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추장은 자신에 대해 완전히 잊은 것 같았다. 당연히 건우로선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흐흐흐. 역시 날 잊지 않으셨어.”
그러나 막상 오늘이 되니 실망할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추장은 건우를 잊지 않았던 것이다.
하루아침에 노예의 신분에서 풀려나 무려 예비 친위대원이 된 사실이 그것을 증명하였다.
‘군대를 가는 건 싫지만 추장님이 나를 원하시니 어쩔 수 없군. 흐흐.’
건우는 당당하게 호위대 연병장, 이제는 친위대 연병장이라 불리는 장소를 향해 걸어갔다.
그때 건우에게 한 남자가 다가왔다. 건우의 아바타만큼 건장한 체구를 가진 사내였다.
“형씨. 형씨도 연병장으로 가나?”
“누구신데 그걸 물으시는 거죠?”
“왠지 나와 같은 목적인 것 같아서. 그런데, 형씨 혹시 수인인가? 상체가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것을 보면 수인 같기도 한데.”
흥미롭다는 듯 자신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내의 모습에 건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순간적으로 좋지 않았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혼혈입니다만 당신이 그건 왜 물으시죠?”
“당신? 아! 하하하, 이제 노예가 아닌가 보네. 유저라서 면천됐나 봐?”
무신경하게 말하는 사내의 태도에 건우의 인상은 더욱 나빠졌다. 마치 수인은 노예라는 등식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까닭이었다.
‘뭐, 수인이 죄다 노예인 것은 맞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쁜 건 기분이 나쁜 거다!’
건우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다 흠칫하는 얼굴로 사내에게 물었다.
“제가 유저인 것은 또 어떻게 알았습니까?”
“형씨가 혼혈이라며? AI들은 혼혈이라는 단어를 안 써. 써도 잡종이라는 단어를 쓰겠지. 그러니 유저일 수밖에 없지.”
제법 논리적인 말에 순간적으로 할 말이 없어지는 건우였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걷는 것에 집중하였다. 사내와 대화했다간 휘둘리기만 할 것 같았다.
“근데 어디 가문의 노예였어?”
“이제 그만 묻고 각자 갈 길 가죠. 친하지도 않은데.”
“거참, 앞으로 동료가 될 사람인데 태도가 좀 그러네. 나는 수인 유저 처음 봐서 형씨를 좋게 봤는데 말이야.”
사내는 갑자기 건우의 앞길을 막으며 그렇게 말했다. 건들거리는 모습이 마치 싸움이라도 걸 기세였다.
건우는 사내의 태도에 순간적으로 화를 내려다가 이내 눈을 내리 깔았다. 험상궂은 사내의 얼굴이 자신을 노려보자 저도 모르게 겁이 났기 때문이다.
‘썅! 게임인데도 이렇게 겁을 내다니. 근데 저 얼굴은 너무 하잖아. 현실에서도 조폭인 거 아니야?’
게임이니 용기를 낼 수도 있겠지만 건우는 아무리 해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결국 그는 구겨진 인상을 억지로 핀 채 사내에게 말했다.
“강씨 일족의 노예였습니다.”
“엥? 강씨 일족이었어? 거기 내 일족인데?”
“……그렇습니까?”
사내의 말에 건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설마 눈앞에 있는 유저가 강씨 일족의 일원이었을 줄이야.
왠지 사내와 자신 사이에 어떤 인연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건우로선 그런 인연 따위는 원치 않았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가문의 노예 중에 유저가 있었을 줄이야. 나에게 말하지 그랬어? 진즉 해방시켜 주었을 텐데.”
“여러 곳에다 말하고 다녔습니다. 인터넷에도 썼고요. 하지만 시간이 꽤나 지났는데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더군요. 몇 명이 댓글로 동정을 보내거나 자신도 비슷한 상황이라며 응원의 메시지를 남기기는 하였지만 말입니다.”
