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
그런데 현기는 아바타의 능력치보다 뒤떨어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건 현기에게 반사 신경이나 전투 센스처럼 몸을 쓰는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의미하였다.
어느덧 친위대를 창설한 지 센추리 시간으로 한 달이 지났다. 몇몇 재능 있는 유저들을 선두로 스킬의 등급을 올리는 자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평범한 재능을 갖춘 유저들도 조금씩 숙련도를 높이기 시작하였는데, 현기에게 유독 진척이라는 것이 없었다.
‘이 정도면 슬슬 포기할 법도 한데, 오히려 악을 쓰고 있으니.’
원재의 조언을 듣고 난 이후 호영은 보다 적극적으로 현기를 회유하였다. 이미 그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호영이 현기에게 바라는 것은 내정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호영은 현기에게 재능이 부족하다고 직설적으로 밝히며 무공은 포기하고 내정을 담당해 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같은 호영의 회유는 오히려 현기로 하여금 악을 쓰게 만들었다. 간부 회의에 참여할 시간조차 아깝다며 독기 어린 눈으로 오직 수련에만 집중하였던 것이다.
아무래도 호영의 권유가 천재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힌 것 같았다.
“예백산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무리하지만 않았으면 좋겠군.”
이제 곧 친위대는 출정하게 될 것이었다.
목표는 예백산. 암염 광산을 완전히 확보하기 위한 출정이었다.
당연하겠지만 준비가 아무리 철저하다고 해도 피해가 없을 수는 없을 것이다.
친위대원들은 아직 심법조차 익히지 않은 상태.
호랑이라도 등장한다면 변변한 장비도 갖추지 못한 병사들은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유저들의 피해가 걱정되었다. 그들은 온실 속의 화초로서 실전이라고는 경험해 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뭐, 같은 유저라지만 김성근은 다르겠지. 강씨 일족의 일원으로서 이미 암염 광산에도 두 번이나 가 봤다고 하니까.’
호영은 시선을 돌려 김성근이라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모두가 지쳐 있는데도 그 혼자만은 멀쩡한 기색이었다.
그렇다고 수련을 대충한 것은 아니었다.
호영이 친위대에 전수한 창술은 홍준기가 만들어 낸 스킬 중 하나로, 엄청난 체력을 요구하였다. 시대가 시대다 보니 주로 몬스터나 이종족을 상대하기 위한 창술이기 때문이다.
당연하겠지만 호영이 가르칠 때는 더욱 힘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는 체력의 한계를 꿰뚫어 보는 실력자. 그렇기에 병사들을 한계까지 몰아붙일 줄 알았다. 김성근이 지치지 않고 멀쩡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의 아바타가 대단한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창술의 숙련도가 다른 병사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서였다.
‘홍준기만큼은 아니지만 어쨌든 대단한 놈이야.’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한 호영은 장훈을 불렀다.
“친위대장, 잠시 후 출정에 관련되어 병사들에게 통보할 것이 있다. 병사들의 체력이 회복되면 한자리에 집결시키도록.”
“충.”
장훈도 체력이 다한 것은 마찬가지였는지 힘겹게 대답하였다. 호영은 그런 장훈을 보며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성실하게 수련에 임한다는 것이 대견했기 때문이다.
20분 정도가 지나자 병사들이 연병장 중심에서 정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렬이 완료되자 장훈이 호영에게 말했다.
“병사들의 집결이 완료되었습니다.”
호영은 그런 장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단에 올라갔다. 단에 올라서니 백 명이 넘는 사내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의 병사, 친위대원들의 시선이었다.
호영은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는 병사들을 보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지쳤을 것이니 편한 자세로 들어라.”
“감사합니다!”
익숙하지 않은 온화한 목소리였기 때문일까? 자세는 풀어졌을지 몰라도 병사들의 얼굴은 더욱더 굳어졌다. 병사들에게 있어 호영은 호랑이 교관보다 무서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창을 가르칠 때의 호영은 그만큼 엄하였다. 물론 평소에도 엄한 편에 속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호영은 병사들의 얼굴은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무덤덤한 어조로 며칠 뒤에 있을 출정에 관해 설명하였다.
“너희들도 조금씩이나마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친위대를 이렇게까지 강하게 키우는 이유를. 나는 너희들이 짐작했던 것처럼 정복 전쟁에 나설 것이다. 대추장께서 그러했듯, 너희 친위대를 이끌고 세계를 정복할 것이라는 말이다!”
“…….”
“그리고 내일이 바로 앞으로 있을 정복 전쟁의 전초전이다. 너희들이 얼마나 발전했는가를 판단하는 시험 무대가 될 것이다.”
병사들은 여전히 긴장한 얼굴로 호영의 말을 듣기만 하였다. 그러나 이어지는 호영의 말에는 침묵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무려 출정을 거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갑작스러운 출정이 두렵게 느껴질 병사들도 있을 것이다.”
“아닙니다!”
“두렵지 않다고 해도 긴장할 병사들은 있겠지.”
“없습니다!”
이번에도 힘차게 대답하는 친위대 병사들.
그들의 대답 소리만 들으면 정말 친위대는 실전도 두려워하지 않는 강군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긴장하지 않은 것은 기존 호위대 출신의 병사들뿐이다. 신병, 아니 유저 출신의 병사들은 모두 긴장한 얼굴들이었다. 대답 소리도 작았고, 몇몇은 서로를 돌아보며 웅성거리기까지 하였다.
오직 김성근만이 희열에 찬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적은 고작해야 고블린이거나 덩치만 큰 마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함께하는 전쟁이다! 두려워 할 이유도 긴장할 필요도 없다.”
“와아아아아!”
호영이 친정한다는 소리에 함성을 내지르는 병사들. 하지만 이번에도 유저들의 반응은 미적지근하기만 하였다.
