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
“나는 미노타우로스를 상대할 때를 제외하면 전투에 나서지 않을 생각이다.”
“오, 그렇습니까?”
“그러니 이현기 십장을 지켜 줄 사람은 너밖에 없어.”
“으음, 누군가를 지키는 건 별로 마음에 안 드는데……. 그래도 추장님의 부탁이라면 뭐.”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지만 호영의 부탁을 거절하지는 않는 김성근이었다.
호영은 그런 김성근을 보며 조금이나마 안심하였다.
이걸로 이현기처럼 유능한 인재가 어처구니없이 목숨을 잃게 될 가능성은 조금이나마 줄어들 것이다.
* * *
정면으로 고블린 수십 마리가 보였다.
작달막한 체구에 나무 몽둥이를 들고 있는 고블린들. 얼핏 보면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모습이었다. 체구가 150도 안 되는 난쟁이들이라 더욱 우습게 보였다.
하지만 그런 고블린을 정면으로 마주한 현기는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쉼 없이 돌아가던 머리도 순간적으로 멈추어버린 거 같았다. 이게 전쟁이라는 건가.
“십장 나리! 십장 나리!”
“……어?”
그때 옆에서 불쑥 장비를 닮은 사내가 다가와 현기를 불렀다. ‘나리’라는 시대와 맞지 않은 이상한 호칭을 사용하며 말이다.
“뭐 하고 있는 겁니까? 명령 안 내립니까?”
“…….”
“아, 무슨 고문관도 아니고 답답해 죽겠네!”
장비를 닮은 사내, 김성근은 짜증 어린 눈으로 현기를 바라보다 이내 창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그는 자신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달려드는 고블린들을 노려보며 이렇게 외쳤다.
“내가 바로 현리의 김성근이다!”
엄청난 목소리! 사납게 달려들던 고블린들조차 움찔할 정도의 목소리였다. 김성근의 목소리에 아군도 크게 힘을 얻었다.
친위대의 병사들은 저마다 힘찬 함성을 내지른 채 김성근을 따라 고블린들을 향해 달려갔다.
‘그저 힘밖에 자랑할 것이 없는 엑스트라라고 생각하였는데…….’
현기는 김성근의 든든하기 그지없는 뒷모습을 보며 조소를 지었다.
자신이 꿈꾸던 자리를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꿰차고 있었다. 세상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자신은 이렇게 겁먹은 쥐새끼처럼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는데 말이다.
“나는 지금 뭘 하는 거지?”
전투는 이미 시작되었다. 여기저기서 비명과 함성이 터져 나오며 유혈이 낭자하고 있었다. 현기가 머릿속으로 수없이 그려 내던 전장의 모습이었다.
주변의 모든 상황이 그의 예상대로 돌아가고 있으니 이제 계획했던 대로 움직이면 되었다. 눈앞에 있는 고블린들을 모두 죽이고 이번 전쟁의 영웅이 되리라!
하지만 정작 현기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전장의 방관자가 되어 있었다. 분명 그가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구현했던 전장인데 이상하게 그는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몽환하기만 하였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멍한 눈으로 전장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너는 재능이 없다. 범재 수준이 아니라 그냥 둔재야.
창술을 가르쳐 주던 추장의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범재도 아닌 둔재라며 자신을 폄하하던 추장.
그러나 현기는 추장의 말은 인정하지 않았었다.
당연한 일이다. 세상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자신이 둔재라니. 이게 말이 되는가?
그냥 추장의 사람 보는 눈이 나쁜 것이든가 자신에겐 창술의 재능이 아닌 검술이나 마법에 대한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아니라면 자신이 대기만성 스타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하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현기는 자신에 대해 명확하게 깨달았다.
“나는 재능도 없고 용기도 없구나.”
* * *
저벅저벅.
“추장님, 잠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전장을 정리하는 병사들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호영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지, 이현기 십장?”
“추장님.”
자신의 질문에 대답할 생각도 하지 않고 갑자기 결연한 표정을 짓는 현기를 보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용건이 무엇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현기는 결연한 목소리로 호영을 불렀다가 잠시간 주저하더니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저, 결정을 내렸습니다.”
“어떤 결정이지?”
“그 전에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호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엇이든 물어보라는 눈짓을 하였다.
“추장님께서는 도대체 무엇을 보고 제가 책사나 군사 그리고 모사? 아무튼 그런 것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신 겁니까?”
순간 호영은 현기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무공을 익히는 것을 포기했나 보군. 실전을 겪으니 생각이 달라졌나?’
안 그래도 요즘 들어 주눅 들어 있는 모습을 자주 보여 주던 현기였다. 자신감 넘치던 현기가 주눅이 들 만한 이유는 한 가지였다.
바로 무공.
즉, 무공에 대한 재능이 없음을 깨닫고 자신감을 잃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 보니 왜 이같은 질문을 던지는지도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무공을 포기하고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하려는 것일 터.
그리고 그 새로운 무언가는 호영이 원하는 책사일 확률이 높았다.
“어떠한 지지 세력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고작 몇 달 만에 이씨 일족의 족장이 되었다. 우리 식으로 따지면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청년이 1년도 안 되어 중소기업의 사장이 된 셈이지. 자기 힘으로 말이야.”
“하지만 그것은 추장님이 도왔기에 가능했던 거 아닙니까?”
“난 도와준 게 아니야. 거래를 한 거지. 그 거래를 이용한 것이 바로 너고.”