“음…… 미안. 내가 솔직히 관심이 없었어. 원래 인터넷 같은 거 잘 안 하기도 하고 나는 가문 일에 신경 쓰지 않고 몸을 단련하는 재미로 게임했었거든. 뭐, 가끔씩 산행도 했었지만 말이야.”
건우라고 사내를 원망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내가 노예제를 만든 것도 아니고 애초에 자신과 아는 사이도 아니었으니.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껄끄러운 마음이 없을 수는 없었다. 어쨌든 사내의 일족이 자신을 부려 먹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과하는 것은 의외네. 성격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건가?’
잠시 사내의 성정에 대해 생각하던 중 사내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형씨는 왜 친위대에 입대하려는 거지? 면천되었으면 조금 즐겨도 될 텐데 말이야.”
“그야 힘이 없으면 노예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까요.”
아무리 추장의 권유가 있었다고는 하나 친위대에 들어가겠다는 마음을 먹는 게 쉬울 리는 없었다.
노예 생활하는 것이 싫어서 한동안 센추리를 끊다시피 했던 건우가 아니던가. 군대에 들어가는 것은 노예가 되는 것만큼 끔찍한 일이었다.
하지만 건우는 지난날을 떠올리면서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힘이 없어서 서러움을 겪었던 것이 바로 얼마 전이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힘을 키워 다시는 서러운 일을 겪지 않게끔 만들 생각이었다.
‘딱 2회 차만 고생하자. 나는 이미 추장님의 최측근 확정이라 볼 수 있으니까, 이번에만 고생하면 귀족이 되어 계속 꿀 빨 수 있어.’
물론 즐기려고 하는 게임에서 언제까지 고생만 할 수는 없는 일. 그가 고생하는 것은 딱 2회 차까지만이었다.
“오호, 노예가 되기 싫어서 친위대가 된다는 건가? 형씨도 참 재미있는 사람이네!”
“당신도 노예였다면 그런 소리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하하하! 그건 모르는 일이지. 왜냐하면 나는 그런 이유가 없더라도 친위대에 입대할 것이었거든. 딱 봐도 재미있어 보이잖아. 스킬도 배우고 전쟁이라는 것도 경험할 수 있고 말이야!”
건우는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애초에 게임하러 왔으면서 매일같이 육체 단련을 했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재미있을 것 같아서 친위대에 입대한다니? 자신이야 입신양명을 위해 친위대에 입대하는 것이지만 사내는 그것도 아니었다.
‘숙청이 있고 나서 입지가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강씨 일족이면 귀족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사서 고생을 하네. 마조히스트인가?’
그때 사내가 갑자기 통성명을 하였다.
“그런데 이름이 뭐지? 이야기는 엄청 오래 한 것 같은데 통성명도 하지 않았네. 참고로 나는 김성근이다.”
“민우입니다. 어? 근데 김성근이라니요. 성이 강 씨잖아요?”
“여기 성이 뭐가 중요하다고. 내 실제 이름이 김성근이야. 그러니 여기서도 김성근이지.”
“…….”
그 말에 황당함을 느끼는 건우였다. 평범한 게임에서라면 현실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겠지만 센추리처럼 독특한 설정을 가진 게임에서 현실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이 정도면 게임에 몰입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 아닌가?
건우는 고개를 내젓다가 정면을 바라보았다. 마침 연병장이 보였다.
“사람이 많긴 하네.”
연병장에 들어서니 수많은 장정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건우는 살짝 긴장하였지만 성근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휘익 주변을 둘러보더니 우측을 향해 걸어갔다. 건우도 눈치를 살피다가 성근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 기준으로 왼쪽에는 기존의 호위대 소속이었던 병사들이 모여 있었고, 중간에는 다른 부대에서 전임 온 병사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우측에는 건우처럼 아예 처음으로 입대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 같았다.
‘유저들은 전부 저곳에 모여 있겠네.’
