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69화 (69/345)

# 69

살고 싶으면 목숨을 구걸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군. 학살이 일어나지는 않겠어.’

쿠데타라는 것은 엄청난 유혈 사태를 동반하는 법이었다. 특히나 마법사라는 계급에 적대감을 가졌고 훈련도 되지 않은 오합지졸들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내성이 피바다가 되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하지만 혁명을 주도하는 사람은 호영이었다.

1천여 명의 장정들은 호영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상황.

그의 노력에 장정들 역시 살생을 최대한 억제하였다.

‘마법 지식이 없어지는 것은 나에게 손해지. 차라리 노예로 쓰면 썼지, 죽일 필요는 없어.’

물론 호영이 인도적 차원에서 살생을 금하는 명령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그로서는 어디까지나 효율을 생각했을 뿐.

아무튼 호영의 조치 덕에 유혈 사태는 막을 수 있었다.

“마법 연구실 점령에 성공하였습니다.”

“훈련장에 잔존한 사병들의 처리를 완료하였습니다.”

“추장이 사용하는 공관과 집무실도 모두 점령하였습니다.”

내성으로 진입하고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호영에게로 시설 점령이 완료되었다는 보고들이 속속 들어왔다.

어느덧 내성의 주요 시설은 모두 장악한 상황. 혁명의 끝이 다가왔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이제 남은 것은 족장들을 휘어잡는 것인가?’

호영은 속으로 그같은 생각을 하며 점령이 완료되었다는 추장의 집무실로 향하였다. 추장이 되기 위한 발걸음이었다.

그런 호영의 뒤를 족장들이 다급하게 따라붙었다.

현재 최고 권력자는 호영으로 정해진 것과 다름없는 상황.

하지만 호영을 보필할 인사들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들로선 호영의 눈에 들어 현리의 권력자가 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경하드립니다!”

“경하드립니다!”

집무실에 들어서기 무섭게 족장들이 호영에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이전의 호영을 대하는 것과 전혀 다른, 하나같이 공손하기 그지없는 모습들이었다.

호영은 그런 족장들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지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를 벌레 보듯 바라보았는데 말이지.’

대왕의 이미지가 형편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족장들의 돌변한 모습은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 권력이 좋은 것이었다. 권력 하나로 사람들의 시선이 이토록 달라지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이자들을 우습게 볼 수도 없는 일이지. 특히 지금처럼 나의 기반이 불안정하기 그지없는 상황에서라면 더욱더.’

마법사들에게 무시받고 핍박받던 일족의 수장들이지만 사실 현리에서 족장이라는 자리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일족마다 보유하고 있는 노예의 수만 수십이 넘어섰고, 보유한 농토 역시 어마어마하였다.

거기에 치안대나 호위대, 경비대 그리고 관리 따위의 관직을 독점하고 있는 것도 일족들이었다. 마법사가 왕족으로 비유된다면 그들은 사실상 귀족으로 비유할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이제 막 정권을 탈취한 호영으로선 구태여 일족들과 적대 관계를 형성할 필요가 없었다. 안정적인 통치를 위해선 그들의 조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던 까닭이다.

그렇기에 호영은 공손하지는 않지만 오만하지도 않은 평범한 목소리로 족장들에게 말했다.

“모두 감사하오. 그대들의 조력이 있었기에 이번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소.”

호영의 그 한마디에 족장들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어떻게 보면 립서비스에 불과한 말이었지만 립서비스를 했다는 자체만으로 그들에겐 기꺼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오만하고 예의 없으며 무식하기까지 한 대왕이기 때문이다.

“아닙니다. 이번 혁명은 대왕님이 주도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대왕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소.”

“하하! 사실을 말했을 따름입니다. 저희들이야말로 대왕님께 감사드립니다.”

호영과 일족들은 하하 호호 웃으며 서로를 칭찬해 주었다. 실로 화목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화목하게 웃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

호영은 웃음을 지우며 그들이 불편해할 만한 말을 꺼내 들었다.

“한데 수씨 일족이나 중씨 일족은 왜 이번 혁명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오?”

“…….”

수씨 일족과 중씨 일족. 그들은 이번 혁명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대왕이 싫어서.

마법사와 혈연으로 얽혀 있어서.

혁명이 실패할 것 같아서.

물론 수씨 일족의 경우, 족장을 비롯한 일족 주요 인사들이 마법사들에게 숙청당하여 명령 체계가 무너진 것도 이유라면 이유였다. 마땅히 일족을 통제할 사람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어찌 되었건 혁명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분명한 사실. 호영으로선 묵과하고 넘어갈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마법사의 끄나풀과 다를 바 없습니다. 변절자는 철저히 배제해야 합니다!”

“아닙니다. 비록 두 일족이 혁명에 참여하지 않았어도 그들은 현리를 대표하는 자랑스러운 일족들입니다!”

“자랑스럽다니. 그렇다면 왜 혁명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오?”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여 참여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지 않소.”

“그럴 리가. 만약 그렇다면 이제라도 왔어야지?”

호영이 꺼낸 한마디에 일족들의 의견이 두 가지로 갈렸다. 지금까지는 나름 하나 된 모습이었는데 순식간에 분열된 것이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들이 현리를 지배한 지도 70년이 지났다. 기나긴 세월 동안 마법사와 타협한 일족들도 있었고 마법사와 적대한 일족들도 있었다.

이도 저도 아닌 일족들도 무수히 많았고 말이다. 그중에 중씨 일족과 수씨 일족은 마법사와 타협한, 아니 타협을 넘어 마법사와 혼인한 일족들이었다.

한마디로 친 마법사 세력을 대표하는 일족이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혁명에 참여한 일족들 중에는 과거 친마법사 세력에 속해 있던 일족들도 있었다.

