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79화 (79/345)

# 79

현기는 깔끔하게 물러났다. 나설 때와 나서지 말아야 할 때를 확실하게 구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역시 이러한 모습만 봐도 책사나 군사의 직책을 맡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해 보였다.

“치안대장, 현리의 치안 상황은 어떠한가?”

현기 이후에 호영이 상대한 간부는 치안대장의 직위를 가진 대형이었다. 무려 치안을 담당하는 직위인 만큼 대형 역시 권력으로는 손에 꼽히는 인물이었다.

당연히 호영으로서도 소홀히 대할 수 없는 상대였다.

“최근 들어 노예가 주인을 공격한다거나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등 망측한 일이 많아졌습니다.”

“치안이 안 좋아졌겠군.”

“그건 아닙니다. 감찰관이 협조해 주어서 범죄자는 놓치는 일 없이 확실하게 처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망측한 일을 벌이는 자들 외에는 부족민들 대다수가 순종한 태도를 보이고 있어, 전체적으로는 치안이 나쁘지 않습니다.”

호영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형이 말하는 자들은 아마 새로 유입된 유저들일 터.

비록 피해를 조금 받았다고 해도 범죄를 저지른 유저들을 확실하게 처리한 것은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재미 삼아 범죄를 저지르는 유저들에게 경고의 의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잘하고 있다. 지금처럼만 해.”

“가, 감사합니다!”

“그리고 내년부터는 치안대가 할 일이 많을 거야.”

“내년이라 하시면?”

“정복 전쟁이 시작되면 새로운 부족민들이 유입될 것이 아닌가.”

“아…….”

“철저하게 준비해 놔.”

“알겠습니다!”

크게 공을 세운 것도 아니고, 그렇다 해서 능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그저 호영의 혈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치안대장이 된 대형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대형은 치안대장으로서 기대 이상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치안을 바로잡는 것은 물론이요, 기대하지 않았던 대민 지원까지 열심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활약 덕분에 민심이 확실하게 수습되었다. 호영으로선 만족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대형까지 제 할 일을 해 주다니. 정말 모든 게 순조롭군. 이대로 몇 개월만 더 힘을 비축한다면 내년에는 강서구는 물론이고, 양천구와 영등포까지 정복할 수 있겠어.’

1분기, 즉 센추리에서 1년이라는 시간은 부족을 안정시키고 힘을 비축시키는 기간이었다.

1회 차였다면 1년이나 기다릴 필요 없이 곧바로 정복 전쟁을 시작했겠지만 현리의 인구는 무려 1만이나 되었다.

만약 대책 없이 정복 전쟁에 나섰다간 겨울에 식량 부족으로 자멸할 수밖에 없을 터.

그런 의미에서 1년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에 따라 2회 차에서 확보할 수 있는 영토의 크기가 달라지게 될 것이었다.

혁명이 끝난 후 지금까지는 평탄하고 순조롭기 그지없었다. 원재의 활약도 활약이지만 그가 선택한 AI들이 크게 활약한 덕분이었다.

호영은 앞으로도 계속 일의 진행이 순조롭기를 바랐다.

* * *

“현실에서는 오랜만이네요.”

“그러게. 원래라면 준기까지 끼고 셋이서 술 마셨을 텐데.”

센추리에서는 매일같이 만나는 원재와 호영이었지만 현실에서는 거의 한 달 만의 만남이었다.

1회 차, 그러니까 작년에는 준기가 있어 셋이서 의기투합을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올해 들어 준기가 빠지는 바람에 현실에서 만날 일이 줄어든 것이었다.

“준기는 아직도 연락이 없습니까?”

“ 있었어. 다음 주쯤에 한번 만나자는데?”

“정말입니까? 후우, 이제 조금 괜찮아졌나 봅니다.”

“동생의 말을 들어 보면 폐인처럼 센추리만 한다던데.”

“센추리에서는 어느 부족에 있답니까?”