예상대로 우측에 가니 센추리와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은 단어들이 들려왔다. ‘게임’이라든가 ‘이등병’ 같은 단어가 사람들의 입에서 튀어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어이, 형씨들도 유저지?”
성근의 한마디에 유저로 추측되는 사람들의 시선이 단번에 건우와 성근에게 쏠렸다. 갑작스럽게 쏠리는 시선에 건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괜히 같이 왔다.’
설마 이런 돌발 행동을 할 줄이야. 건우는 난감한 얼굴로 사람들의 표정을 힐끔 보았다. 예상했던 것처럼 유저라고 판단되는 사람들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대놓고 유저를 거론하는군요. 경고받지 않았습니까?”
모여 있던 사내들 중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내가 눈살을 찌푸리며 성근에게 말했다.
“무슨 경고?”
“우영 님이 유저 티 내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그게 누구지? 아, 추장의 최측근? 경고를 듣긴 했는데 뭐, 어때. 어차피 게임인데.”
“……허, 추장님께 존칭조차 붙이지 않다니.”
30대 초반의 사내는 성근의 반응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역시 유저가 분명해 보였지만 ‘추장님’이라고 깍듯하게 존칭하는 걸로 봐서 센추리에 제법 잘 적응한 것 같았다.
뭔가 왕정 시대의 충신을 보는 기분이랄까.
“반말이 뭐 어때서. 어차피 같은 유저잖아? 그리고 유저 티는 형씨들이 내고 있었으면서, 무슨 내 핑계를 대?”
성근도 쾌활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는지 사내가 자신을 향해 불쾌한 표정을 짓자 까칠하게 대꾸하였다.
그런 성근의 태도에 사내가 다시 울컥하려고 할 때, 모두가 알고 있는 우영이라는 사내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무슨 소란이지?”
“…….”
우영의 한마디에 좌중은 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친위대에 들어오기로 한 유저들은 어느 정도 센추리에 적응한 사람들이었다. 애초에 적응하지 않았다면 일종의 군대라고 할 수 있는 친위대에 들어오겠다는 선택은 하지 않았으리라.
물론 성근처럼 ‘재미있을 것 같아서’라는 단순한 이유로 이같은 선택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센추리에 적응하였다는 것은 ‘신분제’에도 어느 정도 적응하였다는 뜻.
추장의 오른팔이자 신설된 ‘감찰관’의 직책을 가진 우영에게 공손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곧 추장님께서 나오실 것이니 모두 조용히 하고 있어. 그리고 계속해서 경고한 이야기지만, 추장님에게 깍듯하게 행동해. 마치 군대에서 사단장 대하듯 대하란 말이야. 알겠어?”
“예, 알겠습니다.”
“저기 추장님 나오신다. 모두 오와 열 맞춰.”
마침내 친위대원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추장이 등장했다. 존재감부터 압도적인 추장의 등장에 NPC고 유저고 가릴 것 없이 정자세를 취했다.
정말 우영의 말처럼 사단장 앞에서 사열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저 사람이 이 부족의 짱이라는 사람인가? 확실히 세 보이기는 하네.’
모두가 긴장된 눈빛을 할 때, 오직 김성근이라는 사내만이 건들거리는 자세로 추장을 바라보았다.
* * *
친위대 창설식은 조용하게 진행되었다.
원재가 미리 접촉했던 유저들을 불러 모으고 기존의 호위대 병사들을 친위대원으로 만들면서 전광석화처럼 창설식까지 진행시킨 것이었다.
‘김성근이라……. 아주 유명한 놈이 친위대에 들어왔군.’
유저들이 무려 스물세 명이나 있었지만 별다른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센추리 2회 차가 시작된 지도 벌써 한 달이 넘게 지났다.
아무리 자유분방한 성정의 유저들이라고 해도 센추리 세계에 적응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것과 관계없이 유난히 건들거리던 이가 하나 있었다.
호영이 연설할 때도, 장훈이 통솔할 때도 삐딱한 자세를 유지하던 사내.
그 사내의 이름은 바로 김성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