실제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호영은 현기보다는 자신이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하였다. 호영은 기존의 족장들을 숙청할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는데, 그 방법을 만들어 준 것이 이현기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현기는 여전히 납득하지 못했는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역사학을 공부하는 일개 대학생에 불과합니다만.”
“그게 뭔 상관이지? 나도 실전을 경험한 북파 공작원이나 무술을 수련하는 무술가가 아니야. 평범한 일반인이지.”
“…….”
현기는 호영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호영이 평범한 일반인이라는 사실에 놀라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호영의 추진력이나 카리스마, 그리고 무술 실력 같은 것을 보면 평범한 일반인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제아무리 현리의 유저들 중에 몇 명 없는 퍼스트 유저라고 해도 추장으로서 보여 준 호영의 능력은 평범함을 아득하게 넘어섰다.
하지만 그렇기에 현기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소설에서나 나올 정도로 화려하고 다채로운 인생을 살았을 것이라 생각했던 호영이 평범한 일반인이라니.
현기는 자신도 현실 시간으로 1년만 투자하면 호영처럼 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그러자 허리가 바짝 곧추세워지며 눈빛이 바뀌었다. 무언가 마음의 결심을 한 것이 분명했다.
실제로 현기는 호영에게 고개 숙이며 말했다.
“저는 소설과 역사를 좋아하는 평범한 대학생에 불과합니다. 사회 경험도 부족하고요. 이런데도 제 조력이 필요하다는 겁니까?”
당연히 괜찮았다. 호영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답했다.
“네가 아니라면 내 눈이 잘못된 거다. 그러니 너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여쭤보겠습니다.”
잠시 뜸을 들이던 현기는 붉게 충혈 된 눈으로 호영에게 질문을 던졌다.
“만약 제가 추장님의 책사가 된다면 저는 이곳에서 주연이 될 수 있습니까?”
“주연이라고?”
호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현기가 정색하는 얼굴로 항변했다.
“저는 나름 진지합니다만.”
“아, 미안. 비웃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예상치 못한 대답이라서.”
“…….”
“한국 유일 제국의 이인자. 이 정도면 주연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 엄청난 포부에 현기는 입을 떡 벌렸다. 한국 유일 제국이라니! 이 말은 한국에서 최고가 되겠다는 선언과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이내 현기는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가만 생각해 보면 허세도 오만도 아니었다. 현리라면, 한국에서 유일하게 천 단위를 넘어 만 단위의 인구를 가진 현리라면, 한국 최강을 논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리라.
더군다나 현리의 지배자인 호영은 터무니없는 무력의 소유자에다 탁월한 지도력까지 갖춘 인물이었다.
이 정도의 조건이 주어졌는데 한국 유일 제국이 되겠다는 선언이 뭐가 흠이 되겠는가. 현기는 호영에게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추장님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증명하게끔 제대로 한번 머리를 굴려 보겠습니다. 앞으로 무엇이든 시켜만 주십시오.”
호영은 현기의 선언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자신에게 책사가 생겼다. 비록 현기의 말처럼 지금 당장은 소설을 좋아하는 일개 대학생에 불과할 수 있겠지만, 현실 시간으로 1년이 센추리 시간으로 4년이었다.
즉, 1~2년만 투자한다면 완숙의 경지에 이르기에는 충분하다는 것.
그렇기에 호영은 만족스럽게 웃을 수 있었다.
* * *
“오랜만이다.”
“……형님.”
치킨사냥에 도착하니 반가운 얼굴이 호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형님이라 부르는 유일한 사람, 바로 홍준기였다.
“잘 지냈어?”
“그냥…… 뭐, 그저 그랬습니다. 그보다, 너무 늦게 연락해서 죄송합니다.”
잘 지냈냐는 물음에 어물쩍 대답하며 고개를 숙이는 홍준기. 그 모습만 봐도 잠적했던 시간이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이제라도 연락해서 다행이지.”
“그런데 원재는 안 오는 겁니까?”
“지금 한창 바쁠 때라……. 사실 나도 시간을 비우는 것이 쉽지는 않았어.”
“많이 바쁜가 보군요…….”
준기는 살짝 씁쓸한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자신이 없는데도 변함없어 보이는 모습에 아쉬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현리는 요즘 어떻습니까? 인터넷에서 소식을 듣기는 했습니다만, 그저 주워들은 수준이라서…….”
“네가 없어서 고생했다. 병사들을 통솔하는 것이나 훈련시키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무공에 관련해서 심도 있는 토론을 나눌 사람이 너밖에 없잖아.”
“그, 그렇습니까?”
자신의 부재가 생각보다 크다는 소리에 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러워 하는 준기. 이 모습만 봐도 현리에 미련이 있음은 확실한 것 같았다.
하지만 호영이 빈말을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준기가 없어서 고생한 것은 사실이니까. 만약 준기가 있었다면 친위대를 훈련시키는 것도 한결 수월했을 터.
앞으로 있을 전쟁에서도 준기의 존재감은 무척이나 클 것이었다.
“그러니 빨리 현리로 와. 이제 곧 정복 전쟁이 시작될 텐데 네가 없으니 솔직히 답답하다.”
센추리에서는 벌써 가을이 다가오고 있었다. 가을이 지나면 겨울, 그리고 그다음이 바로 정복 전쟁이 시작될 봄이었다.
1년은커녕 6개월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호영으로선 준기의 귀환이 절실해질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다.
“사실 그 때문에 할 말이 있어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형님…… 저는 아무래도 지금 당장 현리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현리로 돌아갈 수 없다는 갑작스러운 준기의 말에 호영은 순간 안면을 일그러뜨렸다. 저도 모르게 안 좋은 상상을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