“정확힌 모르겠고, 초씨 일족이 이끄는 조그만 부족인 것 같아.”

“흐음, 현리로 돌아오기는 하겠죠? 설마 독립한다거나…….”

원재는 살짝 불안한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매일 센추리를 하다 보니 준기의 얼굴을 보지 않은 시간만 벌써 반년이 다 되어 가는 것 같았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반년 가까이 얼굴을 보지 못했으니 불안할 법도 하였다.

“글쎄…… 일단 만나 봐야지.”

호영도 확신할 수는 없었는지 그렇게 대답하였다.

그러자 두 사람 사이에 잠시 동안 정적이 흘렀다.

준기의 배신. 그것은 두 사람에게 있어 생각조차 하기 싫을 정도로 끔찍한 일이었다.

비록 센추리에서 맺어진 인연이지만 준기와의 관계는 고등학교 친구보다 훨씬 특별한 관계였기 때문이다.

“식량 문제는 어떻습니까? 과연 내년까지 충분한 양의 식량을 비축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침묵이 길어지자 원재가 분위기를 전환시킬 의도로 센추리 내부의 사정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아직은 확신할 수 없어. 너도 알겠지만 지금 시대의 농사라는 게 운에 의지하는 경향이 크잖아. 현대 지식을 통해 성공 확률을 높일 수 있기는 한데, 올해의 농사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어.”

“하기야 제방이나 저수지 같은 것을 만들 시간이 부족하기는 했죠. 근데 경비대가 사냥을 통해 고기 같은 것을 비축하고 있지 않습니까? 훈제를 하면 어느 정도 식량이 모일 것 같은데…….”

“뭐, 경비대도 경비대지만 수씨 일족의 노예들을 총동원해 물고기를 대규모로 포획하고 있기는 해. 하지만 가축을 잡는 것도 아니고, 사냥하는 것만으로 수천의 인구를 감당하기는 힘들지.”

지금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식량이었다.

1회 차 때야 인구밀도가 워낙 낮았고, 도처에 먹을거리들이 넘쳐났다. 당분은 무척이나 낮지만 열매를 먹고 싶을 때 얼마든지 먹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2회 차인 지금은 무려 1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기에 식량 자원이 그리 풍족하지만은 않았다.

특히 오크족의 쇠퇴와 거인족의 몰락으로 수인족이 급격하게 늘어나는 바람에 더욱 자원이 줄어들었다.

즉, 이제는 열매를 따거나 식물을 채집하려면 산이나 원시림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현리의 인구가 지나치게 많으니 오히려 정복 전쟁에 방해가 되는 경우네요.”

호영은 그같은 말에 피식 웃음을 지었다.

맞는 말이기는 한데 정복 전쟁에서 얻으려는 것이 결국 인구라는 것을 생각하면 절대 동의할 수도 없는 말이었다.

“아무튼 올해 농사가 평타만 친다면 내년의 정복 전쟁은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거야. 무리하게 확장하지만 않는다면 말이지.”

“그렇습니까? 팀장님, 그런데 강서구와 양천구 그리고 영등포의 일부를 정복하면 아무리 못해도 인구가 1만 가까이는 늘어나지 않겠습니까?”

“실제 인구는 그보다 몇 배는 많을 거야. 영등포는 특히 인구가 많거든. 물론 우리는 강가 근처의 부족만 정복할 거니까, 대충 5천에서 1만 정도 늘어나겠지.”

“5천에서 1만이 늘어난다고 해도 결코 적지 않을 텐데. 팀장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혼자서 관리하실 생각입니까?”

제법 민감하다고 볼 수 있는 발언이었다. 호영의 자질을 의심하는 발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거지?”

“솔직히 말해서 저는 이제 슬슬 지도력과 관리 능력을 갖춘 참모 격의 인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 나 혼자 현리를 다스리기는 역부족인 것 같아?”