그들로선 과거가 과거다 보니 두 일족을 옹호해 줄 수밖에 없었다. 두 일족이 처벌당한다면 그들이라고 떳떳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조용.”

“…….”

“두 일족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소. 변절자를 용서해 줄 수는 없는 일이니까. 대추장께서 변절자를 용서한 적은 없지 않소?”

이 말에 두 일족의 최후가 결정되었다.

숙청. 두 일족은 호영의 손에 처참하게 숙청될 것이었다.

* * *

두 일족을 숙청하기로 결정한 것은 변절자의 최후에 대한 일벌백계를 위해서기도 하지만 일족들을 압박하기 위함이기도 하였다.

앞으로 호영의 정적은 족장들이 될 가능성이 높을 터. 이번 숙청을 계기로 힘의 우위를 명확하게 보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물론 덤으로 일족들을 두 파벌로 나누는 효과도 있을 것이고 말이다.

‘어쨌든 명분은 얻었다. 이제 숙청할 때야.’

속전속결!

족장들에게 숙청의 이유를 말함으로써 명분을 얻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군사들을 이끌고 두 일족을 몰락시키는 것이었다.

“감축드립니다, 대장님.”

“경하드립니다, 대왕님.”

호영은 곧바로 자신의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지금 호영을 찾아온 사람들은 혁명을 일으키기 전부터 호영을 따르던 인사들이었다.

봉하, 봉성, 장훈, 원재 그 외에 사씨 일족과 우씨 일족 그리고 대씨 일족과 소수의 봉씨 일족의 일원들.

이른바 ‘친위’ 세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인물들로, 호영이 현재 가장 믿고 신뢰하는 이들이었다.

“너희들이 있어 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다. 모두들 나와 함께해 주어서 고맙다.”

호영의 그 한마디에 몇몇 사내들이 감격스러운 얼굴로 부르르 떨었다.

그들이라고 과연 호영이 추장이 될 것을 예상하였을까?

아마 전혀 못했을 것이다.

그야말로 얼떨결에 대박이 터진 것.

난데없이 복권에 담청된 것과 느낌 자체는 다르지 않으리라.

그렇기에 감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제 새로운 시대가 열렸고 그 새로운 시대는 자신들에게 이로운 시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긴장을 풀지는 마라. 아직 혁명은 끝난 것이 아니다.”

족장들한테도 그랬던 것처럼 호영은 뜬금없이 ‘돌직구’를 날렸다.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위력적인 한마디였다.

당연하겠지만 호영의 한마디에 사내들은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예상할 수가 없었던 까닭이다.

“장훈, 병사들의 피해는 어느 정도지?”

“호위대는 세 명, 치안대와 경비대는 각각 다섯 명입니다.”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지만 장훈은 지체 없이 답변하였다. 유능한 지휘관으로서 피해 상황을 보고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다행히 피해가 크지는 않군. 바로 그들을 움직일 수 있겠나?”

하지만 호영이 이어서 한 질문에는 재깍 대답하지 못하였다.

그들뿐만이 아니라 병사들 전체가 긴장이 풀어진 상황이었다. 호위대야 내성에서 여전히 무장하고 있었지만 나머지 두 부대는 완전히 해산된 상태였다.

해산된 두 부대를 다시 모집하고 움직이는 게 쉬울 리 없었다. 무엇보다 장훈이 다른 두 부대를 이끌 수 있었던 것은 내전이라는 특수 상황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치안대에 수씨 일족의 기반이 남아 있고 경비대 역시 어수선한 분위기가 아니었다면 장훈이 통솔하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으리라.

한마디로 지금 장훈의 역량으로는 군을 다시 움직이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호위대는 바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하나 다른 부대는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치안대나 경비대는 다른 이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겠군.”

호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시선을 돌려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봉성.”

“말씀하십시오.”

“경비대를 통솔할 수 있겠나? 지금 바로 해야 한다.”

잠시 말문을 닫았던 봉성은 이내 자신감 있는 어조로 대답하였다.

“명하신다면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그렇다면 봉성은 오늘부로 경비대의 대장이다.”

급작스러운 말이었지만 그 누구도 당황하거나 불만을 품지 않았다. 심지어 장훈조차 이견을 내세우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봉성도 호영 수준은 아니지만 혁명 영웅의 한 명으로 손꼽히는 상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엄청난 괴력으로 성문을 파괴시킨 사람이었으니까.

영웅이자 공신으로서 귀하게 대접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봉성 정도의 역량을 가진 이라면 경비대를 통솔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터.

그렇게 모두의 인정을 받아서 경비대는 다시 봉씨 일족의 폼으로 돌아갔다. 무려 수십 년 만의 일이었다.

“치안대는 대형, 네가 맡아라.”

“감사합니다!”

대형. 대씨 일족의 일원으로서 얼마 전부터 호영을 따르던 인물이었다. 솔직히, 세운 공으로 보나 가진 능력으로 보나 그렇게 빼어나다고 볼 수 없는 인물이었다.

호영이 기억하기로 20이 넘는 능력치가 하나밖에 없었을 정도니까. 하지만 어찌 되었건 대형은 대씨 일족의 일원이었다. 즉, 친위 세력의 일원이라는 것이다.

현재 호영은 친위 세력의 힘을 크게 키워야 하는 상황. 나중에는 상황이 달라지겠지만 지금은 일단 능력에 상관없이 친위 세력 위주로 기용할 수밖에 없었다.

‘일족들의 영향력이 약해지면 그때는 진정한 능력 중심의 사회를 만들어야겠지.’

그래야 나라가 건강해진다. 호영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가지며 조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할 것이 아니다. 지금 바로 치안대를 통솔해야 하니까.”

“…….”

“왜, 막상 통솔해야 한다니 두려운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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