가득하신 거 아닌가요?”

퉁명스러운 어투. 그러나 현기의 얼굴에 미소가 스쳤다.

힘들고 고달플 것이 분명하지만 그만큼 얻을 것도 많으리라.

* * *

현기가 군사로 자리 잡은 이후 호영이 집중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무공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익히는 속도가 빨라.”

“당연하죠. 제가 누굽니까? 김성근입니다! 김성근!”

그리고 무공을 가르칠 때 가장 시간을 들여 가르치는 사람이 있었다.

현리에서 가장 독보적인 재능을 보유한 유저, 김성근.

하루에만 무려 1시간 이상의 시간을 투자하여 그를 가르치고 있었다.

“솔직히 아직 E 플러스이긴 한데 이제 D급까지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거든요.”

“보였다고?”

“예, 몸만 따라 주면 됩니다. 이제.”

자신감 넘치는 김성근의 발언에 호영은 눈을 번뜩였다.

‘D급을 목전에 두었다라……. 슬슬 심법을 가르쳐 줘야겠군.’

처음부터 예상했던 일이지만 김성근의 성취도 수준은 다른 유저들과 비교를 불허하였다.

현재 김성근이 익히고 있는 뇌전칠창은 3회 차 끝날 무렵에 중국에서 만들어지고, 5회 차부터는 ‘보급형’ 검술이라 불리며 많은 유저들이 익히게 되는 ‘삼재검’과 비슷한 수준의 창술이었다.

호영이 대략적인 개념을 가르쳐 주고 준기가 만들어 낸 창술이었는데, 초식은 일곱 개밖에 없어 무척이나 단순하였지만 무공에 문외한이었던 사람이 익히기는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무엇보다 김성근이 뇌전칠창을 익힌 시간은 고작해야 몇 달밖에 되지 않았다. 현실 시간으로 따지면 고작해야 3주 정도.

그런데 벌써 D급을 넘본다는 것은 김성근의 재능이 그만큼 독보적인 수준임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호영으로선 이같은 재능의 소유자를 언제까지 방치할 수만은 없었다.

지금이라도 보다 좋은 무공을 가르쳐 하루빨리 재능을 개화시켜 줘야 했다. 머나먼 미래를 대비해야 하는 까닭이었다.

“너에게 심법을 가르쳐 주겠다.”

“엥? 심법요?”

난데없는 호영의 말에 김성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초식은 알았지만 심법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기에 의아해하는 것이었다.

호영은 그런 김성근을 보며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마나 사용자라고 혹시 알아? 한국에서는 나 말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외국에서는 조금씩 등장하고 있는 건데.”

“들어는 봤습니다. 마법사들이 마나 사용자 아닙니까?”

“마법사들이 주로 쓰기는 하지. 하지만 우리 같은 무인들도 쓸 수는 있다.”

“오호, 무협지처럼 말입니까?”

김성근의 얼굴이 점점 흥미롭게 변해 갔다.

심법!

인간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게 해 주는 무학! 전형적인 무골이라고 할 수 있는 김성근으로선 흥미가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뭐, 설명만으로는 모르겠지? 직접 한번 보여 주마.”

호영은 그렇게 말하며 창을 들었다. 창을 든 채 느긋하게 자세를 잡던 호영은 돌연 뇌전칠창의 초식을 펼쳤다.

김성근이 눈 감고도 펼칠 수 있다고 자부하는 뇌전칠창의 초식. 하지만 호영이 펼치는 초식들은 무언가 달랐다.

발을 움직이는 속도도, 창에서 나오는 위력도 차원이 달랐다. 심지어 단순하게만 느껴지던 초식들이 화려하고 변칙적으로 느껴졌다. 저 공격이 김성근에게 쏟아진다면 김성근은 5초도 채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오오! 어떻게 저렇게 움직이지?”

처음에는 흥미진진하게만 바라보던 김성근이 이제는 감탄사까지 내뱉으며 호영의 뇌전칠창을 지켜보았다.

그동안 호영이 몇 차례 시범을 보여 준 적이 있었지만 이 정도로 강맹한 뇌전칠창은 처음이었다. 마치 전혀 다른 무공,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마침내 뇌전칠창의 초식이 끝나자 김성근의 얼굴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기필코 배우고 말겠다는 욕망! 그 욕망이 얼굴 가득 드러나 있었던 것이다.

“어때? 심법을 배워 보고 싶나?”

“심법을 배우면 추장님처럼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까?”

“말했잖아, 마나 사용자가 된다면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그렇다면 가르쳐 주십시오! 꼭 배우고 싶습니다!”

열망으로 가득한 눈빛을 하며 그렇게 외치는 김성근을 보며 호영은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용연후 김성근이 나에게 가르침을 청하다니. 정말 내가 뭐라도 된 것 같군. 심법뿐만이 아니라 다른 스킬들까지 가르쳐 주고 싶을 정도야.’

솔직한 마음으로 회귀라는 경험을 가진 호영으로선 김성근이 자신의 밑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고작해야 백 단위나 천 단위의 병사들을 지휘했을 때 김성근은 백작이니 후작이니 거창한 작위를 가진 채 일군을 이끌거나 전군을 이끄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물론 전군이라고 해 봤자 경기도 내에 존재하는 여러 소국 중 하나의 군대를 이끄는 것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호영으로선 김성근이라는 인물은 대단하기 그지없는 존재로 기억되었기에 저런 얼굴을 하고서 자신에게 스킬을 가르쳐 달라고 하니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호영이라는 사람이 제대로 인정받은 것 같은 기분이랄까.

하지만 호영은 기분에 휘둘리지 않았다. 애써 침착함을 되찾은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착각하지도, 우쭐거리지도 말자. 지금은 부족해 보여도 김성근 역시 천재 중에 한 명이다. 그리고 나는 좋게 쳐 봐야 수재에 불과하고. 괜히 스킬들을 가르쳐 주다 내 밑천을 전부 잃을지 몰라. 그러니 지금은 심법만 가르쳐 준다.’

물론 심법도 그냥 가르쳐 줄 수 없었다.

“대신 조건이 있다.”

“조건요?”

“너도 인터넷을 한다면 알 거다, 초보자의 섬에서든 여기에서든 나만큼 강한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당연히 나보다 강력한 스킬을 가진 사람도 없다.”

“뭐, 그런 것 같기는 합니다만…….”

“내가 가르칠 심법이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가질 것 같으냐?”

초보자의 섬에서는 현재 스킬 거래가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직 ‘문파’라고 부를 만한 조직은 창설되지 않았지만 돈을 받고 자신의 스킬을 가르쳐 주는 사람들은 조금씩 늘어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현재 시중에서 거래되고 있는 스킬들의 등급은 가장 높아 봐야 D급이 한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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