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
‘설마 변심을 한 것인가?’
얼핏 듣기로 작은 규모를 가진 부족의 추장이 되었다고 했다. 소규모라고 해도 자신만의 부족을 이끈다면 야망이 생겨도 이상한 일이 아닐 터.
더군다나 준기에게는 자신이 직접 만들어 낸 스킬들이 있었다. 솔직한 말로 호영에게서 독립하는 게 준기한테는 이득일 수 있었다.
“왜? 무슨 일이라도 있어?”
하지만 호영은 애써 태연함을 유지했다. 아직 제대로 답변을 듣지 못했으니 일단 들어 보고서 판단을 내리겠다는 생각이었다.
“제 부족에서도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무슨 전쟁? 수인족이라도 쳐들어왔나?”
“인간들이 쳐들어왔습니다. 정확히는 여러 부족의 연합인데, 아무래도 다수의 유저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준기의 대답에 호영은 눈을 크게 떴다. 전쟁이라기에 당연히 수인들과의 전쟁을 말하는 줄 알았었다. 왜냐하면 현리 부족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부족도 전쟁할 만한 역량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2회 차가 되었어도 센추리 세계는 여전히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물론 1회 차 때처럼 인간의 지위가 가축과 다를 바 없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인간이 약세를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호영이 위치한 서울에 해당하는 지역은 수인족이 강세를 보이고 있었다. 오직 현리가 위치한 강서 지역만 인간이 강세를 보이는 것이었다.
그렇다 보니 인간 간의 전쟁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수인족에게 대항하기 위해 인간은 서로 힘을 합쳐야 하는 까닭이었다.
‘유저들이 세력을 넓히는 것은 분명 3분기 이후일 텐데?’
3분기, 그러니까 센추리 시간으로 3년째 되는 시기부터 실력 있는 소수의 유저들이 본격적으로 세력 확장에 나선다.
그들 중 세력 확장에 성공하는 이들이 추후 왕국을 세우게 되는데 가장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였던 강북의 유저들도 2분기가 끝날 때쯤 되어서야 확장에 나섰다.
즉, 내년 가을 이후에나 세력을 확장한다는 것이다.
“유저라고 생각 없는 것은 아닐 텐데……? 수인들이 있는데도 분열할 이유가 없잖아.”
“부족 연합이 이미 근처에 있는 수인들을 모두 물리쳤습니다. 마법사들을 이끌고 선제공격하여 물리쳤다는데 실제로 저의 부족에 처음 침입했을 때도 마법사를 대동했었습니다.”
“허, 마법사를 수하로 두었다는 건가. 그런 곳이 있을 줄이야.”
호영은 놀랍다는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2회 차가 끝나 갈 때라면 모를까, 벌써부터 마법사를 수하로 둔 유저가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확실히 역사가 바뀌긴 했다. 설마 벌써부터 이 정도의 세력을 가진 유저가 등장할 줄이야.’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호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그 정도의 역량을 갖춘 상대라면 쉽지 않을 것 같다? 내가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겠어?”
“1회 차 때도 그렇게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또다시 도움을 바랄 수는 없죠. 무엇보다 저의 부족도 그리 약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현리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
준기가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이자 호영은 의아한 얼굴을 하였다.
무공이야 한국을 넘어 세계에서 손꼽히는 실력을 가졌다고 볼 수 있는 홍준기라지만 전쟁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준기라 해도 마력이 부족한 지금 시기에 마법사까지 갖춘 부족 연합을 혼자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할 터.
그렇다면 결국 세력의 힘이 필요한데, 문제는 준기가 사람을 다스리는 자질이 신통치 않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준기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인데.’
호영이 알기로 준기는 결코 만용을 부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의 자질이나 단점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승산 없는 전쟁에 자신감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지금처럼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면 그에 대한 근거를 확실하게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하였다.
“정말 괜찮겠어? 상대가 NPC도 아니고 유저라며. 그것도 다수의 유저.”
“예, 괜찮을 겁니다. 그리고 사실 저의 부족도 저 혼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 아내…… 아, 여기서 말하는 아내는 아바타의 아내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제 아바타의 아내가 유저입니다.”
“아내가 유저라고? 여성 유저라……. 흔하지 않기는 한데…… 솔직히 의미는 없지 않아?”
“물론 평범한 여성 유저라면 그렇겠죠. 하지만 이 여성분은 조금 다릅니다. 봉씨 일족 아시죠? 그 봉선 형수님의 일족 말입니다.”
“당연히 알지. 지금도 나를 도와주고 있는 일족인데.”
“제 아바타의 아내가 바로 그 봉씨 일족의 여인입니다. 그리고 봉씨 일족의 여인답게 엄청 대단합니다. 스텟도 나쁘지 않고 무엇보다 지도력이라고 해야 하나? 카리스마가 장난 아닙니다. 저는 그 여성분을 보고 봉선 형수님이 떠올랐다니까요?”
“……아!”
준기의 말에 호영은 탄성을 내질렀다. 봉씨 일족의 여인이라는 말에 순간적으로 누군가가 떠올랐고 그와 동시에 준기의 자신감이 이해가 갔기 때문이다.
사실 그동안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있었다. 호영만이 알고 있는 봉씨 일족의 유저, 그러니까 회귀 전에 ‘여 나라’를 세웠던 봉씨 성의 인물은 여성이었다.
그리고 여 나라 역시 1회 차의 여 부족처럼 여전사들이 중심으로 있는 나라였다.
하지만 현리의 봉씨 일족을 보면 여전사는커녕 억센 분위기의 여성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여느 일족의 여인들처럼 조신하기만 할 뿐이었다.
즉, 머지않은 시기에 왕국을 세워야 할 여 나라의 잔재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대성의 혈통만이 현리의 봉씨 일족으로 남고, 나머지는 초씨 일족과 함께 다른 곳으로 이주했던 것이구나.’
