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
“좋습니다.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하니, 제가 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다.”
좋다고도 싫다고도 말할 수 없는 자리. 하지만 유저의 입장에서는 조금 번거로울 수 있는 직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재는 거리낌 없이 호영이 원하는 선택을 해 주었다. 어떤 일이든 호영에게 이롭다면 마다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원재를 얻은 것은 정말 신의 한 수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싱긋 웃는 호영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이 되자 호영은 성벽으로 향하였다.
어제 있었던 전투로 제법 흉한 꼴이 되어 있는 성벽.
하지만 호영은 거리낌 없이 성벽 위로 올라섰다. 그가 막 성벽 위에 올라설 때, 갑자기 엄청난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와아아아아아아!”
“대왕! 대왕! 대왕! 대왕!”
그의 아바타 이름을 연호하며 함성을 내지르는 수백, 아니 수천 명의 사람들! 성문 앞 공터에서는 마치 축제라도 벌어진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축제보다 신나는 일이긴 하지. 그토록 고대하던 혁명이 일어난 날이니까.’
군부대와 일족들 중심으로 발생한 혁명이었지만 일반 부족민들이라고 사건의 전말을 모르지는 않았다.
일반 부족민들 역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문 앞에 모여 있는 수천 명의 부족민들은 바로 그 새로운 시대를 열정적으로 기다렸던 사람들이었다.
마법사에 의해 핍박받던 부족민들, 이른바 ‘소작농’이라 할 수 있는 농민들로 자신들의 땅을 마법사에게 빼앗기고 마법사 대신 농사일을 하는 부족민들이었다.
이들이 성문 앞에 열정적으로 모인 이유도 마법사들의 최후를 지켜보기 위함이었다.
“엄청나게 모였군. 따로 알리기는 하였지만 이 정도로 모일 줄은 몰랐는데.”
“그만큼 마법사들의 악명이 높았다는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원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호영은 호위대 병사에게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눈빛을 받은 병사는 뼈창 하나를 호영에게 건네주었다.
이제 호영의 상징이라고도 볼 수 있는 뼈창. 호영이 뼈창을 병사에게 받고서 번쩍, 하늘 높이 들자 순식간에 침묵이 찾아왔다.
침묵이 찾아오자 호영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나, 대왕은 대추장, 대준 선조님의 직계 후손이다. 대추장의 후손으로서 감히 현리의 지배자를 자처하던 마법사들을 처단하고 현리를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겠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람들은 미친 듯이 ‘대왕’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원재가 여태까지 해 왔던 ‘영웅 만들기’의 성과였다.
호영은 사람들의 환호에 가슴이 빠르게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다시 한 번 외쳤다.
“하지만 나는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 것에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자랑스러운 대추장의 직계 후손으로서 더 나은 시대, 더 나은 현리를 만들어 낼 것이다!”
계속해서 ‘대추장의 직계 후손’임을 강조하는 호영. 지겨울 정도의 강조였지만 그에 대한 반응은 대단히 열광적이었다.
비록 마법사들이 만든 종교 때문에 대추장을 잠시 잊고 살았지만 모두의 기억 속에 강력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 대추장이라는 존재였다.
그렇다 보니 마법사들이 몰락하고 종교 역시 무너진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 되자 사람들은 다시금 대추장이라는 존재를 추앙하게 되었다.
마법사들이 만든 종교를 대신하여 대추장이라는 존재가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게 전설의 힘이지.’
대준이 만든 전설. 그 전설 하나로 호영은 민심을 휘어잡았다. 원래라면 호영의 아바타가 무식하고 잔인하다는 이유로 호영을 혐오하였을 것인데 말이다.
이게 바로 전설의 힘이었다, 정통성을 더해 주고 명분을 쥐여 주는. 그리고 호영은 한 번의 전설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2회 차에 또다시 전설을 만든다. 두 번의 전설이라면 마족 같은 놈들이 다시 등장한다 해도 나의 후손들에게서 권좌를 빼앗아 가지는 못할 것이야.’
