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
부족 연합의 간부들이 유저라고 해도 여성 우대 정신 같은 것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커뮤니티를 보면 오히려 부족 연합은 여자들을 노예 취급하며 추행하고 강간하는 것에 낄낄거리며 자랑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여자인 봉영으로선 항복을 하느니 결사항전을 하는 게 당연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준기의 경우는 달랐다.
물론 그가 부족 연합에게 투항하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현리로 가야 할 그가 애먼 곳에서 해맬 수는 없었다. 다만 ‘싸운다.’와 ‘투항한다.’라는 선택지 외에 또 다른 선택을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 부족을 공격한 적에게 항복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하지만 도망치지 못할 것은 없지 않을까요?”
“추장님은 적군을 앞에 두고 도망치려는 것인가요?”
“꼭 도망치겠다는 것은 아니고, 그런 선택지도 있다고 말하려는 겁니다.”
“어떻게요? 동쪽이야 부족 연합 때문에 수인들이 모두 정리되었지만 나머지 방향은 수인들 천지인데 도대체 어디로 도망치시게요?”
“현리로 향하는 길이 있잖아요.”
준기는 마침내 그동안 숨겨 왔던 자신의 본심을 밝혔다. 바로 현리라는 선택지에 대해서 말이다.
사실 그는 이번 일이 아니었더라도 센추리 시간으로 올해가 가기 전에 현리로 되돌아갈 생각이었다.
이전까지는 부족 연합과의 전쟁으로 정신이 없었고 또 최근까지는 중간에 마주할 수인들을 감당할 무력이 없어서 인내했었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무력에 자신감이 생긴 상태였다.
피해가 아예 없을 수는 없겠지만 다섯 명 이하의 피해로 현리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었다.
“현리라고요? 거긴 부족 연합보다 강하다는 곳이잖아요?”
“예, 그러니 부족 연합에게서 우리를 지켜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무슨 차이죠?”
“네?”
“현리에 가는 것이 부족 연합에게 항복하는 것과 무슨 차이냐고요.”
“…….”
“저는 현리로 갈 생각이 없어요. 여기서 부족 연합과 맞서 싸울 거예요.”
그 단호한 대답에 준기는 순간적으로 깨달았다, 봉영은 새로운 부족에 합류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사실을.
정확히는 새로운 부족에 합류할 생각은 있어도 ‘강한 부족’에 합류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두려운 것인가? 하긴, 여자로서 두려울 법도 하지. 아바타의 외모부터가 지나치게 예쁘니까.’
이곳에서는 부족의 이인자이기에 아무도 그녀를 막 대할 수 없었지만 다른 부족에 가면 상황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법도, 윤리도 없는 무법 지대니 기회가 생기면 언제든 그녀를 범하려 들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현리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솔직히 준기가 생각하기에 자신의 의형은 은근히 여자를 밝히는 성정이었다. 실제로 봉영의 선조도 호영의 아내였지 않은가? 아내들도 많은 상황에서 말이다.
아무튼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준기는 더 이상 현리에 대해서 말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전략에 대해 물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싸우는 것이 좋을까요? 정면으로 싸우기에는 솔직히 적의 숫자가 너무 많지 않습니까?”
추장으로서 자존심이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준기는 애초에 전략이나 병법 같은 것은 완전히 문외한이었다.
1회 차 당시 현리에서 전쟁을 할 때도 그는 그저 호영의 명령을 따르기만 하였었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좋은 결과를 창출하였고 말이다.
그렇기에 봉영의 의견을 구하는 것에 자존심 상해 하거나 치욕스럽다 생각하지 않았다.
“그 전에, 추장님은 몇 명 정도를 상대할 수 있나요?”
“열 명 정도는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열 명이라고요? 괜히 과장해서 말씀하시는 거 아니에요?”
순간 준기는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그녀의 의견을 구하는 것엔 아무렇지 않아 하면서도 자신의 무공이 무시당할 때는 무척이나 격렬하게 반응하는 준기였다.