그렇다면 준기와 함께 있다는 그 봉씨 일족의 여인은 회귀 전 2회 차 끝날 무렵에 여 나라를 세웠던 유저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약 그 여인이 맞는다면 준기의 자신감도 결코 헛된 것이 아니리라.
“제가 힘을 담당하고, 그 여성분이 통솔을 담당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겁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형님.”
“알았다. 상황이 그러니 내가 따로 도울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면 어떻게 할 생각이야?”
“당연히 현리로 돌아가야죠. 제가 있을 곳은 형님의 옆자리뿐입니다.”
낯간지러운 말이었지만 호영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홍준기가 함께라면 이번 회 차도 1회 차처럼 호영의 독무대로 만들 수 있으리라.
* * *
두 달 전, 마법사가 포함된 ‘부족 연합’이라는 세력에게 난데없이 기습 공격을 받은 준기는 그날 이후 그들의 동태를 살피는 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부족의 전사가 열 명 정도밖에 안 되는 상황에서도 매일같이 정찰을 보내 부족 연합의 동태를 확인한 것이다.
그리고 오늘, 마침내 정찰의 효과가 입증되었다.
“또다시 쳐들어온다고?”
“그렇습니다. 수 십여 명의 전사가 산으로 들어가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습니다!”
준기는 전사의 보고에 인상을 찡그렸다.
그동안 계속해서 정찰을 보낸 게 아무 의미 없지 않다는 사실은 분명 기분 좋은 일이었지만 그 성과가 적의 공격을 예고하였기에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고작해야 두 달 전에 있었던 부족 연합과의 전쟁.
준기는 그날의 전쟁을 잊을 수 없었다. 특히 ‘경계의 실패’로 피해가 극대화되었기에 더욱 잊을 수 없었다.
‘이번에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어야 한다는 말인가?’
무인으로서 대련이나 자기 단련은 좋아하였지만 그렇다고 전쟁 자체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미 자신의 일족을 잃어 보았던 사람이었다.
그때의 절망감이 아직도 생생하였기에 새로 얻은 일족과 부족을 잃고 싶은 생각은 당연히 없었다.
‘딱 한 달만 더 있었다면 마력 30을 찍었을 텐데.’
준기는 쓴웃음을 지었다. 약간의 시간이 더 주어졌다면 전투가보다 유리했을 것이었다. 부족 자체는 달라질 게 없었지만 그의 마나량은 조금이라도 증가했을 것이니까.
하지만 난데없이 기습이나 해 대는 적이 그를 기다려 줄 리는 없었다. 준기는 고개를 홰홰 저은 채 전사에게 말했다.
“부인을 불러와라.”
“알겠습니다.”
센추리상에서 준기의 아내, 즉 추장의 본처에 해당하는 신분을 가진 여성 유저가 있었다. 봉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이었는데, 그녀는 준기가 생각하기에 1회 차의 봉선만큼이나 카리스마 있고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
실제 두 달 전의 전장에서 준기의 활약도 놀라웠지만 그의 아내인 봉영의 활약도 작지 않았다. 현실에서 양궁을 하던 그녀는 놀라운 활솜씨로 네 명의 전사를 죽이거나 부상을 입혔던 것이다.
열다섯 명의 적들 중에 무려 네 명을 제거한 셈이니 실로 엄청난 활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활솜씨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직 제대로 확인해 본 적은 없지만 그녀는 전략이나 병법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거느리는 여전사들의 훈련 모습만 봐도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준기로선 부부 관계가 아닌, 동료로서 그녀의 조언을 구해야 했다.
“오셨습니까? 급히 논의할 것이 있어 불렀습니다.”
“놈들이 다시 쳐들어온다는 소식은 들었어요. 저번보다 많다면서요?”
“예, 어떻게 그리 많은 전사를 동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전사의 숫자가 우리 부족 전체 인구보다 많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귀찮게 됐네요.”
심각하다고 볼 수 있는 부족의 상황을 그저 ‘귀찮다’고 표현하는 봉영. 준기로선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그녀의 담력은 평범한 여자들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것 같았다.
마치 여장부를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하기야 그 악명 높은 튜토리얼을 깼을 정도이니, 담력부터가 웬만한 남자보다 대단하다는 거겠지.’
여자들의 경우 웬만해서는 튜토리얼을 깨지 않는다. 튜토리얼이 잔인하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센추리 세상 자체가 여성에게 불리하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인간이라는 종족이 약자로서 핍박받는 세계관에서 여성의 경우는 인간 사회에서도 약자일 수밖에 없었다.
강간이나 폭력은 일상이었고, 수인이나 마물에게까지 험한 꼴을 당하게 될 수도 있었다. 센추리 세상은 그만큼 여성에게 아무런 메리트가 없다는 것이다.
그나마 초보자의 섬 같은 경우에는 본인이 허락하지 않는 한 강간은커녕 신체적 접촉조차 막을 수 있기 때문에 여자들의 비율이 의외로 높은 편이었다.
“봉영 씨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까?”
“당연히 싸워야죠. 항복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잖아요?”
여장부답게 거칠 것 없이 대답하는 봉영.
적군의 숫자가 훨씬 많다는 소식을 들었으면서도 항복이라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지워 버린 것 같았다. 정말 여장부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항복할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을 공격하는 세력은 부족 연합, 즉 하나의 부족이 아니라 여러 부족이 연합된 세력이었다.
당연하겠지만 부족 연합인 만큼 새로운 부족의 합류에 관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미 우리에게 받은 피해가 커서 투항을 그냥 받아 줄 리는 없겠지. 받아 준다고 해도 봉영 씨를 제대로 대접해 줄 리도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