호영은 자신을 향해 환호하는 사람들을 보며 그렇게 생각하고는 병사들에게 명령하였다.
“사형수들을 끌고 와라!”
사형수. 살아남은 마법사 일부와 변절자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어제, 혁명이 끝나고서 봉성을 비롯한 장훈과 대형은 병사들을 이끌고 백여 명의 사람들을 내성으로 끌고 왔다. 모두 변절자에 해당하는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오늘, 그 백여 명의 사람들 중 악질적인 변절자를 처단하기로 하였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도 사실 이 공개적인 처형식을 구경하기 위함이었다.
“자, 들어라. 이들은 모두 개인의 영달을 위해 부족을 배신한 이들이다.”
“우우우우!”
“죽여라! 죽여라!”
마치 중세 시대의 처형식을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그때의 처형식도 일종에 축제와 비슷하다고 들었는데 지금 부족민들이 보이는 모습도 반쯤 축제와 같았다.
호영은 예상대로 흘러가는 분위기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선 한마디를 외치고 처형식을 진행시켰다.
“앞으로 변절자의 최후는 이들과 같을 것이다!”
“우와아아아아아!”
병사들이 밧줄을 목에 맨 사형수를 한 명씩 끌고 와서는 성벽 밖으로 떨어뜨렸다. 성벽에 목을 매달아 죽이는 교수형이었다.
그러자 성문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사람이 죽어 가는 잔인한 광경이었지만 아무도 그 사실에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즐거워할 뿐이었다.
심지어 유저인 원재조차 평온한 기색이었다.
‘하기야 야만의 시대를 겪었는데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지. NPC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어찌 되었건 처형식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이번 처형식을 통해 호영은 무수히 많은 것을 얻었다.
대추장의 직계 후손임을 강조하며 정통성과 명분을 얻었고, 또한 민심이라는 것을 얻었다. 그리고 일족들조차 잘못을 저지르면 호영에게 벌을 받는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알렸다.
부족민들도 이제는 일족들보다 호영이 훨씬 위에 있다고 받아들일 터. 일족들의 기세는 한층 꺾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소작농 출신의 지지자들을 얻게 되었어, 그것도 무려 2천 명에 가까운 숫자로.’
마법사가 가진 재산 중에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바로 소작농이었다. 일족들이 노예를 통해 농지를 경작하였다면 마법사들은 소작농들을 노예처럼 다루며 농지를 경작하였으니까.
그리고 이제 그 소작농들은 호영의 품으로 들어왔다. 호영은 마법사들처럼 험하게 다루지 않을 것이니 소작농들이 강력한 지지자로 변모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
호영에게 아주 강력한 무기가 하나 생겨난 셈이었다.
* * *
이현기. 그는 본래 인터넷 소설에 빠져 살던 인물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거의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소설을 하루도 읽지 않은 적이 없었다.
심지어 군대에서조차 매일같이 사이버 지식 정보 방을 이용하여 소설을 읽었을 정도였다. 그만큼 이현기는 소설에 미쳐 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현기는 소설을 읽은 적이 없었다. 거의 한 달 이상 소설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세상이 존재하는데 소설에 손이 갈 리가 없지.’
그가 소설을 읽지 않은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바로 한 달 전부터 시작한 센추리라는 게임에 푹 빠져 버렸던 까닭이었다.
센추리! 이 지독하리만치 현실감 넘치는 가상현실 게임은 현기를 완전히 매료시켰다. 자는 시간이나 밥 먹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푹 빠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현기가 소설을 좋아했던 이유는 그가 꿈꾸고 고대하던 세상이 소설 속에만 존재했기 때문이다. 즉, 판타지라는 세상이 소설에서만 존재하기에 소설을 읽으며 대리만족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센추리라는 게임에는 그가 그토록 고대하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마법, 마나, 전쟁, 그리고 오크와 이종족.