무공에 대한 긍지가 그만큼 강하기 때문이다.
‘과장한 것이 아니라 축소해서 말한 겁니다! 마나만 많았다면 백 명도 상대할 수 있는데.’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준기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봉영 씨의 궁술 랭크가 D 마이너스라고 하셨죠? 저의 창술은 D 플러스입니다.”
“……그렇군요.”
어떻게 보면 똑같은 D급이라고 폄하할 수 있겠지만 봉영은 스스로가 D급 스킬을 가진 실력자인 만큼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D 마이너스가 전국에서 손꼽히는 실력이라면 D 플러스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실력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참고로 이것은 현재 기준이었고, 마력은 포함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마나 사용자’라는 존재가 극도로 희박한 2회 차에서 심법까지 갖춘 준기의 무력은 호영을 제외하고는 세계 제일이라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열 명을 상대할 수 있다면 이번 전쟁은 이긴 것과 다름없겠군요.”
“적군은 수십 명인데 너무 쉽게 말씀하시는 거 아닌가요?”
“수십 명을 한 번에 상대할 필요는 없죠.”
그녀는 단정적인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마치 수십 명을 상대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어조였다.
준기가 의구심을 느낄 때 그녀가 질문을 던졌다.
“적군이 지금 산으로 들어갔다고 했죠, 우리 부족 바로 근처에 있는 산으로?”
“예, 아마 부족 연합으로선 가장 빠른 루트를 선택한 것 같습니다. 그쪽에서 산만 넘으면 바로 우리 부족이니까요.”
“잘됐네요. 게릴라전을 하면 되겠어요.”
“게릴라전요?”
“적군이 산에서 움직인다면서요? 게릴라전에 이보다 좋은 지형이 어디 있어요?”
잠시 그녀의 주장을 음미하던 준기는 이내 탄성을 지르며 말했다.
“괜찮은 것 같네요, 게릴라전이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가 막힌 방법인 것 같습니다.”
유격전! 소수 정예가 펼치기에 이보다 적합한 전술은 없었다. 더군다나 그녀의 말처럼 은폐하기 쉬운 산이라면 유격전을 펼치기에 천혜의 장소라고 할 수 있었다.
‘간단한 방법이긴 한데 그만큼 효과적이야. 확실히 나의 무력이라면 정면으로 싸우는 것보다 게릴라전이 낫지.’
정면으로 싸워도 누구보다 잘 싸울 자신이 있는 준기였지만 기동력을 이용한다면 더욱 효과적인 전투가 가능하였다.
머리만 잘 쓴다면 정말 혼자서 백 명 이상 상대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말이었다.
“뭐,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죠.”
“아니요. 저였으면 지형을 이용할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 말에 봉영은 싱긋 웃었다. 나름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곧바로 미소를 지워 내고는 준기에게 말했다.
“결정하셨으면 지금 바로 가죠.”
“예? 지금 바로요? 전사들은 어쩌고요?”
“전사들을 모을 필요도 없어요. 우리끼리만 가도 충분해요.”
그녀의 추진력에 준기는 기가 질린 표정을 하였다. 이건 마치 그의 의형을 보는 것 같지 않은가.
하지만 시간이 생명이라는 사실은 그 역시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적군은 부족의 근처까지 다가왔을 것이다.
평지라면 7킬로미터 이상의 거리지만 산을 타면 3킬로미터도 안 되는 거리. 산에 마물들이 남아 있어 진격 속도가 늦추어지겠지만 그래 봤자 몇 시간 정도가 한계였다.
한가하게 전사들을 챙겨서 출정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빨리 창 챙기고 오세요!”
“아, 알겠습니다.”
결국 준기는 달리기 시작하였다. 수십 명을 상대로 하는 전쟁에 고작 둘이서 출정에 나선 것이다.