비록 센추리에 적응하며 호영을 명백한 상급자라고 인식한 유저들이지만 그렇다고 호영을 향해 맹목적인 충성심이나 경외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호영이 친정한다고 해서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질 수는 없었다.
‘날 어려워하는 것은 좋지만 이건 너무 거리감이 있는 것 같군.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친위대 소속의 유저들과도 면담을 해 봐야겠어.’
관리로 일하거나 마법을 배우고 있는 유저들, 그리고 재현처럼 특별한 업무를 맡고 있는 유저들은 모두 호영과 한 번 이상 면담이라는 것을 해 봤었다.
그는 유저들을 제법 귀하게 여겼기에 유저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친위대에 소속된 유저들은 호영과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하면서도 오히려 개인적인 만남은 없다시피 하였다.
지금 거리감이 느껴지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처음 친위대를 창설할 때 말했었지만 앞으로 있을 정복 전쟁에서 활약한 병사들에게는 엄청난 혜택이 있을 것이다.”
다시 함성이 잦아들고 침묵이 찾아왔다. 모두가 기대되는 표정으로 호영의 말을 기다렸다.
“아무리 못해도 농지는 얻을 것이고, 최고의 활약을 보여 준 병사들에게는 기사의 작위와 함께 봉토를 하사할 것이다.”
“…….”
농지를 얻는다는 말엔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하던 친위대 병사들이지만 기사의 작위나 봉토를 하사한다는 말엔 의아함을 드러냈다.
장훈조차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사가 무엇인지, 봉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하였다.
하지만 친위대의 신병이라 볼 수 있는 유저들의 반응은 달랐다. 한 명도 빠짐없이 희열에 찬 얼굴로 기대감을 품었다.
기사!
신분제가 사라진 한국이라 해도 기사라는 작위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중세 유럽을 떠올리면 기사라는 작위가 가장 먼저 떠오를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봉토라는 단어 역시 마찬가지였다. 중세 귀족의 필수 요소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봉토인 만큼 유저들이 모를 수는 없었다.
지금 주먹을 불끈 쥐며 기뻐하는 것도 두 가지를 얻게 되면 자신에게 어떠한 혜택이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주저 없이 적을 무찔러라. 나는 공을 세운 이에게 그 누구보다 관대한 군주다.”
“와아아아아!”
엄청난 함성!
지금까지 조용하기만 했던 유저들조차 열렬한 함성을 내질렀다.
더 이상 그들에게 전쟁이란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인생 역전의 기회!
센추리라는 또 하나의 세계에서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아주 엄청난 기회였다.
#부족 연합
“추장님, 부르셨다고 해서 왔습니다.”
곰만 한 덩치의 사내. 요즘 친위대를 넘어 현리 전체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하는 김성근이라는 사내가 호영에게 다가왔다.
“너에게 한 가지 부탁할 것이 있다.”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제가 설마 추장님의 부탁을 못 들어 드리겠습니까?”
의외로 공손하게 대답하는 김성근을 보며 호영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아는 김성근이라는 인물은 결코 이런 캐릭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너는 강오인가, 김성근인가?”
당연한 일이겠지만 호영처럼 게임 시간을 적절하게 조절하지를 못하든가, 아예 게임하는 시간 자체가 짧은 유저의 경우 이중인격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아무리 행동 설정을 해 놓는다고 해도 유저들이 로그아웃하는 동안 본래 아바타의 인격이 되돌아오면 티가 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김성근의 경우는 이름을 아예 다르게 사용하는 까닭인지 누가 봐도 이중인격처럼 보였다.
로그아웃하였을 때는 본래 아바타 강오가 순둥이 같은 모습을 보여 준다면, 로그인했을 때는 유저 김성근으로서 화통하지만 막무가내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렇다 보니 호영은 지금 눈앞에 있는 자가 유저 김성근인지 아바타 강오인지 헷갈렸다. 눈빛을 보면 김성근이 맞는데 조금이나마 예의를 갖추는 것이 김성근답지가 않았던 것이다.
원래의 김성근이었다면 호영을 동네 아저씨 대하듯 ‘형씨’라고 불렀을 것이며 애초에 존댓말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도 못 알아보시는 겁니까? 저, 김성근입니다. 김성근.”
콧김을 뿜어내며 자신이 김성근이라고 강하게 외치는 김성근이었다.
“그 태도를 보니 알겠네. 원래의 너였으면 하지 않았을 말들을 하니 잠시 착각했다.”
“대장이 추장님에게 공손히 대하라는데 어쩝니까? 따라는 줘야지.”
김성근의 말에 호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누구 앞에서든 거침없이 행동하는 김성근이지만 친위대 대장인 장훈의 말만큼은 따라 주는 모양이었다.
“근데 무엇을 부탁하려는 겁니까?”
“예백산으로 출정할 때, 네가 이현기 십장을 지켜 줬으면 좋겠다.”
“엥? 그 약골을 지키라니, 그게 갑자기 무슨 말입니까?”
기겁하는 김성근의 모습을 보며 호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상관이라 할 수 있는 이현기를 약골이라 불러서가 아니라 십장인데도 병사들에게 무시받고 있는 이현기가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스텟부터가 지력에 몰빵 되어 있으면서 왜 계속 병사로 남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네.’
하지만 아예 이해하지 못할 일도 아니었다. 솔직히 호영이 똑같은 상황에 직면했어도 어떻게든 무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니까.
“약하니까, 네가 지켜 줘.”
“그 사람이 저보다 선임이지 않습니까? 군대로 따지면 일종에 분대장이라 할 수 있는데 일개 훈련병인 제가 어떻게 지켜 줍니까? 그리고 저보다는 추장님이 지키시는 게 낫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