그야말로 없는 것이 없었다. 또한 이곳에서는 왕이 될 수도 있었고 마법사가 될 수도 있었으며 하렘왕이 될 수도 있었다. 말 그대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주인공이 되는 것도 가능하다. 이곳에서라면 나도 소설 속 주인공처럼 될 수 있는 것이야!”
현기는 센추리를 시작하게 된 순간 주인공이 되기를 원하였다.
만약 현실이라면 포기했겠지만 센추리에서는 달랐다.
지금까지는 소설로 대리만족밖에 하지 못했다면 이제는 진짜 세상의 주인공을 노려 보는 것도 가능해진 것이었다.
그리고 현기의 신분이라면 충분히 주인공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명문 일족 안에서도 명문으로 손꼽히는 이씨 일족의 일원이 바로 그의 아바타니까.
‘하지만 이미 주인공은 정해진 것 같네.’
“대왕! 대왕! 대왕! 대왕! 대왕!”
한 사람의 이름을 미친 듯이 연호하는 수천 명의 사람들.
현기는 시선을 돌려 성문 위를 바라보았다.
그곳엔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서 환호를 받고 있는 한 명의 사내가 있었다.
거대한 체구에 남자다운 얼굴을 가진 사내.
그 사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환호를 받고 있음에도 태연한 기색으로 당당하게 서 있었다.
누가 봐도 ‘주인공’에 어울리는 사내였다.
‘더 빠르고 더 과감하게 움직였어야 했나.’
처음에는 분명 비슷한 입장이었었다. 대씨 일족이 비록 전설이라 불리는 대추장의 후손이라고는 해도 이씨 일족 역시 전설에 나오는 대현자의 후손이었으니까.
하지만 현실 시간으로 한 달 정도가 지난 순간 명암이 뚜렷하게 엇갈렸다. 한 명은 현리의 최고 권력자로, 한 명은 일족의 기대주로 말이다.
현기로선 아쉽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조금 더 잘했다면 저 자리에 자신이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사내처럼 조금 더 빠르고 조금 더 과감하게 움직였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니, 과연 그랬을까? 내가 조금 더 잘했다고 반란을 성공시켜 현리의 추장이 되는 게 가능했을까?’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봤지만 자신이라면 절대 불가능했을 것 같았다. 일단 현기에게는 혁명을 이끌어 낼 만한 무력이 없었으니 말이다.
물론 무력이 있다고 해서 가능할 것 같지는 않았다. 대왕이라는 자의 로켓 같은 추진력은 결코 따라 할 수 없을 테니까.
그렇기에 실망스러웠다. 자신은 이번에도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 또다시 대리만족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저자의 옆에 서고 싶다.’
실망하는 것도 잠시, 현기는 성벽 위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마치 보석처럼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사내.
문뜩 그의 옆에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곳에 있으면 자신도 주인공이 된 기분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자신도…… 찬란하게 빛날 수 있지 않을까?
재미있는 소설을 읽을 때마다 느꼈던 욕망이 샘솟아 올랐다.
불끈.
현기는 주먹을 강하게 쥐고는 ‘대왕’의 옆에 있는 평범한 체구에 평범한 외모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우영.”
우씨 일족의 사내.
하지만 명문 일족으로 손꼽히는 우씨 일족이라는 배경보다 대왕의 최측근이라는 배경으로 훨씬 더 유명한 사내였다.
‘저 사람도 분명 유저겠지.’
이미 대왕이 유저라는 사실은 확신하고 있는 상태. 당연히 그런 대왕을 오래전부터 따르던 우영이라는 자는 유저일 게 분명하였다.
‘유저도 최측근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도, 저자의 옆에 설 수 있다!’
현기는 다시금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 정신이 고양되는 기분이었다. 저자의 옆에 설 수 있다니. 현리의 영웅이 될 수 있다니!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대왕이라는 자에게 다가가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