* * *
“오랜만에 전쟁이네요. 크흐! 그것도 인간과의 전쟁이라니. 너무 기대됩니다. 솔직히 전쟁 때문에 튜토리얼을 깬 건데 말입니다.”
김영태라는 이름의 사내가 신나는 목소리로 떠들어 대고 있었지만 고항은 조용히 듣기만 하였다. 게임으로서 그저 즐기기 위해 센추리를 하는 김영태와 다르게 고항에게 있어 센추리란 직업이나 마찬가지였다.
프로 게이머 때와 마찬가지로 목숨이 걸려 있는 것처럼 센추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지금 상황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전쟁이 두려운 것은 아니지만 부담스럽다고나 할까.
특히 그가 모시는 재벌 도련님의 성격을 생각하면 더욱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원정대장으로서 승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피해는 최소한, 수확은 최대한으로 해야 하는 까닭이었다.
‘나도 이 녀석처럼 순수하게 즐기고 싶은데 말이야.’
분명 그도 학창 시절에는 게임을 게임으로서 즐겼는데 정작 프로 게이머가 된 이후에는 게임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게 되었다.
퇴물이 되어 은퇴하게 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다가 결국 스스로 센추리를 직업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후우, 그래도 이 길이 맞는 거다. 돈은 벌어야 하니까.”
“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아니다. 그보다 얼마나 남았지?”
“뭐가 얼마나 남아요?”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얼마나 남았냐고.”
“으음, 글쎄요. 전사들에게 한번 물어보고 오겠습니다.”
머리를 긁적이며 허둥지둥 전사들에게 달려가는 영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유저랍시고 측근으로 기용하였는데 보면 볼수록 무능해 보였다. 잘하는 것이라곤 시끄럽게 떠드는 거 하나뿐이랄까?
심지어 말하는 것을 들어 보면 전쟁광이 분명한데 막상 피를 보는 것은 두려워한다. 실제 지금까지의 전장에서 아무런 활약을 한 적이 없었고 말이다.
그야말로 무능의 극치라고나 할까.
‘하지만 저래 뵈도 인구가 백 명이 넘는 부족을 통째로 연합에 바쳤던 자지. 나의 팬이기도 하고.’
최진수를 수장으로 둔 부족 연합, 유저들 사이에서 통칭 영등포구 연합이라 불리는 이 세력은 프로 게이머들에 의해 탄생하였다.
물론 그렇다고 프로 게이머들이 기상천외한 지략을 보여 부족이 확장되고 연합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사실 프로 게이머들의 명성에 힘을 얻은 결과였다.
센추리 유저들은 대개 게임이라는 것에 익숙한 자들이었다. 즉, 가상현실이 나오기 이전부터 컴퓨터 게임을 즐겨 하던 사람들이란 말이었다.
그렇다 보니 평범한 사람은 모를 법한 프로 게이머들에 대해서도 아는 유저들이 많았는데, 그만큼 프로 게이머 팬 역시 많았다.
영등포구 연합에서는 다수의 프로 게이머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이들은 몸값이 수억대였던 전설적인 수준의 프로 게이머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팬덤을 확보하였던 선수들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센추리에서도 이들의 팬이 적잖이 있었는데 부족 연합이 만들어진 계기도 바로 이 팬들에 의해서였다.
센추리의 유저들이 자신이 좋아하던 프로 게이머들과 같이 게임하고 싶다는 이유로 김영태처럼 자신의 부족을 바치거나 아니면 내부 협조자가 되어 부족을 배신하는 식으로 부족 연합에 적극 협력하였던 것이다.
심지어 본 게임에 참여하지 않았던 유저들이 대거 튜토리얼을 깨고 본 게임으로 넘어와 부족 연합에 합류하기도 하였다.
이 모든 게 바로 프로 게이머들의 명성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그렇기에 고항으로서도 김영태를 무시할 수 없었다.
자신의 팬이자 부족 연합의 창업 공신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