“그렇습니다. 지금도 많이 무리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

어떻게 보면 기분이 나쁠 수 있는 말이었다. 군주인 호영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부족함을 지적받은 것과 다름없으니까.

하지만 호영은 불쾌한 기분을 느끼는 대신, 씁쓸함을 느꼈다.

‘원재가 진짜 충신이긴 하군. 진짜 충신이 아니고서야 이런 말을 하지 않지. 근데 내 꼴이 우습게 되었어. 충신에게 이런 말을 들을 정도라니. 힘든 티를 내긴 했나 보구나.’

회귀 전의 그는 군주나 정치가보단 야전 사령관에 가까웠던 사람이었다. 수천의 군대를 다루어 본 적은 있어도 1천 이상의 백성을 다루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렇다 보니 1만의 인구를 가진 현리를 다스리는 게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인구는 도시 수준인데 행정이나 정치 수준은 부족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더욱더 그러했다.

지금까지 별다른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현리의 영토가 넓어지고 인구가 늘어나면 힘에 부칠 가능성이 높았다.

특히 센추리뿐만이 아니라 커뮤니티나 유저들까지 신경 써야 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호영 혼자서는 확실히 역부족이었다.

“팀장님이 얼마나 힘드신지는 곁에서 지켜보는 제가 가장 잘 압니다. 솔직히 우리가 현실에서 오랜만에 만난 것도 준기가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시간이 없어서가 아닙니까? 요즘 운동할 시간도 부족하다면서요.”

사실 시간 자체는 부족하지 않았다. 다만 1만이라는 인구를 책임진다는 부담감 때문에 시간이 나도 운동하러 나가지 못했던 것이다.

혹시라도 현리에 문제가 생기면 재빠르게 접속해야 하니까.

하지만 어찌 되었건 원재의 말처럼 1회 차의 이사 같은 믿음직한 참모가 없어서 더욱 부담감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었다.

결국 그는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했다.

“추천할 사람이 있나 봐? 그러니 이런 말을 꺼낸 거겠지?”

“팀장님께서도 생각해 두신 사람일 겁니다. 이현기, 그라면 1회 차의 이사 대현자처럼 부족의 안살림을 책임지는 게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의외다, 네가 그 사람을 추천하다니? 알게 모르게 견제했던 거 아니었어?”

“유저라는 이유로 경각심을 가졌던 것일 뿐, 그 사람의 능력 자체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이인자와 비슷한 자리일 텐데? 네 자리를 위협할 수 있다고.”

현리의 이인자가 원재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혁명 이전부터 호영을 따랐고 심지어 호영과 같은 유저였다.

당연하겠지만 이인자로서 그가 지닌 권력은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특히 그는 감찰을 담당하고 있었기에 간부들조차 그에게는 저자세인 경우가 많았다.

“어차피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누군가를 감찰하는 정도가 답니다. 뭐, 유저들을 관리하거나 정보를 다룰 수는 있겠지만 그 이상은 저의 능력으로는 무리입니다.”

일반적인 수하라면 결코 상관에게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또는 상관의 신임을 잃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원재는 달랐다. 그는 자신의 권력 상당수를 대신할 수 있는 인재를 간절히 원하였다. 자기보다는 상관을, 그리고 전체를 위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원재를 보며 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선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이 이현기를 중용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은 언제나 너다.’

호영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원재와는 끝까지 가야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였다.

* * *

“재능이 없는 것을 넘어 이 정도면 그냥 몸치 수준인데.”

호영은 땅바닥에 쓰러진 채 헉헉대고 있는 이현기를 보며 혀를 찼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이현기에게는 재능이 없었다.

단순히 아바타의 능력치가 나쁘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대왕의 능력치가 아무리 좋아도 호영처럼 다룰 수 있는 유저가 없듯이, 아바타의 능력치가 안 좋다고 해도 재능 있고 역량 있는 사람들은 알아서 실력을 발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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